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름을 바꾸다 바꾸다 결국 포장지를 바꾸기로 한 정당

ree610 2021. 6. 13. 17:40

- 산업화 시대의 파시스트와 신자유주의 네오 파시스트와의 결합
- 본질은“자본의 지배”를 확대유지하는 정치의 재생산

[글의 순서]
1. “세대교체론”이라는 허상과 “혁명의 뼈가 허물어진 청년세대”
2. “몰락하는 원로들”과 “부패해가는 언론”
3. "끝까지 진짜 청년인 사람들"은?
4. 전열의 재정비, 그 핵심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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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대교체론”이라는 허상과 “혁명의 뼈가 허물어진 청년세대”

36세의 야당 대표 등장에 언론이 환호한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를 앞세워 세대의 벽을 부수는 정치의 돌파력을 기대한다는 논조다. 그러나 이는 모두 허상일 뿐이다. 이름을 바꾸다 바꾸다 이제는 포장지 자체를 바꾸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며 “자본의 지배”를 확대유지하는 정치의 재생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표 당선 후 내놓은 연설의 내용 일부다. “2021년과 2022년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수에 의한 독재, 견제받지 않는 위선이라는 야만으로 변질시킨 사람들을 심판한 해로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저항은 최루탄의 연기만큼이나 매운 갈라치기와 독주로 국민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던 문재인 정부의 지난 4년을 딛고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순수함과 강력함을 확인시켜줄 것입니다.”앞으로 더 두고 봐야 알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각고의 투쟁으로 이루어놓은 민주주의에 대한 젊다는 당 대표가 가진 현실 인식의 정체다. 검찰권력과 대자본, 그리고 특권 정치세력의 카르텔이 누려온 적폐로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이토록 거리가 멀다.

이들 세력이 복원하겠다는 것은 이명박, 박근혜를 전술차원에서 밟고 가고 이명박-박근혜 2.0을 만들겠다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출신이 그렇고 살아온 이력이 또한 그렇다. 최고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비애(悲哀)가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이런 당대표와 그런 지도부의 등장이 우려스럽다.

지난 100년의 세월에서 청년은 언제나 “혁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최초로 “혁명의 뼈가 허물어진 청년세대”의 등장을 보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길러온 시대의 산물이다. 기성세대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해보려는 전략을 짜고 있으니 모두가 그렇진 않겠으나 언론이 환영하는 청년세대의 정신적 부패는 가속화되어갈 것이다.

생존경쟁의 막중함, 치열함,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시대에 걸쳐 기성의 진입장벽을 뚫고 나가야할 청년세대의 고통이었고 이걸 구조의 문제로 뒤집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또한 청년세대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보다는 욕망의 정치가 우선인 세대를 보고 있다. 욕망은 강력하다. 그러나 윤리적 설계와 거리가 멀다. 부패와 타락으로 가는 길목이다.

말은 공정이나 그것은 구조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해서 젊은 당 대표는 “공정과 경쟁”을 하나로 묶고 있다. 정치의 공공성, 공적 체제의 창출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런 체제 안에서는“경쟁으로 살아남는 자가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공정”이다. 적자생존의 다른 표현이며 공정으로 포장된 야만일 뿐이다. 누락된 자들은 더욱 누락될 것이며 이름없는 청년세대가 일회용으로 소비되어 실종되거나 사라져도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혁명의 뼈가 허물어진 청년세대에 대한 책임은 기성세대의 책임 못지않게 당사자들에게도 있다. 맹렬한 질타를 받아야 한다. 역사에 무지하고 사상에 무지하며 문명에 무지하고 책을 손에 잡지 않는다. 사다리 밑바닥에서 헤매는 이들과의 연대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삶에서 나올 것은 노골적인 욕망의 표출과 이기심을 포장하는 기술밖에 없다.

‘국민의 힘’의 젊은 당 대표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서운 아해(enfant terrible)”이다. 파시스트의 유겐트가 신자유주의의 옷을 갈아 입은 것이다.

