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6월 23일(북한선교 주일, 성령강림후 5주) 설교 자료

ree610 2024. 6. 18. 11:35

북한선교 주일(6월 23일, 성령강림절 5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욥 38:1-11; 시 107:1-3, 23-32; 고후 6:1-13; 막 4:35-41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욥기 38:1-11}

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7 그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고, 천사들은 모두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다.
8 바닷물이 땅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9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흑암으로 바다를 감싼 것은, 바로 나다.
10 바다가 넘지 못하게 금을 그어 놓고, 바다를 가두고 문빗장을 지른 것은, 바로 나다.
11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 그러나 더 넘어서지는 말아라! 도도한 물결을 여기에서 멈추어라!" 하고 바다에게 명한 것이 바로 나다.

[신학적 관점]

1장부터 37장까지는 왜 선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이 나눈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욥은 불평조로 하느님께 질문을 던진다(9:32; 13:3. 15. 22, 23; 31:35). 이제 비로소 하느님이 답을 하신다. 그런데 이는 욥이 기대했던 답이 아니다. 차라리 지은 죄의 값 때문이라거나 혹은 새옹지마(塞翁之馬) 세상사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느냐? 하는 얘기라면 이해하겠는데, 뜬금없이 하느님은 시인(詩人)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우주의 운행을 노래하시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신다.

신학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욥기 1장부터 37장까지 신이라는 단어는 나오지만, 그 신은 YHWH로 특정지워지지 않는다. 비로소 본문 1절에서 YHWH라는 명칭이 등장을 하고 이후 욥과의 대화 속에서 계속 등장을 한다(40:1, 3, 6; 42:1). YHWH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처음으로 그 존재를 알리신다. YHWH라고. 문자의 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지만, 이름을 짓는 행위는 대상을 규정함으로 일어난다. 곧 숨은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이다. 신학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자유함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자 유혹이다. ‘더 넘어서지는 말아라.’

[목회적 관점]

욥의 자신의 고통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방의 의인이었고, 하느님도 인정한 그였다. 그런데 그에게 갑작스레 엄청난 고통이 임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욥의 질문에 대해 YHWH의 응답은 그저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한 노래였다.

목회를 하다 보면 누구보다도 교회 일에 열심이고 세상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던 교인들이 갑작스레 말기 암 선고를 받는 일이 생긴다. 목사가 아무리 심방을 통해 말씀으로 위로를 하여도 별 소용이 없다. 어쩌면 바닷가의 석양을 말없이 함께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은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풀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주석적 관점]

앞서 욥은 자신의 고통 가운데,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며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지적한다. 본문에서 하느님은 욥을 향해 창조의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는가?’ 하며 욥의 부재를 지적하신다.

[설교적 관점]

세상의 법칙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아 건강하여 장수를 누린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모두 그러한 논리를 갖고 욥에게 회개를 재촉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이러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때때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이 잘되는 일이 생겨난다.

욥기의 저자를 비롯하여 청중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다. 그건 욥이 너무 선함으로 사탄의 시기와 질투 속에서 일어나는 천상의 장난 혹은 연극(play)이라는 것을. 물론 인간의 삶이 단지 연극 배우와 같은 하나의 역할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필자 또한 이에 대해 무어라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욥기는 그렇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챨리 채플린은 “인생이란 가까운 데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을 했고 버나드쇼는 그의 비문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다. 원문의 뜻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시편 107:1-3, 23-32}

1 야훼께 감사 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2 야훼께서 구해 주신 자들 모두 노래하여라.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시고
3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러 모아 주셨다.
23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대양을 헤치며 장사하던 자들,
24 그들은 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았고, 깊은 바다에서 그 기적들을 보았다.
25 그가 한번 명하시자 돌풍이 일고 물결이 치솟았다.
26 하늘 높이 올랐다가, 바다 깊이 빠졌다가, 사람들은 혼이 나서 넋을 잃고
27 술취한 듯 비실비실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재주가 쓸모없이 되었다.
28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야훼께서 사경에서 건져 주셨다.
29 광풍을 잠재우시어 물결을 잠잠케 하셨다.
30 이윽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모두들 기뻐하며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바라던 항구에 다다랐다.
31 그 사랑, 야훼께 감사하여라. 인생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 모두 찬양하여라.
32 백성들 모임에서 그를 기리고 장로들 모임에서 그를 찬양하여라.

