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6월 16일(군선교 주일, 성령강림절 4주) 설교 자료

ree610 2024. 6. 11. 17:12

교회력 설교자료(2024년 6월 16일, 성령강림절 4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겔 17:22-24; 시 92:1-4, 12-15; 고후 5:6-17; 막 4:26-34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에스겔 17:22-24}

22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내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23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
24 그때에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대로 이루겠다.

[신학적 관점]

냉혹한 국제 사회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식은 없다. 그러나 강자는 영원하지 않다. 성서는 종말론적 신앙 안에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약자가 우뚝 선다고 하는 하느님의 약속을 계속하여 선포한다. 에스겔은 바빌론 포로로 억류된 상황에서 이러한 희망을 발견한다. 곧 해방의 신학이다.

[목회적 관점]

신은 인간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곧 잘 자기 생각에 하느님의 생각을 맞추곤 한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뒤집힘이다.

[주석적 관점]

주석가들은 에스겔이 593 BCE(1:1) 에서 571 BCE(29:17) 까지의 기간, 곧 예루살렘 함락 6년 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 16년간 활동한 것으로 본다. 에스겔서 일부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1-24장은 유다를 향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고, 25-48장은 유다의 적들의 패망(25:1-32:32)과 유배공동체의 회복(37장), 다윗 왕조의 복원(34장)과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재건설(40-48장)을 예언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에스겔서는 여러 환상이 그려지고 여러 동물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얘기된다. 요한계시록의 장로 요한과 같이 에스겔 또한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직접 언급할 수 없는 정치적 핍박 속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예언하고 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이, 박정희유신독재 시대에서 김남주와 같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은유와 비유 형식으로 자유와 해방과 저항을 노래했다.

{시편 92:1-4, 12-15}

1 야훼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노래하는 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사오리까?
2 아침에 당신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당신의 미쁘심을 전하는 일,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 없사옵니다.
3 열 줄 비파와 거문고를 뜯으며 수금 가락에 맞추어 노래합니다.
4 야훼여, 당신의 업적 생각하며 이 몸은 행복합니다. 손수 이루신 일들을 앞에 그리며 환성을 올립니다.
5 야훼여, 하신 일이 어이 이리 크시옵니까? 생각하심 또한 어이 이리 깊으시옵니까?
6 미욱한 자, 이를 알지 못하고 미련한 자, 이를 깨닫지 못하옵니다.
7 악한 자들이 잡초처럼 우거지고 못된 자들이 꽃처럼 피어나지만 그들은 영원히 망하고 말 것입니다.
8 야훼여, 당신만은 영원토록 높으십니다.
9 보소서, 당신의 원수들이 죽어 갑니다. 악을 일삼던 자들이 모두 흩어집니다.
10 들소처럼 나의 뿔을 높여 주시고 향긋한 향유를 이 몸에 부어 주시오니
11 나를 엿보는 자들을 내 눈으로 보았고, 나를 거슬러 달려드는 자들의 소리를 들었읍니다.
12 의로운 사람아.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아라.
13 우리 야훼의 집안에 심어진 자들아 하느님의 뜰에 뿌리를 내리고 우거지거라.
14 늙어도 여전히 열매 맺으며 물기 또한 마르지 말고 항상 푸르러라.
15 그리하여 나의 반석이신 야훼께서 굽은 데 없이 곧바르심을 널리 알려라.

{고린도후서 5:6-17}

6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8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9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11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밝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12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스스로를 치켜올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고 미친 것이요,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신학적 관점]

바울은 부활 신앙이란 피안과 영원의 세계를 믿는 것을 넘어서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설파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교인들에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세상에 매이지 않는 영적으로 변화된 삶을 요구하면서, 목회자들은 세상 잣대(육신의 잣대)를 갖고 성공(대형교회?)을 꿈꾸는 모순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석적 관점]

6절의 “우리가 ‘육신의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부활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는 말씀과는 대치되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런데 16, 17절을 읽을 때, 이 ‘육신의 몸’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을 뜻하는 양적인 단어가 아닌, ‘육신의 잣대’로 살아가는 질적인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교적 관점]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가? 예수를 믿되 세상적 잣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돈과 물질, 권력, 명예에 매인 삶을 의미한다. 신앙적으로 아니 굳이 신앙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생의 삶은 기껏 살아야 8, 90년 잠시 머물다 가는 순례자(pilgrim) 혹은 나그네(sojourner)의 삶이다. 믿음의 어버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가 그러하다. 저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지금도 유목민들의 집은 접었다폈다 하는 이동식이다. 이동을 쉽게 하려면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적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무슨 의미인가?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 『인디언의 영혼』 찰스 이스트먼(97쪽) (인터넷)

더 나아가 이 세계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태/정의/분배/평화적 관점에서.

