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사순절 4째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5. 3. 26. 04:48

 

교회력 (사순절 4째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성탄절, 부활절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은 기간을 가리킨다. 사순절은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나는 왜 사순절 대신 저항절이라 부르는가.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받은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조용히 살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기도하다가, 성서공부하다가, 예배 참석하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저항했기에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더 생각하고 따르는 시기다.(가톨릭 성서학자 김근수)

[주일 본문]
  민 21:4-9; 시편 107:1-3, 17-22; 엡 2:1-10;
요 3:14-21(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민수기 21:4-9

4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5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6   그러자 주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의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구절과 연관해서 선택된 구절이다. 제1성서를 예수의 구원사역의 예언 말씀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이는 성서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제2성서는 제1성서 없이는 존재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제1성서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 오늘날의 유대교가 이를 증명한다.

본문은 광야 백성들의 계속되는 불평 이야기들(출 16, 민 11, 14, 16, 20장)의 결론에 해당한다. 성서에서 신앙은 믿음보다는 신뢰로 이해된다.

뱀상을 통해 치유가 된다는 이야기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2계명의 위반이지 않는가? 이는 종교사학적으로 아마도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민속신앙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인정되는 뱀상이 몇백 년이 흐른 다음 히스기야왕 시절에는 성전에서 뱀의 상을 없애는 일이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왕하 18:4) 신학적으로 고민이 되는 이야기이다.

[목회적 관점]

YHWH 하느님의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으면서도 광야 백성들은 조금만 힘들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자신들을 죽이려고 데리고 나왔느냐?고 불평불만을 쏟아놓는다. 교회에도 오래된 신도들은 새로운 목회 방향에 대해 처음에는 찬성을 했다가도 조금 힘이 들면 불평불만을 하면서 이전 목회방식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광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 장소이지 편안하게 정주하는 곳이 아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동하는 광야교회이다.

[주석적 관점]

불뱀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serafim으로 어근은 saraf로 ‘불로 태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입에서 불을 품어대는 용(드래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왕하 18:4의 ‘네후스탄’은 뱀을 뜻하는 nahash와 구리를 뜻하는 nehoshet의 합성어이다.

[설교적 관점]

한국 군의관들의 견장에는 미국 군의관의 영향 아래 뱀의 상이 치유 능력을 상징하여 새겨져 있다. 그리스신화의 치유의 신 역시 뱀의 상이다. 본문에서의 뱀은 ‘병주고 약주기’이다. 땅의 뱀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늘에 들려 올린 뱀은 생명을 준다. 십자가 또한 로마제국 통치 아래에서는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늘에 들려올려진 이후에는 치유는 물로 부활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도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거나 차에 걸어두는 것과 부적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십자가에 주술 능력이 있는가? 중세 교회개혁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성전 안에 십자가마저 하나의 형상으로 여겨 이를 거부하는 소수교단이 있다.

요한복음 본문과 연계할 때, 설교자의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시편 107:1-3, 17-22

1   야훼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2   야훼께서 구해 주신 자들 모두 노래하여라.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시고
3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러 모아 주셨다.
17   미련한 탓으로 하느님께 거역하다가 그 죄악 때문에 비참하게 된 자들,
18   입맛이 없어 음식마저 지겨워 저승의 문턱에 다다랐던 자들,
19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야훼께서 사경에서 건져 주셨다.
20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을 고치시고 죽음에서 구출해 내셨다.
21   그 사랑, 야훼께 감사하여라. 인생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 모두 찬양하여라.
22   그 이루신 일들을 노래로 엮어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 예물을 바쳐라.

에베소서 2:1-10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된 삶을 강조하기 위해 그 이전의 상태를 범죄와 죄의 삶으로 그리고 이를 나아가서 율법 안에서의 ‘행위’의 삶과 은혜 안에서의 ‘선한 일’의 삶으로 극단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잘못하면 은혜냐? 행위냐? 하는 양자택일의 막다른 골목의 잘못된 신학 혹은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신앙 행위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곧 본훼퍼목사가 지적하는 값싼 은혜(chief grace)의 신앙으로 떨어질 수 있다. 9절의 부정 의미로 쓰인 ‘행위(ergon, work)’나 10절의 긍정 의미로 쓰인 ‘일’(ergois, works)은 같은 희랍어 단어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한 잘못된 의도에서 시작한 일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일인가가 있을 뿐이다.