{고린도후서 6:1-13}

1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 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6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11 고린도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었습니다.
12 우리가 여러분을 옹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색한 것입니다.
13 나는 내 자녀들에게 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뜻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신학적 관점]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글이지만, 자신의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일꾼”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synergountes, 동역자)”이라고 한다. ‘일꾼’ ‘동역자’란 말은 구원이란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함께 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이자 이력서이다.  

[목회적 관점]

반대자들로 인해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을 마음이 옹색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헛소문인지 아니면 근거 있는 비난인지는 모르겠지만, 목회자 또한 때때로 교인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오해일 수도 있고, 근거 있는 비판일 수도 있다. 4-6절은 일종의 선교 간증인데, 잘못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는 부모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13절) 섬김의 종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을 가져야 한다.  

[주석적 관점]

2절은 이사야의 두 번째 종의 노래의 인용이다(49:8). ‘때’는 하늘의 능력으로 땅의 차별적인 구조가 변혁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자신의 근본 뿌리를 깨닫는 오직 현존(Dasein!)뿐이다.

[설교적 관점]

신앙인은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에는 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겉의 모습으로는 00 같으나(ho),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8-10절에는 바울이 경험한 모두 7개의 ‘ho’ 구절이 나온다.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 경험을 통해 이와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 보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마가복음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께서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찼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할까?" 하였다.

[신학적 관점]

마가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복음을 처음으로 기록으로 남겼다. 그 이전에 이미 공동체 안에는 바울의 편지가 있었고, 예수 어록이라는 Q복음서가 있었고, 도마복음 등등의 예수에 관한 기록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사적 예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로부터 시작하는 복음서를 기록했고, 이를 기반으로 마태와 누가는 탄생부터 기록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은 당대의 그리스로마철학에 맞서는 예수의 생애를 기록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관점은 복음서 저자들은 이미 반세기도 넘은 과거의 사람이었던 예수의 생애를 그려냄에 있어 어떤 잣대가 필요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이를 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잣대는 첫째 예수는 제1성서가 예언한 메시야였다는 것과 둘째는 당대 하느님의 아들로 숭배되고 있었던 로마 황제는 가짜이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이었다.

복음(유앙겔리온), 믿음(피스티스), 구원(소테리아)과 같은 복음서의 핵심 단어들은 이미 로마황제와 연계되어 로마제국을 지탱하는 주요한 이념들이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그리고 그리스도공동체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들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한 후였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곧 복음서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추체험(追體驗)의 기록인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의 이야기는 당시 그리스도공동체가 파산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전투가 있었고, 가장 유명한 전투는 아우구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티오누스의 연합군을 무찌른 악티움해전이었다. 이 전투를 승리한 이후 로마는 평화를 선언했고, 황제는 하느님의 아들로 추앙받게 된다. 또한 갈릴리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바다)가 일으키는 풍랑의 위험을 매일 경험하고 있었다. 고대 사람들은 자연의 파괴력을 자주 경험했다. 자연은 신이 일으키는 힘이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은 이를 잠재우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목회적 관점]

풍랑 가운데서도 예수는 평온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저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이는 곧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운동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 담겨 있다. 마가복음서는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중심이고 사회적으로는 민중(오흘로스) 중심이었다.

2장에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은 믿음이 있었던 반면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다. 오늘날 교회로 말하면 목사나 장로들은 믿음이 없었던 반면 신도들은 믿음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주석적 관점]

‘꾸짖으시고(epitimesen),’ ‘잠잠하라(phimotheti)’는 이미 1장 25절에서 더러운 귀신을 향해 외친 말이다. 어쩌면 이는 그냥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이방종교 혹은 황제숭배 신앙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하다.

“큰 광풍,” “아주 고요함.” “큰 두려움”은 모두 ‘매우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부사 megan을 사용하고 있다. 문학적인 요소가 깊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 구절(16:8)에서 ‘큰 두려움’에 휩싸인 여인들의 얘기로 끝을 맺는다.

[설교적 관점]

예수는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다. 이는 지역으로는 이방인 지역을 뜻하기도 하고 내용으로는 자신들의 안전지대를 벗어나서 위험이 숨어 있을 수 있는 새로운 곳으로 가자는 말씀이다.

교회는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마다 그 일은 위험부담이 크다고 하는 저항에 부딪힌다. 반면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자들은 왜 두려워했을까?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말씀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중에는 이 갈릴리바다를 상대로 평생을 살아온 전문 어부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4명이나 되었다. 저들은 자신감 넘치게 예수를 배로 모셨고(36절), 그리고 다른 배들도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스승 예수 또한 저들의 실력을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풀풀 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자신들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자신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오늘은 남북화해주일이다. 남과 북은 아직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서로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