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2024년 6월 30일, 성령강림후 6주)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지 1:13-15, 2:23-24; 시 30; 고후 8:7-15; 막 5:21-43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솔로몬 지혜서 1:13-15, 2:23-24}
13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14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옥을 모르며
15 의인은 죽지 않는다.
23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따서 인간을 만드셨다.
24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
[신학적 관점]
잠언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지혜란 창조 때로부터 온 우주 안에 그리고 인간 속에 존재하는 신의 대행자로 인격체로 말해진다.
솔로몬 지혜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여라,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라.” 오늘 본문의 말씀도 당시 썰물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헬라 문명권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다. 플라톤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적 종교는 영혼불멸설을 갖고 있다. 더러운 육신은 땅에 묻혀 사라지지만, 깨끗한 영혼은 불멸(不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이란 영혼을 담는 용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본문은 인간 영혼이 불멸하긴 하지만, 그 불멸성은 인간 영혼 그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곧 정의를 행하는 일이 곧 불멸의 길로 인도한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지 않는다. 창조주 앞에 선 전인(全人)적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다”(23절)는 구절이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부분은 이어지는 말씀인 “자신의 본성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구절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 곧 정의를 행할 때에 불멸성이 함께 한다는 말이다. 이는 죽음을 악마의 영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곧 헬라철학은 죽음의 극복을 영육이원론에 기반하지만, 제1성서는 ‘정의 실천’에 두었다는 점에서 근본 차이가 있다.
[목회적 관점]
당시 세상 제국의 가르침은 오직 세상 통치자 황제만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그래서 그만이 신의 대행자라는 것이고 그만이 불멸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미이라로 보존되었다. 황제가 신으로 추앙받는 절대 권력의 시대에서 모든 이들이 다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로 평등할뿐더러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가르침은 매우 혁명적인 사고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구원관은 어떠한가? 영혼불멸설에 매여 천국 입성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석적 관점]
‘솔로몬의 지혜서’는 히브리 성서 39권에 포함되지 않아 개신교에서는 이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외경(外經, apocrypha)의 하나로 분류하지만, 유대인들이 공통년 전 2세기 경 70인역이라는 헬라어성서를 펴내면서 이를 포함시켰고, 로마가톨릭이 이에 기초한 라틴어성서(Vulgate)에 포함시켰기에 가톨릭에서는 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틴어성서는 ‘솔로몬’이란 단어를 생략) 이런 종류의 책들이 마카비우스를 비롯해서 8권이 더 있다. 이 책들은 시대적으로 보자면 제1성서와 제2성서 사이에 놓여 있으며 알렉산더대왕과 로마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그리스로마문화에 저항하여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흔히 솔로몬의 지혜서라 불리지만, 실상은 솔로몬 왕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30 BCE-40 CE 사이에 애굽 지방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한 유대인 랍비가 저술한 책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헬라문명의 중심지였다. 지혜서 또한 처음에는 영혼에 관하여 스토익학파(욕망 제어/영혼 자유)와 플라톤주의(영혼의 선재(先在)성과 불멸성)의 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사변성을 넘어 악에 저항하고 약자를 편드는 사회적 공의로움과 연계한다는 점에서 유대 지혜문학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설교적 관점]
본문의 제목으로 적당한 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답이 있고 톨스토이는 같은 제목으로 평생에 걸쳐 예수로부터 플라톤 노자 공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찰의 글들을 모아 매일매일 읽을 수 있도록 분류를 하여 무려 천 쪽이 넘는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로도 제작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희랍인 죠르바>와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을 비롯하여 여러 소설과 시를 남긴 그리스의 대표적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답처럼 간명하면서도 명쾌한 답은 드문 것 같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이란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나 어두운 무덤으로 가는 것이고, 삶이란 이 두 어둠 사이의 짧고 빛나는 순간'이다." 만약 그가 이 문장을 영어로 말하였다면 이 두 어둠이란 womb과 tomb이 되고, 만약 그가 그리스어로 말했다면 mnema와 metr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역시 작가답게 매우 짧고 위트 넘치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인생을 이 두 어둠 사이의 빛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놀라운 성찰의 힘이 엿보인다. ‘의인은 죽지 않는다’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찾을 수 있을까?
