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현장

10.29 우리의 책임과 슬픔

ree610 2024. 2. 8. 07:07

윤석열 대통령이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거부한 사건 앞에서: 우리의 책임과 슬픔

ㅡ  한어울신학연구소 장경노

[ 저는‘윤석열’과 ‘대통령’이라는 두 말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그를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동료 시민으로 존중하기 위해서 가끔 두 말을 이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


들어가면서. 우리는 죽은 사람 앞에 멈춰야 합니다

살면서, 길을 가고 산책을 하고 밭에서 일하다가 동물의 사체를 만나면 자주 묻어주었습니다. 죽은 참새와 비둘기, 고양이와 고라니를 그 주변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다가 묻었습니다. 저는 아직 육식하면서 이율배반적으로 살고 있지만, 죽어서 아무렇게나 버려진 동물 사체를 보고서는 자주 지나칠 수 없습니다.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은 죽은 이에겐 예의가 아니고 저 자신을 비인간화하며 생명의 주인을 경외하지 않는 순간이 되리라는 흐릿한 어떤 느낌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이 꽃처럼 별처럼 우주처럼 소중하듯이,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모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만큼 충분히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 따뜻하지 않고 숨 쉬지 않은 주검 앞에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생은 유한하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희망 안에서 한 의미로 연결되어 있으니, 다시 인간이 되고 인간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의무와 자유를 깨닫습니다.

1. 국가의 폭력과 무능의 책임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 모두에 있습니다

힘이 미치는 한, 우리는 이 땅에서 더 많은 죽음을 기억하되, 특별히 공적 관계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곧 국가의 폭력과 무책임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국가 공동체의 한 일원과 주체로 인정한다면 이런 죽음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적극적으로 아니면 무관심으로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국가를 형성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의 구분만으로는 끝낼 수 없습니다. 자유와 책임의 존재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의 비도덕적 행위의 책임을 그 국가 구성원인 우리 모두에게 돌려야 합니다.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고 무기를 공급하면서 먹고사는 미국의 폭력에 대한 책임은 미국 정부만이 아니라 그 나라 모든 시민에게 있습니다. 하마스를 실제로 괴멸시키기 위해서 가자 지구의 사람들과 그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폭력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 정부만이 아니라 그 국가 모든 시민이 져야 합니다. 비도덕적인 국가에는 도덕적인 시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력의 책임을 그 국가 시민들이 져야 하듯이, 2022년 10월 29일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의 책임은 대한민국 정부만이 아니라 그 모든 시민에게 있습니다.

