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2024년 5월 26일, 성령강림후 1주, 삼위일체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사 6:1-8; 시편 29; 롬 8:12-17; 요 3:1-17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4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5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6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부집게로 집은, 타고 있는 숯을,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7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8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신학적 관점]
교회는 10세기 이래 성령강림주일에 이은 첫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켜왔다. 삼위일체는 한마디로 말해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이는 본질에 있어 하나인 아버지(어버이),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라는 세 위격(Persons)으로 동시에 활동하신다는 고백이다. 다신주의(polytheism)와는 구별이 된다. 초대교회는 니케아신조로부터 사도신조에 이르러 이를 분명하게 고백하였다.
기본적으로 신앙 자체가 신비의 영역에 속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또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는 이성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어느 한순간에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삼백 년이 넘는 오랜 기간의 토론과 논쟁을 통해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가 갖는 신앙의 정통성을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지적하듯, 개신교 전통은 근대의 주지주의적 세계관과 함께 출발하면서 교리와 삶을 분리하는 실수를 범해왔기 때문이다. “일부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발언’과 ‘인생의 복잡성’을 분리하려 시도했고, 그 결과 그들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 버렸다.”(스탠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 IVP 2016, 424.)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의 부름 이야기가 삼위일체주일 본문으로 선택이 된 것은 성전에서의 하느님의 현존으로 인한 신비에 가득 찬 모습과 ‘거룩하시다’라는 찬양이 세 번 외쳐지고 있으며 주님(YHWH)께서 스스로를 ‘우리’(8절)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적 관점]
예배(기도)란 무엇인가? 거룩의 경험(1-2절), 찬양(4절), 죄의 고백(5절), 용서의 선언(6, 7절), 말씀 선포 그리고 이에 따른 응답으로서의 자기 결단(8절)이다.
[주석적 관점]
유대 웃시야 왕은 52년간의 치적을 통해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매우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으며 그의 이름 또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처음과는 달리 권력에 취해 오만해졌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저주를 입어 병에 걸려 성전 출입을 하지 못한 채 죽었다.(740 BCE, 역하 26장) 이후 유다왕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사야는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등장하고 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YHWH의 거주하는 장소로서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었다.
8절의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문장은 창세기 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를 떠올리게 한다.
[설교적 관점]
본문은 하느님 현존의 거룩함을 스랍들과 커다란 찬양의 소리와 문지방이 흔들리는 지진과 자욱한 연기라는 초자연적인 이상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당시 시대인들의 세계관에 맞는 표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 현존의 거룩함은 달리 표현되어야 한다. 곧 호렙산의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처럼 들릴락말락하는 미세한 소리 가운데 현존하신다. 이는 물량적인 의미에서의 작은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 민중들의 신음소리를 뜻한다.
{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야훼께 돌려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야훼께 돌려 드려라.
2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야훼께 돌려 드려라. 거룩한 빛 두르신 야훼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야훼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야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4 야훼의 목소리는 힘차시고 야훼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5 야훼의 목소리에 송백이 쪼개지고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뛴다.
7 야훼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8 야훼의 목소리에 광야가 흔들거린다. 야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리고
9 야훼의 목소리에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숲은 벌거숭이가 된다. 모두 주의 성전에 모여 "영광"을 기리는 가운데
10 야훼, 거센 물결 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야훼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힘을 얻고 축복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로마서 8:12-17}
12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신학적 관점]
삼위일체 하느님으로서의 세 위격(Persons)이 어떻게 인간 구원에 관여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구원은 무엇인가?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은 세상 고통 너머의 초월적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 가치 실현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삶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인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교인들 가운데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구원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조마조마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의 경고도 있지만, 두려움은 노예 신앙의 상징이다. 참 자녀는 설사 실수를 한 경우라도 어버이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갖고 있다.(15절)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목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만인사제직이라는 소위 말하는 생활목회자(평신도) 목회를 의미한다.
[주석적 관점]
‘아바, 아버지’(Abba ho patel) abba는 아람어로 우리말로는 ‘아버지’보다는 ‘아빠’에 보다 가깝다. 왜냐하면 예수는 당시 하늘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父子) 관계의 표현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던질 수 있는 신뢰의 관계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인 동사는 krazomen(we cry)으로 그냥 ‘부른다’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외친다’는 의미이다. 악령이 돌아다니면서 소리칠 때(막 5:5),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소리를 지를 때(마 27:50), 등등 이 동사가 쓰인다.