{시편 30}
1 야훼여, 나를 건져 주셨사오니 높이 받들어 올립니다. 원수들이 나를 보고 깔깔대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
2 야훼, 나의 하느님,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읍니다.
3 야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자들 중에서 살려 주셨읍니다.
4 야훼께 믿음 깊은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그의 거룩하신 이름 들어 감사기도 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기시고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야훼께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에는 두렵기만 하였사옵니다.
8 야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었고, 당신께 자비를 구하였읍니다.
9 "이 몸이 피를 흘린다 해서 이 몸이 땅 속에 묻힌다 해서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사옵니까?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10 야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야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 주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 입히셨사옵니다.
12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를 찬미하라 하심이니 야훼, 나의 하느님, 이 고마우심을 노래에 담아 영원히 부르리이다.
{고린도후서 8:7-15}
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8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성을 말함으로써, 여러분의 사랑도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가난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0 이 일에 내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해부터 먼저 실행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한 그 일을, 끝마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11 그러므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원하여 시작할 때에 보인 그 열성에 어울리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12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13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14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15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신학적 관점]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형제들에 대해 고린도교인들의 구제금에 대한 약속(9:1; 롬 15:26)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히 물질 나눔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성도 간의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무는 일이 된다.
본문은 신학적으로 ‘하느님의 경제학’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 그건 ‘평형(isotes, fair balance)’이다(13, 14절).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정의로운 분배’이다. 성령강림 직후의 초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가진 것을 내어 놓고 함께 사용하는 공동소유 나눔공동체였다.(행 2:44; 4:32)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낮아짐(케노시스)과 출애굽 광야 40년의 만나 사건에 연계하고 있다.(15절, 출 16:18)
[목회적 관점]
종종 강요된 헌금으로 인해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는 교우들이 있다. 그래서 봉헌함을 예배 입장시에 하는 교회도 많고, 주보에 이름을 게재하지 않기도 한다. 받은 은혜만큼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나, 가난한 교인들에 대한 각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하다 보면 받을 축복에 대한 선불 내지는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변하기도 한다.
7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교회에서 헌금(獻金, 돈을 바침)이란 단어보다 연보(捐補, 버릴 연, 도울 보)가 일반적이었다. 여신도들이 밥을 짓기 전 쌀의 일부를 떼어 모았다가 하느님께 바치는 성미(誠米)는 대표적인 연보였다. 단어의 변화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적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주석적 관점]
charis(은혜)는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 언어이다.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되는데, 7절에서는 ‘은혜로운 활동’으로 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각각 번역이 되었다. 8장과 9장에서만 8번 사용되고 있는데, 8:1-15에서만 다섯 번 사용되고 있다. 곧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들의 나눔 속에서 실체화된다는 의미이다.
[설교적 관점]
로마제국 안에서의 변방 예루살렘의 가난과 중심 고린도의 부유함의 비유는 오늘날 서구 유럽과 북미의 제1세계와 남미/아시아/아프리카의 제3세계의 차이를 생각나게 한다. 북반구와 남반구로 구분하기도 한다. 지나친 자원 소비는 지구 자체를 병들게 하고 있고, 이로 인한 기상 폐해는 일차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지구의 파국을 불러오고 말 것이다. 부자나라들의 욕망 절제와 물질 나눔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예화) 한 신도가 침례를 받기 직전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생각이 나서 꺼내놓으려고 하자 집례 목사가 말하기를, “그냥 넣어두세요. 지갑도 함께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광야의 만나 사건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혜 베품을 뜻하지만, 동시에 인간 편에서는 부한 자나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적 책임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계셨는데,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아래에 엎드려서
23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29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신학적 관점]
인간의 한계는 불치병과 죽음 앞에서 끝이 난다. 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 본문은 예수를 통해 두 여성이 치유 받는 이야기이다. 본문은 병 고침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의 드러남에 있다. 그리하여 마가는 마지막 때가 이를 때까지는 이러한 예수의 정체성이 세상 안 특히 권력자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
[목회적 관점]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교회란 기도의 힘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란 이미지가 강하게 심어져 있다. 더욱이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산기도원에 많이 들어온다. 목사 또한 예수의 능력에 힘입어 치유를 위해 안수기도를 하기도 한다. 교우들이 합심하여 진심으로 간구하기는 하지만, 환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모두가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거부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기도 한다. 차라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부활 신앙이 아닌가? Memento mori!
