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2024년 6월 2일, 성령강림절 2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삼상 3:1-10 (11-20); 시 139:1-6, 13-18; 고후 4:5-12; 막 2:23-3:6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무엘상 3:1-20}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를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때에는 주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이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5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6 주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7 이때까지 사무엘은 주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8 주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10 그런 뒤에 주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
12 때가 오면, 내가 엘리의 집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겠다.
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심판하여 영영 없애 버리겠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을 두고 맹세한다. 엘리의 집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 씻지 못할 것이다."
15 사무엘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누워 있다가, 주의 집 문들을 열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가 환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였다.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다. 그는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17 엘리가 물었다. "주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라. 주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마디라도 나에게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심한 벌을 내리고 또 내리실 것이다."
18 사무엘은 그에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하였다. 엘리가 말하였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19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20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께서 세우신 예언자임을 알게 되었다.
[신학적 관점]
하느님의 소리를 대변하는 제사장이 엘리에서 사무엘로 옮겨가는 과정을 이야기신학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무엘은 신정(神政)정치의 핵심인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사사(판관)시대(모세, 여호수아 포함)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왕권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물로 제1성서 신학에서는 매우 독보적인 존재이다. 마지막 사사이자 첫 번째 예언자이다.
[목회적 관점]
목사는 물론 모든 신자들은 사무엘처럼 극적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만의 하늘 부름을 듣고 응답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처음 다짐과 달리 변질되는 사람도 있다. 오늘 나의 부름의 참과 거짓의 잣대는 무엇인가?
[주석적 관점]
3장은 1, 2장에서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라는 한 여인의 한(恨)의 얘기 그리고 엘리 제사장 아들들의 타락과 함께 4장에서의 블레셋 민족에게 신의 현존과 더불어 민족 운명의 상징인 언약궤를 빼앗기는 카이로스 위기의 순간에 희망의 불꽃으로 놓여 있다.
역사적으로는 실로의 멸망으로부터 사울 왕의 등장까지의 1050-1020 BCE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초기문서 형성은 7세기 말의 요시야 왕 시기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빌론포로 시기로 보기도 한다.
[설교적 관점]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 부름을 듣지만, 이것이 모두 옳게 판명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과 말이 일치할뿐더러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19, 20절) 사무엘의 부름 이야기가 반드시 생활목회자(평신도)들이 교회목회자가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다양한 직업(occupation)들은 모두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하늘 부름(calling, vocation<invocare, 라틴)이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목회 초기 필자는 어느 미국교회 주보 전면에 Ministers: All, Pastor: 000 이라는 문구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
1절(“그때에는 주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은 사무엘의 이야기를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이긴 하지만, 이는 하느님 때문인가 아니면 엘리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귀와 눈이 닫혀서인가?
{시편 139:1-6, 13-18}
1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2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3 걸어 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4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야훼께서는 다 아십니다.
5 앞뒤를 막으시고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사옵니다.
6 그 아심이 놀라와 내 힘 미치지 않고 그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납니다.
7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8 하늘에 올라 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9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11 어둠보고 이 몸 가려 달라고 해 보아도, 빛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 달라 해 보아도,
12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읍니다.
13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14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읍니다.
16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읍니다.
17 하느님, 당신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읍니다.
18 세어 보면 모래보다 많고 다 세었다 생각하면 또 있사옵니다.
{고린도후서 4:5-12}
5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9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신학적 관점]
바울이 말하는 죽음과 생명의 실체는 무엇인가? 좁은 시각에서는 다른 사도들에 의해 자신의 사도권이 위협받는 것을 뜻하지만(참조 고후 2:17), 넓은 시각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호슬리는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 예수와 바울의 혁명』(한국기독교연구소, 2024)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원전 44년에 공식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로 세워진 고린도는 처음에는 그 주민이 주로 이탈리아,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유다 지역 출신의 자유를 얻은 노예들로서 급하게 (식민지 개척을 위해) 모집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큰 야망을 품고 있었고,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민족들의 교차로에 새롭게 세워진 도시에서 단 몇 년 사이에 정착민들이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상업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지중해 각지로부터 수천 명의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왔고, 지역의 자수성가한 남녀 유지들은 막대한 재물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할 당시 매우 불평등한 인간관계는 바울로 하여금 로마의 후견인 제도와 권력구조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었음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230쪽)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로마의 질서에 동화함으로써 시민의 명예를 얻고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231쪽) “바울은 유대인 이단자라기보다는 로마의 질서에 반대하는 선동가로 간주되었다.”(235쪽) 곧 죽음의 실체는 로마제국이었으며 생명의 실체는 예수와 더불어 시작하는 나눔의 공동체적인 삶이었다.