{마가복음 4:26-34}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27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28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신학적 관점]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로서 둘 다 식물의 성장에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34절이다. 비유이긴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그 뜻을 설명한다. 곧 비의(秘意)가 담긴 비유(比喩) 말씀이다. 첫 번째 비유는 “추수 때” 곧 심판에 관련한 비유이고 두 번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이다. 보통 공중의 새들(민중)이 머물 수 있는 ‘성장’으로 이해하나 필자는 이 둘은 마가의 놀라운 편집 의도(3장 28절부터)가 담긴 서로 연결된 우리의 기대를 뒤집는 하나의 전복(顚覆) 비유로 이해한다.

우리는 복음서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독립투쟁 이후 로마제국의 매우 강화된 감시와 핍박 아래에서 기록되었다는 시대적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교 문학작품이 아닌 새로운 세계 곧 하느님의 나라로 명명되는 로마제국을 대체하는 종교적 염원과 정치적 의도가 함께 담긴 문서인 것이다.

[목회적 관점]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날의 국토나 경계 개념이 아닌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로마제국은 땅의 경계로 그어진 것이 아닌, 황제의 명령이 이행되는 곳까지를 의미한다. 독일어에서는 Gottesherrshaft로 표현된다.

영어권의 일부 학자들은 차별과 권위를 내포하고 있는 Kingdom이라는 단어 대신 환대와 연대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 Kindom으로 쓴다.

[주석적 관점]

겨자씨 비유는 그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공관복음서 모두 그리고 도마복음서에도 나온다.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사탄의 두목인 바알세불에게 붙잡혀서 미친 일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여기에 앉아 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 4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4개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첫번 째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네 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로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밭은 사람들의 마음 밭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는 ‘등불 비유로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본문이 세 번째와 네 번째 비유이다. 평범한 말씀이다. 이 속에 무슨 어려운 철학이나 신비로운 얘기가 담겨 있지 않다. 그런데 저자 마가는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4개의 비유 말씀마다 매우 이상한 해석을 덧붙인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비유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 기법인데, 오히려 예수는 저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를 말하고 더욱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말하면 저들이 회개하여 용서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들이란 예수를 적대하는 사람들이다. 비유의 목적이란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 방식이라는 것과 구원이란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하는 기본 상식을 깨는 이야기이다.

[설교적 관점]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고 했는데, 우리가 읽어본 바로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어야 할 만큼 어려운 구절은 별로 없다. 물론 한 구절은 있다. 그건 오늘의 본문 말씀 바로 앞 절에 있는 두 번째 등불의 비유 말씀의 결론 부분이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갖고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이 얘기를 오늘날의 자본주의 방식인 부익부 빈익빈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물질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혜 혹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정신적 차원의 말씀으로 해석한다면 이 또한 이해하는 일에 큰 어려움이 없다.

겨자씨 비유는 가장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드는 곧 선교나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 자주 해석이 되어져 왔다. 그런데 저자 마가는 청중들이 그렇게만 이해할까봐 염려하여 ‘예수는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하고 제자들에게는 그 숨은 설명을 따로 일일이 말하였다’ 덧붙였다.

만약 우리가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사는 농부라고 한다면 겨자씨가 자라나서 어떤 푸성귀보다 더 크게 자란다고 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 겨자는 식용작물이 아니다. 맛을 내는 아주 작은 소량만 있으면 된다. 겨자는 들판에서 쉽게 구할 수가 있다. 밭에 겨자씨가 뿌리를 내릴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농부이다. 그런데 농부가 이를 일부러 밭에 뿌린다.(31절)

당시 농부들은 아무리 수확을 많이 해도 주인이 가져가는 마름세, 로마정부가 걷어가는 농지세, 예루살렘 성전이 거둬가는 성전세 등등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매해 죽어라고 일하지만, 늘어나는 것 빚이다. 빚더미에 앉은 이 농부가 빚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을 가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몇 개의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집을 떠나 떠돌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떠도는 무리들을 먹이시는데 그게 바로 오천 명, 사천 명 급식기적 이야기의 사회적 배경이다. 빚더미에 앉아 있는 어떤 농부는 달리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세상 구조를 바꿔내기를 원한다. 그렇다고 농사를 아니 지을 수도 없고, 곡괭이를 들고 반로마 게릴라 운동에 참여할 수도 없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자씨를 몰래 심어 소출을 하지 않는 사보타지(sabotage) 저항운동이다. 한두 명이라면 지배계층이 농부를 바꾸면 되겠지만, 팔레스타인 농부들이 대규모로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되면 결국 예루살렘에 사는 지주나 로마제국은 빚을 탕감하고 세금을 깎아주는 방법 외에는 없다. 여기서 힘없는 농부들이 살아갈 길이 생긴다. 바로 이 말씀이 새들이 머문다는 뜻이다.

겨자씨 비유 말씀은 제일 작은 씨가 크게 자라난다고 하는 자본주의적 관점이 아닌, 로마제국에 맞서는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