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맥추감사 주일, 성령강림절 7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 대부분이 지키는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겔 2:1-5; 시 123; 고후 12:2-10; 막 6:1-13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에스겔 2:1-5}
1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
3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 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이날까지 나에게 죄만 지었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다. 듣든지 말든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될 것이다.
[신학적 관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분명한 차이점을 들라고 한다면 그건 한마디로 예언자적 전통 혹은 예언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사 혹은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들의 찬양과 기도를 하느님께 올려드리고 개인적인 위로와 축복을 비는 제사장 전통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향한 회개의 촉구와 사회 정의에 관한 말씀을 전하면서 국가 권력과 박제화된 종교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참고. 신 18:18) 물론 다른 종교나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왕권에 대항하여 소수의 바른 소리를 외치는 의인이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자들이 매우 중요한 신앙 전승으로 이어 내려온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고대에서 대부분 경우 종교는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그 권력이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옹호하는 국가종교의 형태로 나아가지만, 제1성서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민족은 국가종교의 틀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왕권마저 거부하고 자유와 해방의 평등공동체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제2성서에서의 세례 요한과 예수에 의해 계속된다.
[목회적 관점]
목회는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는 직임이다. 나는 오늘 목사로서 혹은 교회 전체가 참여하고 있는 예언자의 역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주석적 관점]
에스겔의 특이한 단어 사람의 아들(ben ’adam)으로 93번 등장한다. 이를 다니엘서 7장 13절의 아람어 kebar ’enosh와 연계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신 앞에 선 인간 곧 유한성을 의미한다.
에스겔에게 또 하나의 특이한 예언 신학적 관점은 이러한 예언자 전통이 유대 땅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바빌론 제국의 붙잡혀 온 포로민의 한 사람이었다. 과연 저들이 믿었던 하느님 YHWH는 살아계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이다. 이때 등장하는 하느님의 영(ru‘ach, 생기)이란 단어는 민족의 경계를 너머 세상 어디에서나 거침없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상징하고 있다. 에스겔서 전체에 걸쳐 25번 등장한다.
[설교적 관점]
에스겔을 처음 부르실 때,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반역 민족,’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민족’ 그리고 ‘반항하는 족속’이라고 부르신다. 더구나 이제 저들은 고향을 떠나 수백 킬로 떨어진 이국땅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예레미야와 같이 자신의 직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YHWH께서는 아직도 저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란 부르시는 하느님과 이를 거역하는 백성 사이에 그리고 미래의 희망과 현재의 절망 사이에 놓여 있어 항상 갈등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대림의 희망 또한 현실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오늘에 있어 바빌론 포로는 신앙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가? 당시 바빌론은 중동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군사 강국이었다.
{시편 123}
1 하늘에 앉아 계시는 이여, 내가 눈을 들어 당신을 쳐다봅니다.
2 상전의 손만 쳐다보는 종의 눈처럼 마님의 손만 쳐다보는 몸종의 눈처럼 우리 하느님 야훼의 자비를 바라 우리 눈이 그분을 쳐다봅니다.
3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야훼여, 불쌍히 보아주소서. 너무나도 멸시를 받았읍니다.
4 배부른 자들의 비웃음 소리, 교만한 자들의 그 모멸, 이제 그만 지긋지긋합니다.
{고린도후서 12:2-10}
2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가 몸으로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3 나는 이 사람이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몸으로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4 이 사람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5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두고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 내가 자랑하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나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삼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7 내가 받은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8 나는 이것을 두고 이것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관점]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바울의 신앙 고백을 우리는 <약함 역설의 신학> 혹은 <바보 역설의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비적 요소가 없으면 신앙이 아닌 하나의 신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적 요소가 너무 강하면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다. 바울은 신비 경험이 있지만, 이를 자신의 신앙 기반으로 잡지 않는다. 교만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약함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는다.
[목회적 관점]
목회자는 공인으로서 타인의 평판을 받게 마련이다. 때로는 과대평가를, 때로는 과소평가를 받는다. 그럴 때마다 일희일비한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타인의 평가에 얼마만큼 반응하는 것이 마땅할까? 평판을 무시하면 독단형이 되고 평판에 너무 민감하다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형이 된다. 나귀를 팔러 시장에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솝 우화는 이런 모습을 잘 말하고 있다.
[주석적 관점]
바울은 신비 체험을 한 자신을 3인칭의 화자로 말한다. 이는 인간의 영역 밖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가진 몸의 가시는 무엇이었을까? 학자에 따라 간질 혹은 안질로 얘기한다.
[설교적 관점]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약점 혹은 몸의 가시가 다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또 이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이 이를 없애기 위해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은 할만큼의 기도를 다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깨닫는다. 자신에게는 죽은 사람을 살리고 남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불치의 병이 존재하는 이유를. 우리는 손가락에 자주 시선을 빼앗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약점 혹은 병은 하느님의 사건을 가리키는 하나의 손가락이다. 전태일은 노동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하면서 계속하여 벽에 부딪힌다. 주위에서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린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하는 운동을 ‘바보회’라고 부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쩌면 모두 세상 똑똑이가 아닌 세상 바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상의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능력은 나의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1-13}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3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4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5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밖에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기 시작하셨는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
8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9 다만 신발은 신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10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에게 증거로 삼아라."
12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들은 많은 귀신을 내쫓으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
[신학적 관점]
예수의 신적 권위와 능력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그는 그러한 신적 능력을 얻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에서 처음으로 벽에 부딪히고 있는데, 그 벽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곧 믿음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待望)이 없는 곳에서는 믿음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한 귀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하느님 나라 건설을 방해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이는 5장에 이르러 ‘군대(레기온)’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곧 힘에 의한 독재 통치를 ‘영원한 평화’(Pax Romana)라고 외치는 로마 황제를 중심한 로마제국이다.
[목회적 관점]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인 선입견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는 존경을 받는 많은 목사들이 집에서는 아내나 자녀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는 같은 이유일까? 아니면 이 경우는 다른 경우인가?
[주석적 관점]
‘목수’라고 번역된 tekton은 일반적으로 전문직 노동자를 뜻하기보다는 일용직 노동자(날품팔이)를 뜻한다. 나사렛은 전문직 목수를 필요로 할 만큼의 큰 도시가 아니었다. Q복음서의 대가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당시 나사렛은 30여 가구에 불과한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고 말한다.
제자 파송은 초기 예수공동체의 구전 전승을 보여주는 순회 설교의 한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가에게는 허락된 지팡이와 신은 누가(9:3)와 마태(10:9)에서는 허락이 되지 않는다.
발의 먼지를 터는 행위는 랍비들이 이방지역에서 유대지역으로 들어올 때의 행하는 정결 예식이었다.
[설교적 관점]
전도(선교)의 기본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둘씩 다닌다. 둘째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다. 셋째는 영접을 베푸는 한 집에 머물러라. 넷째는 영접하지 않는 마을에 대해서는 먼지를 털어 증거를 삼으라. 이를 오늘날의 목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둘씩 다니라는 말은 서로의 힘을 합치라는 공동목회를 말한다. 예수 또한 제자들에게 능력을 나눠주고 공동목회를 지향했다. 둘째는 지팡이는 야생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성서에서 이는 하늘 능력의 상징이다. 모세의 지팡이는 애굽 사제들의 능력을 물리쳤고, 광야에서는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기도 했고, 해를 멈추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곧 세상 물질의 힘에 의존하지 말라는 말이다. 셋째는 선교의 거점을 확실하게 삼으라는 것이다. 넷째는 안되는 곳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도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행할 수가 없었다. 기적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기적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기대감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기적 그 자체로 머물고 만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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