[목회적 관점]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주석적 관점]
6절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어둠 속에서 ‘빛’은 하느님의 창조 사건(창 1:3)에 기반한 인간 해방(사 9:2)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gnosis)의 빛’은 영지주의(Gnosticism)의 출발 물음이기도 하다.
[설교적 관점]
바울의 신앙고백: 신앙의 ‘보물’ 곧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인간들의 쉽게 그리고 자주 깨어지는 ‘질그릇’에 담겨 있다는 구절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롬 3:23)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고난은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
알이 태어나려면 껍질은 깨져야 한다.
{마가복음 2:23-3:6}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신학적 관점]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Priestly document)는 이렛날에 쉬셨다는 안식일(Sabbath) 제정(2:3)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는 곧 창조의 목적이 안식일 제정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바빌론포로 시기에 기록이 되었다. 이는 당시 포로신분으로 노예와 같이 살았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리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느님의 딸과 아들임을 선포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따라 하루를 쉴 권리가 있음을 선포한 자유와 해방으로서의 인권선언문이었다. 두 번째로 안식일은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이다. 이는 모두 역사의 주로써, 애굽의 압제로부터의 얻은 자유와 해방의 하느님을 기억하기 위한 계명들이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예루살렘 성전의 안식일법은 이와 같은 약자 보호라는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정결법과 함께 종교 권력을 대변하며 민중을 억압하는 613(긍정 248, 부정 365)개의 율법 사항 중의 핵심으로 변질이 되고 말았고 이에 예수는 구원으로부터 배제당한 가난한 갈릴리의 민중들의 대변인으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했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개신교와 유대교의 쟁점으로 확대 재해석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유대교에서 또한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율법 준수가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인간 생명보다 몇 개의 구절과 전통을 중시하는 율법주의(legalism)와 ‘자기 절대 의인화’는 개신교 안에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이다.
[목회적 관점]
제1성서에서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이다. 이는 낮 동안은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팔레스타인 유목민들의 삶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농경사회로서의 문화는 하루의 시작을 해를 기준하고 있고, 나아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주일의 첫날로 여기고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서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날만 주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주일이 되어야 한다. 일요일이 다른 날보다 더 뛰어난 날이 아니다. 일요일은 거룩하고 다른 엿새는 세속의 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첫날인 일요일에 하느님을 예배하듯이 다른 엿새동안도 그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선된 날일 뿐이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오늘날 한국교회 또한 ‘성수주일’ 엄수는 ‘십일조 헌금’과 함께 개신교의 핵심 신앙 규범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식일이 갖는 본래의 해방과 자유로서의 인권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2:1-3:6은 당시 종교 권력을 대변하는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헤롯당원들과 대결하는 다섯 개의 논쟁을 담고 있다.
23절 ‘길을 내면서’는 문자적으로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 가면서 밀밭을 통과한다는 의미이지만, 이는 정신사적 변혁의 ‘길’을 의미한다.
삼상 21장의 다윗의 예는 바리새인들이 지적하는 바, 제자들이 안식일법을 어긋나는 일에 대한 대답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이는 다윗이 혼자 사울 왕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을 치면서 일어난 일로서 그 빵은 제단에 올려졌던 빵이지만, 전날 여자와 동침만 하지 않았다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실제 제사장은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이다. 이는 마가의 실수로 볼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 전쟁 당시 아비아달 공동체와 예수 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았기에 반(反)랍비유대교에 대한 유비로 해석할 수도 있다.
