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5. 15. 18:12

2024년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행 2:1-21; 시 104:24-34, 35b; 롬 8:22-27; 요 15:26-27; 16:4b-15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도행전 2:1-21}

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곳에 모였다.
2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와서 살았다.
6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7  그들은 놀라서,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9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11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일들을 우리 각자의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소."
12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13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15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나이 든 사람들은 꿈을 꿀 것이다.
18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19  또 나는 위로 하늘에서는 기이한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서는 표적을 나타낼 것이니, 그것은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둠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21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신학적 관점]

성령강림절(Pentecost)의 본래 이름은 오순절이다.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절이 되는 유월절로부터 오십 일째가 되는 날로 이날은 본래 모세가 YHWH 하느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 보리의 첫 수확을 감사예물로 드렸던 절기(맥추절, 칠칠절)이다.

예수 승천 이후 제자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불같이 임하였고 이후부터 저들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남녀노소 차별의 벽과 주인과 종의 계급의 벽이 허물어지는 우주 개벽의 시대가 임박했음을 깨닫고, 본래의 각자 삶의 자리로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떡을 떼며 종말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곧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초대교회 운동이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날은 교회의 생일이 된다.

[목회적 관점]

6,70년대 부흥회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도 소위 말하는 순복음 오순절파 혹은 성령파 목사들은 ’방언‘과 ’치유‘를 강조하면서 ’성령에 충만하라‘ 혹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는데,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이는 ’하느님에 충만하라‘ 혹은 ’하느님을 받으라‘는 말이 된다.

성령을 강조하다 보면 영육이원론으로 쉽게 흘러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삶과 믿음이 유리되는 잘못된 신앙인이 되기 쉽다.

[주석적 관점]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과 갈등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자 로마 황제는 교부들을 니케아로 불러들여 하나의 일치된 교리를 만들어 내도록 압박을 하여 결국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자고 하던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고 예수는 하느님의 단 하나의 독생하신 분으로서 참 하느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정통교리로 확정하였다.(니케야 신조) 그리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교회로부터 이탈하고 네스토리안 교파는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4세기에 이르자 이제는 성령 논쟁이 일어났다. 곧 성령은 성부 하느님으로부터만 출원하는가 아니면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으로부터 동시에 출원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이 또한 칼케돈 공교회와 사도신조라는 고백을 통해 성령 하느님을 고백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짓는다. 그러나 이 논쟁은 끝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라는 분리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동방교회는 성령을 성자의 하위로 보지만,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자와 성부 두 분에게서 동시적으로 나온다고 보아 성령을 성부, 성자와 동일한 차원으로 본다. 전자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그레고리 리사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다. 현재도 여호와의 증인교나 유니테리안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교리적인 관점보다 성령은 창조의 영으로 역사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의 기(氣)라고 하는 실체적인 관점이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YHWH의 영을 받아 바로 왕의 절대 권력에 맞설 수가 있었고, 엘리야 또한 아합과 이세벨의 부패한 국가권력에 맞설 수가 있었고, 예수 또한 성령에 사로잡혀 광야 40일 기도생활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고,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의 희년(禧年, 기쁨의 해, the Jubilee)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서 은총의 해라고 하는 것은 희년을 말하는 것으로 이 50년째가 되는 희년에는 노예는 모두 자유를 주어야 했고, 빚 또한 모두 탕감을 해주어야 했고, 땅 또한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는 로마가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고, 모든 땅을 식민지로 삼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예수의 발언은 로마제국의 통치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발언이 된다.

본문에서의 방언(方言)은 지방말로 이해가 가능한 언어였지만, 이후 이는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한 언어로 변질이 된다.(참조. 고전 14:26 이하)

[설교적 관점]

본문의 말씀은 교회의 탄생을 알리지만 동시에 성령은 역사를 변혁하며,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임을 알리고 있고, 교회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임을 선포하게 된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에서 일어난 방언 사건은 말과 생각이 다르고 목적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하며 하나의 집단으로 나아간 사건이다. 이는 곧 바벨탑 사건으로 말이 흩어진 인류가 하나로 뭉치게 됨을 의미한다. 바벨탑이 인간의 교만을 드러낸 반역의 상징이었다면, 오순절 방언 사건은 복음의 말씀 아래 인류가 하나 된 사건을 상징한다.

