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남 박사 영전에
조종남 박사님은 위대한 신학자이셨습니다.
서울신학교를 마치고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셔서 에모리 대학교에서 웨슬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Ph.D).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받은 웨슬리 신학 분야의 박사학위였습니다. 미국 올리벳 나사렛대학에서 교수로 일하시다가, 귀국 후 자연스레 한국 신학계에서 웨슬리 신학의 권위자로 그리고 교계의 지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조 박사님의 활동과 업적은 자연스레 여러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게 되었으니, 미국 아주사퍼시픽 대학교에서 인문학 박사(H.L.D), 미국 에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D.D), 그리고 모교인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조 박사님의 업적이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것을 보여줍니다,
조 박사님을 말할 때 서울신학대학교를 첫 번째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장으로 일한 기간은 조 박사님의 일생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입학하던 1968년 학장 취임식 때, 모교를 향한 열정과 미래의 비전을 밝히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충정로 3가 35번지 아현교회 지하 강의실 4칸에서 전교생이 공부하던 서울신학대학교를 부천으로 옮겨서 오늘의 서울신대의 토대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당시 캠퍼스 건축을 위하여 여러번 미국을 방문하시면서 모금활동을 하실 때 격은 고생과 감동적인 일들을 말씀하실 때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조 박사님은 서울신대의 외형(이주와 건축)뿐만 아니라, 내용 즉 신학적 전통과 미래를 분명히 설계하셨습니다. 1968년에 “서울신학대학의 교육이념과 신조”를 제정 공포하여 서울신대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셨습니다. 이는 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과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당시 모호한 것처럼 보이던 웨슬리 신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고히 정립한 것이었습니다.
웨슬리 신학이라는 역사적 깃발을 들고 있던 성결교회에 웨슬리 신학의 전체와 진수를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교단이 세계 웨슬리안 교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셨습니다.
조 박사님은 한국 신학계에서 최고의 웨슬리 학자로서 웨슬리 신학을 대표하는 분이셨습니다. 장로교회 계통이 개신교의 2/3를 차지한 까닭에 칼빈주의 신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조 박사님이 웨슬리 신학을 주창하신 덕분에 오늘날 웨슬리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과 함께 한국 개신교 신학의 양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 박사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웨슬리 신학자이십니다. 일례로 미국에서 출판된 ⌜Contemporary Wesleyan Theology」란 책에는 전세계에서 저명한 웨슬리안 학자 40여명이 신학의 여러 주제를 웨슬레안의 입장에서 집필하였는데, 조 박사님은 7명의 자문위원 중에 한 사람으로 일하셨습니다. 이는 학문적 권위와 학자로서의 위치가 집필자들 보다 우위에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외국 신학자들도 Dr. John Cho라면 다들 인정하는 웨슬리 신학의 권위자이셨습니다.
조 박사님은 신학과 실천이 함께하는 산-신학자(living theologian)이셨습니다. 이는 웨슬리 신학의 한 특징인데, 조 박사님이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강의실의 신학이 목회현장에 유용해야 함을 강조하셨고, 전도 현장의 신학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88올림픽 때는 전도위원장을 맡으시고 잠실에서 직접 전도를 하셨습니다. 웨슬리처럼 교회와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사역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조 종남 목사님은 역사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계승과 발전이 있는가 하면 단절과 퇴보도 있습니다. 이는 살아있는 후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가 조 박사님을 통해 주어진 웨슬리안 유산을 발전적으로 이어가기를 소망합니다.
- 한영태 (전 서울신대 총장)
“웨슬리안 신학의 거목”
"국제 로잔 운동의 산 증인"
"신학 교육의 기틀을 세운 한국 목회자들의 큰 스승"
지난 8월 20일 하나님 곁으로 간 고 조종남 박사(장충단교회 명예)를 부르는 말이다.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저명한 웨슬리 학자로 널리 알려진 조종남 박사는 국내 최초로 웨슬리 신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1966년 에모리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미국 아주사 퍼시픽대학교에서 인문학 박사학위, 애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웨슬리 신학의 전통을 한국에 정립하고 주창함으로써 우리 교단이 칼뱅주의 장로교와 함께 웨슬리 신학의 주류로 설 수 있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웨슬리 교단에서는 조종남 박사가 칼뱅주의와 절대주권 예정론 신학이 판치는 한국 교회에 웨슬리 신학이 신학의 양대산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신학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종남 박사의 대표 저서인 요한 웨슬레의 신학』은 웨슬리 신학의 교과서로 불린다. 그 외에도 복음과 문화』,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뿌리』, 요한웨슬레 설교선집』, 웨슬리의 갱신 운동과 한국교회』, 존 웨슬리 설교전집』, 우리가 가야 할 길』 등 20여 권이 넘는 저서와 역서를 남겼고, 논문, 강연, 수상 등을 통해 한국 웨슬리 신학을 정립하는데 공헌했다.
특히 아흔이 넘은 최근까지도 저술 활동을 하고 웨슬리신학연구소의 설교강독모임과 워크숍에 참석해 강의하는 등 학문 탐구의 열정을 잘 보여주었다.
일평생 교육자의 자리를 떠난 적 없었던 조 박사는 1958년 서울신학교 전임강사로 시작해 교수가 되고 1968년 학장으로 취임했다. 충정로의 아현교회 지하 강의실에서 부천으로 서울신대를 이전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서울신대 제3, 4, 5, 6대와 9대 학장을 지내며 ‘장기 독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서울신대의 신학적 전통과 미래 설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전국신학대학 협의회장, 명지대 교수, 교목실장, 2부 대학 학장, 인문사회대학장을 지낸 후 명지대 석좌교수와 서울신대 명예총장으로 끝까지 교단을 지킨 진정한 스승이었다.
이러한 그가 한국 복음주의의 별로 불린 것은, 50년 전 스위스에서 1차 로잔 대회가 열릴 때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 때부터다. 조종남 박사는 “온 세계에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라며 로잔 정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971~1983년 OMS 국제선교회 이사, 1977~82년 세계 복음화 국제협의회 회장, 1987~2002년 세계 복음화 아시아 로잔위원회 회장, 1992~94년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회장을 맡았다.
조 박사의 추천으로 국제 로잔 동아시아 총무로 선임된 최형근 교수(서울신대)는 “조종남 박사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으로 견고함을 늘 지탱하셨던 로잔 운동의 산증인이었다”며 “한국로잔위원회를 세우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국제 로잔뿐 아니라 아시아 로잔, 한국 로잔 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던 조종남 박사가 로잔 운동에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잘 아는 최 교수는 “내년 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해 중요한 기회라며 기대하셨으나 이를 보지 못하고 떠나셨다”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교계에서도 대한성서공회 회장, 사회복지재단 길보른재단 이사와 대표이사 등을 맡아 사회적인 어른의 역할을 다했다. 조 박사는 웨슬리 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걸어온 길은 신학자로서, 교육자로서의 위대한 발자취였다.
수많은 조문객들은 “한국 교회의 큰 스승을 잃었다”며 “그분이 남긴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유산을 잘 이어받아 교단과 한국 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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