28절 ‘인자’(huios tou anthropon, 人子, 사람의 아들)는 다윗의 메시야성과 다니엘서의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인자) 사상을 연계하는 저자 마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사람의 아들 칭호는 예수 개인을 넘어 집단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2절에서의 ‘사람들은’ 지나친 번역이다. 복수 이상의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그들’로 번역하는 것이 ‘사람의 아들(인자)’로서의 ‘사람’과의 혼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5절, ‘노하셔서(orge)’ 예수에게 적용한 유일한 경우이다. 다른 경우(마 3:7; 눅 3:7; 21:23; 요 3:36)는 하느님의 진노하심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만지거나 치유 선언이 전혀 없이 손을 내밀자 절로 손이 펴진다.
6절. 바리새파와 헤롯당원이 동시에 등장함으로 예수 죽음의 원인을 종교적인 요소와 함께 정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안식일(주일)의 본래 뜻은 ‘쉬다’이지만, 하느님이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니다. 이는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라고 하는 지구 동산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보존해야 하는 청지기의 직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날이다.
환경주일 예화 1: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이 ‘리스크 사회’ (위험 사회)를 출간한 것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직후였다. <빈곤은 계급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말은 그가 던진 유명한 시대 화두였다.
예화 2: 현재 지구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은 우루과이 대통령을 역임했던 호세 무히카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대통령 관저를 노숙자에게 내어주고 대신 수도 교외에 있는 부인 소유의 소박한 농장에서 생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젊은 시절 독재정권과의 싸움에 참여해 여러 차례 투옥됐고 여러 차례의 총상을 입었으며 14년간 옥살이를 했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오랜 수감 생활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의 철학은 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리우 정상회담’에서 행한 연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일부이다.
<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 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현재 잘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의 차를 인도인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더 명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양의 부유한 사회가 하는 그런 소비 행태를 세계의 70~80억 사람이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이 지구에 있을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지금 우리 문명은 무한 소비와 경제 발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장 경제가 값싼 자원과 노동력을 찾아 세계 곳곳을 헤집는 세계화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화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화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이런 무자비한 경제시스템 아래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자는 논의를 할 수 있나요? 어디까지가 동료이고 어디까지가 경쟁 관계인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번 모임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큰 위기는 환경의 위기가 아닙니다. 그 위기는 정치적인 위기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인류가 만든 이 거대한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같은 소비사회에 통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소비가 사회의 모토입니다. 왜냐하면 소비가 멈추면 경제가 마비되고 경제가 마비되면 불황이라는 괴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대량소비를 위해 예를 들면 10만 시간을 사용하는 전구를 만들 수 있어도 1000시간만 쓸 수 있는 전구만을 팔아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일하고 더 많이 팔 수 있게 하려고 ‘일회용 사회’라는 악순환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분명히 정치 문제이고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써서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동굴에서 살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 부족한 식견으로 보면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먼 옛날의 현자들, 에피쿠로스, 세네카, 아이마라 민족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빈곤한 사람은 조금만 가진 사람이 아니고 욕망이 끝이 없으며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국가의 대표자로서 리우 회의에 그러한 마음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제 연설 중에는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수자원 위기와 환경 위기가 문제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만든 사회 모델인 것입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저는 환경자원이 풍부한 작은 나라의 대표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300만명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1300만마리의 소가 있습니다. 염소도 800만에서 1000만 마리 정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식량, 유제품, 고기를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주 작은 나라임에도 토지의 90%가 비옥합니다. 제 동지들인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6시간 노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6시간 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하고 있어 결국 이전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의 구매에 들어간 할부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돈을 다 갚고 나면 자신이 저처럼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노인이 되어 있고, 자신의 인생이 이미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 아닌가 라고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개발이 행복을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만 합니다. 개발은 행복, 지구에 대한 사랑, 인간관계, 아이 돌봄, 친구 사귀기 등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환경문제의 가장 핵심 가치가 바로 인류의 행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화 3: 남태평양 한가운데에는 9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인구를 가진 투발루 나라가 있다. 지금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40년 후면 이 나라는 온통 물속으로 잠기게 된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 이웃은 강도 만나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지금 투발루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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