[주석적 관점]
마가는 한 얘기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다른 얘기로 옮겨갔다가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샌드위치 방식을 즐겨한다.(예. 3:19-35; 6:14-29; 11:15-33) 이는 이 두 이야기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고 있다. 우선 열두 해와 열두 살은 유대교를 상징한다. 그리고 두 여성이 고침 받은 이야기이다. 한 여인은 혈류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에게 모든 재산을 탕진한 밑바닥 여성이다.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다. 회당장의 딸은 아버지가 지닌 사회적 위치로 인해 보호를 받았던 여성이다. 말이 아닌 둘 다 접촉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이는 당시의 사회의 절대 기준이었던 모세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다.
[설교적 관점]
오늘 얘기는 단순히 병 고침의 얘기가 아니다. 예수는 병을 고치는 기적꾼이라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병에서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사회적 냉대와 멸시 그리고 소외로부터 회복이 일어난 것이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가 아니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네’ 믿음이다. 로마제국 하에서의 ‘믿음’은 후견인 제도(broker system) 하에서의 믿음을 의미했고, 이 믿음 체제의 맨 꼭대기는 로마황제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이러한 후견인 사회구조에서 제외된 사람들로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에게도 ‘믿음’이 있음을 알려주셨고, 이 믿음은 황제시스템을 뛰어넘어 직접 하늘에 닿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조차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성전시스템을 통하여서만 가능한 믿음이었는데, 성전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한 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음을 강조한 것은 성전시스템의 무효를 주장한 것이 된다. 곧 예수는 이를 단순히 병으로부터의 고침이 아닌 로마제국과 유대교 시스템을 무효화시키고 하느님과 만나는 ‘구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본문은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장송곡이 아닌 환희송을 불러야 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exestai).”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은 여러 번 나오지만, 이 ‘엑스타세이’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마가복음에는 딱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이 오늘 본문이고 또 다른 한 번은 복음서 맨 마지막 문장에 나온다.(16:8) 예수의 무덤가를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한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그러자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이 여인들은 남성제자들과는 달리 십자가 죽음의 현장을 함께 목격했던 매우 용감한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무엇에 겁먹고 무서워했던 것일까? 예수의 부활인가?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가시지 않고 다시금 갈릴리로 가서 저들을 기다리신다는 말 때문이었는가? 예수 부활은 개인적 사건이 아닌 로마와 유대의 기본 권력 구조를 뒤집어엎는 위험한 사건이었다. 부활은 헬라어로 anastasis이다. 접두어 ana는 ‘두 번’ 혹은 ‘위로부터’ 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 접두어이고 stasis는 ‘일어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anastasis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두 번 일어선다.’ 곧 우리가 말하는 이 땅의 삶과는 구별되는 하늘나라 부활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어선다’(저항)는 말이다. 이는 위에서 부르시는 하느님나라 건설을 향한 변혁의 삶을 의미한다.
성서가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유한에서 무한으로 넘어가는 영원의 사건이 아니었다. 부활 사건이 기록된 성서의 말씀을 보면 공통된 반응이 나오는데, 그건 죽음으로부터의 일어남은 두려움의 사건이었고, 이 두려움은 부활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이는 당시의 세상 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회정치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였던 것이고 예수는 이를 비밀로 하기 원했던 것이고, 예수를 따라다닌 겁 없던 여인들조차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외친 ‘탈리타 쿰’(Talitha cum)은 단지 한 소녀를 일으키는 외침이 아니라, 유대민족을 다시 일으키는 외침이었다.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방황하며 신음하는 갈릴리 민중들을 일으켜 세우는 외침이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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