2. “몰락하는 원로들”과 “부패해가는 언론”

시민의 역사적 진군에 대해 무지한 지식인들은 나이 들어 퇴행의 운명을 맞이한다. 최장집이 그렇고 최근에는 문.지의 김병익 역시 이에 해당한다. 인간이 겪는 고통에 연민의 마음을 잃은 지식인의 종착역이다. 창비와 문지 사이에 가로놓인 강은 정치였고, 그것은 인간과 역사의 문제를 어떻게 다가 가는가로 판별되어왔다.

김병익은 소중한 원로다. 그러나 의식의 진화가 멈춘 지식인은 그만 퇴물이 된다. 가슴 아픈 일이다. 원로들의 몰락은 우리 사회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상실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청년세대에 아부하는 정치가 거리낌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청년세대는 우리 각자의 나이에 따라 우리의 아우, 자식, 손주뻘 세대다. 이들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은 선대(先代)는 어디에도 없다. 청년세대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슨 어른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그 “잘 되기”가 과연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지내온 이로서 청년들의 총명함 못지않게 몰역사적 사유가 체질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탄식하게 된다. 공동체적 인식은 실종되어 있고 이웃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은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의 교육은 실패하고 있다. 무참할 지경이다. 이명박-박근혜를 거치면서 철저하게 짓밟은 역사교육의 황폐함, 인문정신의 부재,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가져온 결과가 이렇다.

어디 이뿐인가? 기후비상의 멸종 위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처를 하고 있지 못한 교육이 어떻게 미래세대를 지키는 교육이겠는가? 기후위기는 산업자본주의의 지구파괴와 인간유린의 결과다. 이걸 치고 들어가는 것이 청년세대다움이다. 그렇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맹성할 일이다.

이런 생태위기와 자본의 지배가 만들고 있는 현실에 대해 혁명적 도전을 하는 청년세대 없이 미래는 없다. 그런데 언론은 이런 현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을 한없이 어린아이로 만들고 있다.

응석을 부리는 아이는 자라면 성숙해져야 하고 역사적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며 당돌해야 하고 자기 철학의 테제를 가지고 미래 설계의 제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청년은 언제나 허균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궤도에 뒤쳐질세라 올라탄 이들만 보고 있다. 저 자기파산적인 설국열차를 멈추려들 생각이 없다. 이런 규정과 질타가 억울하다면 외치라. 아니라고.

언론은 날로 부패하고 있으며 자본의 병정(兵丁)일 뿐이다. 이들은 언론이 아니라 정치공작대 요원이 되고 있으며 철학과 역사의 깊이를 가지고 현실을 비평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저널리스트의 위상을 철저하게 잃어가고 있다.

이런 언론을 압도하고 일깨우는 시민교육의 대대적인 정비가 시급하다. 아니면 공당(公黨)조차도 이들의 여론조작 언술과 위협에 짓눌려 우왕좌왕하고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자기주관이 없는 정당은 일개 시답지 않은 정파에 불과하다.

민주시민 교육은 이 시대 절체절명의 과제다. 전 교육감 곽노현이 지금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응원과 박수가 우렁차게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진보교육감 모두가 힘을 들이고 있는 작업이다. 언론은 이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다. 평생 민주교육에 힘을 써온 조희연 교육감 역시도 이에 뜨겁게 진력하고 있다. 그에 대한 어이없는 공수처 수사는 원천 무효가 되어야 한다.

3. "끝까지 진짜 청년인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끝까지 청년이었던 분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함석헌, 리영희, 송건호는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단재 신채호, 박은식, 홍명희,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산 정약용, 정약전, 성호 이익, 반계 유형원, 연암 박지원 등이 있다. 이들의 기세를 받아 박규수, 김옥균, 서재필 등이 이어져 내려왔고 상해와 블라디보스톡, 만주와 토교, 워싱턴과 파리에서 활약하던 그 무수한 선조들은 또 어떠한가?