신을 남성/여성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악한 세력부터의 ‘보호’에 방점을 둔다면, ‘아빠’로 생각할 수 있고, ‘신뢰와 사랑’에 방점을 둔다면 ‘엄마’로 생각할 수 있다. 위험한 순간 누군가는 ‘아빠’라 외치고 누군가는 ‘엄마’라고 외친다. 시대적/문화적 한계뿐만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설교적 관점]
시대를 막론하고 물질 축복에 기반한 성공과 행복은 모든 사람의 삶의 목표이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이 땅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매인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한 차별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무조건 악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성서적 사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육신 또한 하느님의 창조물이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육신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악한 것이다. 신앙은 이를 넘어서기 위한 하느님의 은혜이다. 고난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해 나설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17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상속은 무엇인가? 창조 때에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라고 하는 창조 지구 에덴동산이 아닐까? 곧 우리는 지구를 모든 생명체가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유지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3:1-17}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9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니,
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1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신학적 관점]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공관복음과는 구별이 된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를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했던 ‘로고스’ 선언, 일곱 개의 ‘에고 에이미’ 자기 정체성 선언, ‘기적’ 용어 대신에 ‘표적’ 용어 사용,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불러일으키는 성전 숙청 사건을 생애의 마지막이 아닌 처음 사건으로 가져올뿐더러 숙청이 아닌 해체 내지는 파괴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완연하게 구별이 된다.(역사적으로 보자면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서기 100년경에는 이미 성전은 파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예수의 공생애(예수 평전)를 그려내는 방법에서도 공관복음서가 도입한 많은 비유와 다양한 치유 기적 이야기 대신 몇 명의 특정 인물과 사건만을 집중하여 길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때 이야기 속에는 모세 율법과의 논쟁이 있다. 저자로 암시되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끝내 안개 속에 가두고 마는데, 이는 열두 제자의 사도권에 대한 무언의 (민중적) 저항으로 읽힌다.
본문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언급조차 되지도 않았던 나다나엘에 이어 니고데모로 자신의 <이야기 신학>을 시작한다. 이들은 다음 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숨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니고데모 이야기가 다른 인물들과 다른 점은 복음서 처음, 중간, 마지막에 걸쳐 세 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소속으로 유대교(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는 성전 파괴 이후 희생 제사 유대교 대신 rabbinic Judaism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제1성서 39권을 확정하는 얌니아공의회(주후 90년)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유대교에서 추방하는 공식적인 결의가 있었다)를 대표하며 동시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하지만 아직 영적으로 깨지 못한 어둠에 속한 사람으로(의심하는 제자), 두 번째는 산헤드린 회의에서 예수를 두둔하지만 아직은 정체가 불분명한 회색의 인물(숨은 제자)로(7:50. 51)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직후 그의 시신에 바를 엄청난 양의 몰약을 갖고 등장함으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만천하에 공개한다(19:39). 그는 (유대 율법에 매인) 어둠의 사람에서 (인간 해방의) 빛의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거듭난 생명’) 요한복음의 상징 인물이다. 본문은 이러한 극적 변화를 이끈 이는 성령임을 말한다.(8절)
[목회적 관점]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전통과 관습에 매인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한다. 예수는 분명 당시 기존종교인 유대교에 저항하여 새로운 신앙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였다. 핵심은 인간 해방이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는 본래 의미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위험한 발언으로 받아들였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저항에 부딪힐 때, 자신의 주장이 말씀의 철저함인지 아니면 기득권 보호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요한복음은 구조적으로 빛과 어둠, 영과 육 등등의 이원론적 관점을 갖고 있어 영지주의의 일파로 볼 수도 있지만, 예수의 화육 사상과 하느님의 세상 사랑과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확연한 차별성을 갖는다.
‘두 번’으로 번역된 희랍어 부사 anothen은 ‘위로부터’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곧 예수는 ‘위로부터’라는 의미로 사용한 이 단어를 니고데모는 ‘두 번’으로 이해한다. 곧 육적 이해와 영적 이해의 차이를 단어 놀이(word play)를 통해 말하고 있다. ‘성령’과 ‘바람’ 또한 같은 pneuma라는 단어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숫자를 포함하여 저자 요한은 즐겨하는 방식이다. 곧 표징(semeion)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육신(sarx)를 성령(pneuma)에 적대하는 악의 본체로 보지만, 요한은 예수의 화육(sarx)을 구원의 상징으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설교적 관점]
세 번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변화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설교도 좋지만, 이어지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와 함께 대비하며 읽을 때, 이야기의 핵심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 남성과 여성, 유대인(남한)과 사마리아인(북조선), 최상층(지도자)과 최하층(불가촉천민), 밤중과 대낮, 성령으로서의 바람과 생수, 모세의 광야 뱀 지팡이(남왕국 시온산 전승)와 야곱의 우물(북왕국 그림심산 전승), 바로 깨닫지 못하는 식자우환(識字憂患) 계층과 바로 깨닫는 바닥 민중의 대비.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둘 다 거듭난 사람의 표징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위와 안위를 포기하고 당시의 국가권력의 상징인 산헤드린 동료들이 불온한 세력의 두목으로 비난하던 갈릴리 예수를 두둔하고 그의 죽음을 기렸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얼룩진 과거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오히려 자신을 손가락질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나아가 새 생명을 전파했다. 구원이란 다름이 아닌 예수를 통해 위로부터(하느님)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세상 외부의 힘을 거슬러 이를 이겨내는 행위의 결단임을 말하고 있다. 삼위가 하나 되어 역사하는 인간 구원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해 죄악에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느님 당신의 분신인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하기까지 사랑하신다. 곧 아가페의 사랑이다. 요한복음은 이 단어가 40번 이상 등장한다. 요한복음서는 삼위의 하느님이 사랑으로 하나 된 아가페 복음서이기도 하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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