[목회적 관점]

구원의 경험을 마치 과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워지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인간은 심리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과거와 100% 완전히 단절된 삶이란 있을 수가 없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선언과 같이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은 없다. 거듭남의 삶이란 완전을 향한 과정(BECOMING)을 말하는 것이지, 완결된 상태(BEING)를 뜻하지 않는다. 사울에서 바울로 완전하게 변했다고 말하는 바울 자신 또한 자기 안에 두 법이 싸우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 조심하라고 말씀하였다.

[주석적 관점]

제2성서 학자들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감성적으로 고조된(staccato) 어법이 아닌 매우 정제된 표현을 쓴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장은 없이 바울이 이미 다른 서신들 특히 골로새서에서 했던 주장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오래된 사본에서 1절에서 ‘에베소에서’라는 단어가 없다는 점에서 바울 제자의 저작으로 보고 있다. 2세기의 마르시온은 이 서신을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언급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기독교신학의 핵심 내용이지만, 바울의 살았던 시대와 오늘은 완연히 다른 상황이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들, 불순종의 자식들 혹은 진노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무척 생경스럽다.

전적 은혜에 의한 구원을 믿지만, 동시에 행실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에 익숙하다.(Pelagianism) 사람에 따라 극적인 변화 경험을 한 사람도 있지만, 변화가 더딘 사람도 있다. 구원 확신이 강한 사람도 있고, 미지근하거나 아예 구원 확신이란 단어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실천 행위보다는 은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은혜 체험보다는 작은 실천 행위 하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를 존중하는 일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하느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하느님의 작품(master piece)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신학적 관점]

16절은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차별이 없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그를 믿으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곧 하느님의 사랑에 제동이 걸린다. 결국은 조건부의 제한적인 사랑이 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당시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로 불리었다. 예수는 당시의 민중을 하느님의 아들딸로 불렀다.

[목회적 관점]

기도할 때 대부분 하느님 아버지!라 호칭을 한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는가? 이는(아바! 아람어) 멀리 계신 분을 가깝게 부르는 호칭이다.(아빠!) 남성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폭행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 말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하는 ‘어버이’라는 좋은 호칭이 있다.

[주석적 관점]

높이 들렸다(huposen)는 이후 세 번 더 나온다.(8:28; 12:32, 34) 요한신학의 중요한 단어이다. 십자가는 로마제국 폭력에 대한 자유와 해방을 향한 저항의 상징이고 들렸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올라선 부활의 상징이다. 이를 모세의 구리뱀에 비유하는 것은 성서주석적으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는 영원성을 갖지만, 구리뱀은 단순히 육신 치료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은 선과 악으로 대립된 세상이었다. 1. 긍정의 의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3:16), 세상의 구세주 예수(4:42), 세상에 오신 예언자요 하느님의 아들(6:14, 11:27),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주심(6:33), 세상의 빛(9:5) 2. 중립의 의미: 예수가 활동하는 공간(1:10; 9:5; 14:19) 3. 부정의 의미: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1:10) 예수와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8:23; 12:25; 14:17) 심판받을 세상(9:39; 12:31; 16:11) 따라서 세상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설교적 관점]

독생자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구해내신다는 것인가? 1세기의 로마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었다. 로마는 평화를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소수의 로마시민들만을 위한 평화일뿐,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전히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저들은 참 평화를 갈구했다. 요한의 중요한 신학 주제인 영원한 생명이란 심리종교적 용어가 아닌 전쟁없는 평화시대를 상징하는 사회정치적 용어이다.  

대북, 대중국을 향한 한미일전쟁연습이 진행 중에 있다. 한발만 잘못 디디면 온 나라는 불바가 된다. 오늘 한강토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를 찾는 일이지, 몇몇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