100세에 이르기까지 혁명가였던 스캇트 니어링은 어떠하며, 당시로서는 노년인 6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역사와 철학을 위한 집필을 멈추지 않은 칼 맑스는 또 어떠한가? 끝까지 민권운동의 선봉에 섰던 알라바마의 로자 파크스는?

이게 너무 고전적이라면 의 고(故) 김종철 선생은 어떠하며 70 중반을 넘어서서도 출판의 철학을 청년의 기세로 가진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는 또 어떤가? 팔십이 가까운데도 여전히 독립지사들의 평전을 쓰는 김삼웅은 어떠하며 그와 비슷한 또래로 민족혁명의 기세를 지닌 광복회장 김원웅은 또 어떤가? 이들은 전혀 늙지 않았다.

기성세대는 왜 우리에게 이런 것 저런 것 안 해주냐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혁명을 이끌고 세상을 뒤집는 기세로 시대를 혼쭐내야 하는 게 청년이 아닌가? 역사의 중심을 직시하고 그걸 새로운 기력으로 삼아 다부지게 나서는 것이 청년 아닌가?

저 유럽의 68 청년들, 민권과 반전 운동을 이끌었던 미국의 청년들, 지금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미국의 세계전략에 도전하는 청년들이 청년들이다. 언론은 이들이 구속되든 뭐가 되든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나이 들어도 끝까지 청년인 이들은 이해타산을 기준으로 기성의 원리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걸 넘어서는 대안의 미래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간다. 욕망의 정치를 뛰어넘어 가치의 정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 지구 생명 공동체의 미래를 향해 세계시민적 양심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게 청년이다.

4. 전열의 재정비, 그 핵심은 “혁명!”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는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꾼 허균을 가진 나라다. 토지개혁의 혁명적 변화를 외쳤던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을 가진 나라다. 풍찬노숙의 세월을 마다하지 않은 단재 신채호와 박은식, 그리고 아리랑의 혁명가 김산의 나라다. 약산 김원봉의 조선이다. 파리강화회의와 3.1 민족혁명을 하나로 묶은 김규식의 나라이며 문명의 미래를 갈망한 김구의 나라다.

이 모든 것은 다 혁명으로 일궈진 역사다. 이 기운으로 세상을 바꾸는 열정과 희망을 갖지 않은 이들은 누구도 청년이 아니다. 욕망의 소인(小人)이거나 세월의 퇴물이거나 이미 소심하게 늙어버린 자이거나 청년의 껍데기를 쓴 졸장부에 불과하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청춘에서 아름다움이 나온다. 의로움이 태어난다. 매혹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정겨운 마음의 깊이가 샘솟는다.

자기 인생에서 혁명가를 단 한번도 꿈꾸지 않은 청년은 청년이 아니다. 그걸 위해 계산하지 않고 움직여본 적이 없다면 아직도 청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조만간 세계관의 대전쟁으로 몰입해 들어갈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구려는 사람들과 약한 이웃을 짓밟고 신분 상승을 갈망하는 자들 사이의 전선. 미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자본의 지배를 확대유지하려는 신자유주의의 네오 파시즘 공세를 막아야 한다. 혁명은 이 시대의 임무이다. 혁명의 문을 여는 개혁, 특히 검찰개혁은 특권카르텔의 붕괴로 이어진다. 우리가 할 일은 너무도 밝히 드러나지 않는가?

*사족 하나, 그렇다면 민주당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답은 파시즘과 싸우는 청년정당이다.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청년정당이다. 검찰개혁과 시장개혁에 힘을 모으는 청년정당이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서는 청년정당이다. 시민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청년정당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집중적인 돌파력을 가진 청년 정당, 그러면 된다. 더는 머뭇거리지 말라.

ㅡ 김 민웅 교수 (경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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