당시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알렉산더 대왕은 이미 서른 살의 나이에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을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거대한 그리스제국을 형성했고, 이어 로마제국은 모든 민족들의 서로 다른 법까지도 하나로 만들었다. 사실 1세기 초 팔레스타인 땅에는 모든 민족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와 법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순절 방언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스제국과 로마제국이 이룩한 저들의 언어는 하나이긴 하였지만, 그건 지배자의 언어였다. 사람과 사람이 출신과 피부의 색깔을 넘어 신의 딸과 아들로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인정받는 화해와 일치의 언어가 아니라 소수의 가진 자들만의 욕망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착취하고 빼앗는 지배자의 언어였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방언의 역사는 제국들의 통치와 욕망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인간의 마음을 정의와 평화와 생명 그리고 평등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으로 치유하는 언어였다. 신의 자리를 탐내 바벨탑을 쌓아 올렸던 제국들이 인간을 네 편 내 편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아 상대방을 적으로 몰아갔던 폭력의 언어가 아닌 상대방도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있는 신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는 인류 희망의 언어였다.  

그리하여 저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가족공동체가 되어 자기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행 2:44-45).

{시편 104:24-34, 35b}

24  야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25  저 크고 넓은 바다,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수없이 우글거리고
26  배들이 이리 오고 저리 가고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이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장난감입니다.
27  때를 따라 주시는 먹이를 기다리며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쳐다보다가
28  먹이를 주시면 그것을 받아 먹으니, 손만 벌리시면 그들은 배부릅니다.
29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 가지만,
30  당신께서 입김을 불러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와집니다.
31  야훼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손수 만드신 것 야훼의 기쁨 되소서.
32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뿜는구나.
33  나는 한평생 야훼를 노래하리라.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34  나의 이 노래가 그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야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구나!
35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로마서 8:22-27}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23  그뿐 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관점]

오늘날 지구환경의 문제를 다루는 학자들은 22, 23절을 인용하여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고발 이야기로 자주 인용하고 있지만, 과연 이천 년 전 사도 바울이 인간 구원을 넘어 오늘날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지구환경 구원에까지 이르는 깊은 통찰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다.

이 서신의 수신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아니라 당시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로마는 당시 세계의 부와 권력의 원천이었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뉴욕과 서울이 그러하듯이 가장 첨예한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는 도시였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상류층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순에 찬 계급사회의 밑바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다(23절). 저들에게 있어 ’몸의 구원‘이란 오늘날 제1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영적 구원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끼니와 신앙 핍박으로 인한 죽음 형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하느님의 자녀 된 소망 가운데서 참고 견디어 나가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심지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기도하기조차 힘들 때라 할지라도,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여 주신다고 위로한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의 내재성(內在性)이다.

[목회적 관점]

목회는 주위의 고통받고 신음하는 약자들의 희미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다. 이는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 어버이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서 시작한다.

[주석적 관점]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당하는‘ 고통을 보수적인 학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당시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 아래서 신음하던 모든 약소민족들의 아픔의 소리요, 토목건설에 동원되었던 노예들의 신음소리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로마를 관광하며 거대한 콜로세움을 비롯한 웅장한 건축물에 감탄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그 건물을 세우기 위해 동원되어야 했던 수십만의 노예들,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조금만 잘못하여도 가차 없이 죽였던 야만의 역사들을 우리는 간과한다. 노예들은 주인의 생명을 지키는 의무가 있었는데, 만일 주인이 피살되면 그 휘하의 노예들은 주인의 목숨을 보호하지 못한 대가로 모두 살해되기도 했다. 그 예를 타키투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네로황제 치하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다니우스 세쿤두스가 정적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그에게 속한 노예 400여 명이 함께 죽임을 당했다. 당시 로마 인구의 약 3분지 1이 노예였다. 만약 노예가 모자라면 그들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남의 자식들을 포로로 잡아 오면 되었다. 소수의 강자가 약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당시의 폭력적 상황을 바울은 고발하고 있다.

‘첫 열매’란 로마에 있는 비유대 그리스도인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23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27절)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본문은 하느님과 성령이 별개의 존재로 말해지고 있어 어색하게 들린다. 이는 인간의 관점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몸 밖에, 성령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존재자로 이해하고 두 존재자의 원활한 소통을 말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뉴스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와 이로 인한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생명체들이 계속하여 죽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지구 곳곳이 인간의 욕망으로 속살이 드러나고 있다. 자연과학에서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가이아설이 있다. 영혼구원을 넘어 지구환경의 과제로 본문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몸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영혼이 있는 것이지 않는가?