2. 유가족만이 아니라 시민인 우리도 잃어버렸습니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자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희생자들만 죽은 것이 아니고, 이들을 잃어버린 유가족들도 죽었습니다. 겉으로는 살아있어도 속에서는 죽었습니다. 이들에게도 공간이 참사 이전처럼 그대로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시간이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를 잃고 추방당한 공간과 시간이어서, 여기서는 한 사람도 제대로 설 수 없고 숨 쉴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면 옮겨가야 할 내일이 없어서 어제의 힘에 사로잡혀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그 후 과정에서 모두 159명이 죽었고, 이들과 함께 유가족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유가족들만 죽은 것이 아니고, 한국이라는 국가 공동체 시민인 우리도 모두 부분적으로 죽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유가족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 시민이었습니다.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시민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과 고통에 전혀 비교할 수 없지만, 시민을 잃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 역시 아주 작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태원 참사는 우리에게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첫째, 무책임하고 무감각한 국가를 구성하고 형성해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참사에 대해서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둘째, 그 죽은 사람들이 우리 동료 시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슬퍼하며 울어야 합니다. 유가족만을 슬픔의 주체로 세워놓고 그들을 위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유가족과 함께 우리도 슬픔의 주체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야 합니다. 이 죽음의 사건 앞에서 슬퍼할 수 없고 마치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지나칠 수는 사람은, 생명의 책임과 연대를 깨닫지 못하여 우리 사회를 더 차갑게 만들 것이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 됨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했고, 우리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가 슬퍼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져야 합니다. 하나는,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현 정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한 후에 공동체의 구조와 삶을 새롭고 인간답게 재정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 참사에 책임이 있는 국가 공무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합니다. 무능과 실수와 부주의로 잘못한 것을 알고서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감옥에 가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더라도 자기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기에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회피하는 사람은 감옥에는 갇히지 않겠지만,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비인간화하고 비이성적 동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 사회를 형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책임을 지는 삶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면서도 그의 인격을 보호해줄 필요도 있습니다. ‘책임 지움’이 곧 ‘인격의 부정’이 되는 사회에서 책임 지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박원순 전 서울 시장과 노회찬 전 의원, 이 두 사람이 책임을 졌는데 너무 크게 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저는 그때 이 두 사람에게 무엇이 더 인간다운 길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타인과 대의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의 존속도 함께 고려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는 사회를 원합니다. 나는 나에게만 속해있지 않고 이웃들의 너이기에, 나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도 나만 아니라 이웃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한쪽에는 책임을 너무 과하게 지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윤석열 정부가 있습니다. 책임을 질 수 없으니 슬퍼할 수도 없습니다. 슬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며, 이 능력은 관계를 인식함으로써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구조 실패와 사고 원인이 국가에 있는 명백한 인재였던 이태원 참사 앞에서 시민들과 윤석열 정부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늘 그랬듯이 수많은 시민은 슬퍼했고 유가족과 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희생자를 슬퍼하지도 유가족을 위로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부의 모든 관계자는 대통령 윤석열을 따라서 하나같이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를 반복했습니다. 저의 눈에 이들은 모두 심장 없는 기계, 로버트였습니다. 사람이라면 아플 것이고, 아프다면 법적 요구가 없어도 나서서 ‘내 책임이다’라고, 인간적 감각이 극도로 퇴화한 윤 대통령과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꼭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모두 다 대통령 뒤와 법 속에 머리를 처박고서 양심을 따라서 인간으로 나선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성까지 포기한 것이고, 아니면 이미 인간성이 바닥이어서 책임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국가 권력을 자기 성취로만 생각하면서 누리는 사람이지, 그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부는 ‘참사’가 아니라 ‘사고’라고 일컫도록 지시를 내렸고, 유가족 모임을 결성해주는 것이 아니라 방해했습니다. 이름과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설치했고, 윤석열은 한 주간 매일 이곳에 와서 영혼 없는 조문 쇼를 벌였습니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떠올리는 참사를 조직적으로 망각하기 위한 처사였습니다. 윤석열은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참사 1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고, 그 대신 일방적으로 한 교회에 찾아가서 자체 추모 행사를 열었습니다. 졸부였고, 차갑고 비겁한 행위였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받아 삼켜야만 할 비판과 비난은 피하고, 추모 형식을 갖춰서 또 다른 공격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습니다. 유가족을 생각해야 할 시점에 자기방어을 한 것입니다. 윤석열은 지금까지 유족을 만나지 않았고, 드디어 며칠 전에는 참사 특별법을 거부했습니다.

윤석열은 자기 내면세계에서도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만약 그가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진정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면, 그는 그가 대표하는 국민 중에서 지금 가장 아프고 가장 고통스러운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반드시 만났을 것입니다. 한번만이 수십 번을 그랬어야만 했습니다. 윤석열이 할 수 있는 일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책임 회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손대는 국가 전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권력의 사유화이고 대통령 취임 시 국민과 했던 약속의 배반입니다. 무능은 대체로 기술의 문제이지만, 책임지지 않은 것은 인간성의 문제로 악한 것입니다. 이 정권이 무능한 것은 지혜가 없어서이고, 지혜가 없는 것은 선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하고 또한, 슬퍼해야 합니다. 슬픔은 감정만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고, 따라서 일시적이니라 장기적인 삶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슬퍼하기 위해서, 삶이 땅바닥에 쏟아져 내린 유가족과 함께하고, 죽은 사람들을 기억할 공간과 시간을 우리 안에 만들고, 이들의 희망과 꿈을 우리 사회 형성에 반영해야 가야 합니다.

