작자 미상, 여리고의 맹인을 고치신 예수, 980년 쯤
지나가는 예수님께 소리 질러 인생을 역전시킨 대표적인 사람이 여리고의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마가 10:46~48)
1000년 전, 이름 모를 화가가 이 장면을 그렸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의 눈으로 보면 못 그린 그림이다. 저런 나무가 있을까? 바디매오의 다리만 보면 덩치 크고 운동 열심히 한 사람 같다. 예수님의 발은 옆에 있는 베드로의 발을 밟고 있다. 아직 표현 방식이 세련되지 않고 서툴다. 그러나 이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의 묘사가 아니다.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주제 하나에 충실했다.
바디매오의 문제는 바로 눈이었다. 그의 눈이 감겨있다. 눈만 아니면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릴 것이다. 그런데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그의 인생 전체를 뒤틀어버렸다.
화가는 바디매오의 눈과 예수님 일행의 눈을 대조시켰다. 바디매오 맞은편 사람들은 모두 눈이 크다. 놀란 토끼처럼 크게 그려 의도적으로 바디매오와 대비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눈은 크기도 하거니와 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주님의 그 큰 눈이 향하는 곳이 바로 닫힌 바디매오의 눈이다.
주님의 손이 간절함으로 내민 바디매오의 손에 닿으려 한다. 주님과 내 인생이 접촉하는 순간이 바로 구원의 때요, 새 창조의 순간이다.
이렇게 바디매오가 주님을 만나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예수님을 간절하게 부르는 바디매오를 향해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야단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럴 때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점이다. 이것이 포인트다.
우리는 응원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소리치지 못하는 때가 많다. 더구나 평생 장애인으로 주눅 들어 살던 바디매오가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소리쳐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은 주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과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함의 결과다.
지금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주님을 부를 때다. 우리의 현실이 절박하기 때문이고, 주님의 구원 능력은 위대하기 때문이다.
-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성서일과 - 이사야 55:6~7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