{요한복음 15:26-27; 16:4b-15}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려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말하여 두는 것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한 말을 도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 내가 이 말을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9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며,
10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너희가 나를 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11  세상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실 것이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학적 관점]

편집사 신학으로 말하면 13, 14장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라면, 15, 16장은 부활 후 예수가 요한공동체에게 주는 말씀이다. 달리 말해 15장은 13장을, 16장은 14장을 후대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당시 유대교로부터 추방을 당한 것은 물론 새로운 예수 로고스 주장으로 인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 공동체로부터도 견제를 받고 있던 요한공동체는 ‘세상 통치자’인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인해 분열과 해체의 위기에 닥쳤고, 여러 분파의 지도자들은(나사로, 마리아, 도마 등) 자신들이야 말로 예수의 참 제자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복음서 저자는 역사적으로 정체가 불분명한 ‘예수가 사랑하시는 그 제자’를 앞세우면서 부활 후 스승 예수를 대신하는 분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보혜사 성령(parakletos)’이다. 문자적 뜻은 ‘곁에 서 있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다.

예수 내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요한공동체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 예수 현존을 경험하였다.

[목회적 관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목회자들은 내 이후에 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문제를 고민한다. 교회를 사랑하는 지도자 장로들도 염려가 많다. 새로운 목회자가 오면 권력 체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서로의 염려가 맞아떨어지면서 아들이나 사위라는 직계 체제를 세우려고 한다. 요한공동체 또한 같은 고민이 있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죽으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베드로도 그런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참조. 요 21:21).

[주석적 관점]

‘나를 믿지 않는’ 자(9절)는 오늘날의 무신론자나 이웃 종교인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이천 년 전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 거부했던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던 로마제국 곧 황제 숭배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본문은 삼위일체 교리를 우회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16:1-3a를 본문에서 뺀 이유는 잘못해서 숲을 놓치고 하나의 나무에 불과한 반유대주의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추방당한 것은 이천 년 전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미움을 키울 필요는 전혀 없다. 이는 지나간 일일뿐더러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21)라고 하는 예수의 기도에 반(反)하는 일이다.

진리(aletheia)는 요한복음서에 25번 등장한다. 문자적 뜻은 은폐된 것을 벗겨낸다는 뜻이다.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 곧 진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곧 길이요 진리가 되는 것이다.

[설교적 관점]

사도행전을 일명 ‘성령행전’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초대교회의 역사가 성령의 주도하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가 현존하지 않는 상황이라 이해가 쉽다. 그런데 역사 예수의 생애를 얘기하는 요한복음은 이보다 더 ‘성령’을 강조한다.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1:33). 하느님은 성령이시다.(4:24) 선교파송에서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신다(20:23).

부록: [요아킴이 보는 성령의 역사]

교회사에서 가장 뚜렷한 ‘역사의 신학’을 제시한 사람은 4세기의 어거스틴과 12세기의 요아킴 플로리스이다. 어거스틴의 사관은 정통사관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요아킴의 사관은 이단적 사관으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향한 예루살렘 성전교권주의자들이 행했던 것과 같이 중세의 가톨릭교권이 내린 판단일 뿐이고 사도행전이나 요한복음의 얘기를 통해서 본다면 요아킴이 오히려 더 옳은 사관이다. 요아킴은 이태리의 산 지오바니 대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예언자와 성자로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행의 정진과 명상을 계속하던 중 어느 날 ‘때의 징조’를 계시받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시대로부터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노예와 같이 살던 성부의 제1시대 그리고 미완성된 자유의 영으로서의 성자의 제2시대가 지나가고 비로소 완전한 자유한 영의 성령의 제3시대가 열린다고 하는 역사인식이다.

물론 그의 주장을 지금 문자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중요한 사상은 성서와 역사의 상관관계를 통한 계시에 대한 매우 역동적인 이해를 한 것이다. 만일 성서가 세계사의 중추이고 교회가 그 모형이라면 성서야말로 역사 이해의 열쇠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성서는 ‘절대적인 교리’가 아니라 역사 과정의 구조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통적인 어거스틴의 구속사관은 성속의 이중 역사관이다. 세속의 역사는 그의 역사철학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교회사였다. 그러나 요아킴의 사관은 성속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성서에 펼쳐지는 구속사의 흐름을 보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 자신의 존재양식의 전개가 곧 세계사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역사는 교회지상주의 역사로 환원이 되어 더 이상의 변혁이 필요 없게 됨으로 비종말화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요아킴의 역사는 교회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성령의 천년왕국 시대가 오고 있다는 임박한 종말론을 다시금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을 말하는 것이다.

엘리 위젤의 책 <이방인은 없다>에 나온 글이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는 죄악에 가득 찬 한 도시의 주민들을 죄에서 구원하길 마음먹고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서, 시장에서 그들의 탐욕과 거짓과 도둑질에 대해 지적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반응을 보이는 듯하더니 차츰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죄악은 계속 일어났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에게 말한다. ‘여보시오 이방인! 당신이 아무리 외친다 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는 걸 모르시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만두지 않으시오?’ ‘처음에는 저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도 나의 말을 크게 외침으로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