4.1. 유가족과 함께하기
죽은 사람을 슬퍼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남겨둔 사람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같이 살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서 떠나면, 남은 사람들의 삶의 공간과 생명력이 여러모로 위축되고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슬퍼한다는 것은, 죽은 자들이 남겨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아주 좁아지지 않도록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여 우리 삶으로 초대하여 그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삶의 미래 계획에 이들의 뜻을 반영한다면, 유가족들은 우리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죽은 사람들을 부분적이라도 보고 듣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유가족들의 삶의 공간이 어느 정도 보호되어서 과도하게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남아 있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가족의 상실을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것같이 만들 수는 없어도, 조금이나마 이들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태원 희생자들을 마치 우리 가족처럼 받아들인다면, 만약 이것이 진실한 것이 되어서 유가족들이 죽은 자기 아들과 딸을 이 국가 공동체의 자녀로도 인정할 수 있다면, 이렇게 더 큰 우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상실을 무로 돌리지는 못하더라도 아픔을 견디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4.2. 죽은 자들을 잊지 않고 우리 삶의 형성에 초대하기
죽은 사람을 슬퍼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들이 죽기 전까지 이 땅의 사람과 내일을 위해서 살고 행했던 그 역사를 보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공간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손톱만큼의 공간이라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서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그들에게 공간을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 기억과 삶을 통해서 이 땅의 운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공간에 여러 장치와 상징들을 만들고 보존해야 합니다.
이 땅은 오늘을 사는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은 우리 앞서 살다가 죽었던 자들의 것이고, 우리 뒤에 와서 살 사람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땅 위에서 어제 살았고, 오늘 살고, 내일 살아갈 사람들 모두는, 한 희망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공동 운명에,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4.3. 지금 살아있는 이웃을 지키고 삶의 공간을 허락하기
죽은 사람을 슬퍼한다는 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지켜주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죽은 사람과 그 뜻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들의 희망이었던 이 땅에서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할 것입니다. 죽은 부모의 유지를 존중하는 자녀들이 서로 우애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삶의 터전과 공간을 허용하고 지켜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땅과 삶의 영역을 모두 자본의 원리에 맡겨서 사유화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더 많은 곳을 공공재로 만들어서 같이 있고 같이 사용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진심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삶의 공통토대를 더욱 소중하게 지킬 것입니다. 더 정의롭게, 더 평화롭게, 그리고 인간종(種)의 복지를 넘어서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5. 죽은 사람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이들과 함께 미래로 가기

하지만 죽은 사람을 슬퍼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서 죽은 사람 곁에 항상 머무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향하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미래로 가야 합니다.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과거로 가야 하지만, 과거에 도착하면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과거와 함께 미래로 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과거로 가서 과거에만 머물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죽은 사람을 과거에 가두고 우리의 소유로 삼아서 그들에게서 그들의 본질인 희망을 빼앗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슬퍼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죽은 자들의 희망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과거에 매여있기를 원하지 않고, 우리가 과거로 와서 그들을 데리고 희망의 땅 미래로 함께 가길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들을 진실로 만나야만 할 곳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신 하나님 품입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집회하고, 순례하고, 삼보일배하고, 오체투지 하도록, 차가운 거리에 두어야 할까요? 언제까지 그 뚫린 가슴을 따뜻한 포용과 위로가 아니라 절망과 분노로 채워서 투사 아닌 투사로 만들어가야 할까요? 이 잔인과 야만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또 있을까요!

교회. 모든 죽은 사람과 모든 산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를 기억하는 교회.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기에 이 땅의 모든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자기 품으로 받아들여서 죽음을 생명으로 살려내야 할 교회. 한국 교회, 특히 한국의 개신 교회는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과 이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 어떻게 책임을 지고 어떻게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태원 참사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