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편지

창백한 손

ree610 2021. 4. 2. 18:58

계수님께

 

읽을 책이 몇 권 밀리기도 하고 마침 가을이다 싶어 정신 없이 책에 매달리다가,

이러는 것이 잘 보내는 가을이 못됨을 깨닫습니다.

 

몸 가까이 있는 잡다한 현실을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올바로 이론화해내는 역량은

역시 책 속에서는 적은 분량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派黨性)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이 중양절, 그러고 보니 강남 갈 의논으로 전깃줄에 모여 그리도 말이 많던 제비들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구름에 앉아 지친 날갯죽지를 쉴 수 있다면 너른 바다도 어렵잖았을 텐데,

무리에 끼어 앉았던 어린 제비 한 마리 생각납니다.

 

불사춘광 승사춘광(不似春光 勝似春光).

봄빛 아니로되 봄을 웃도는 아름다움이 곧 가을의 정취라 합니다.

그러나 등 뒤에 겨울을 데리고 있다 하여 가을을 반기지 못하는 이곳의 가난함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한번 오겠다시던 아버님 소식 없어 혹시나 어머님 편찮으신가 이런저런 걱정입니다.

걱정은 흔히 그 부질없음에도 아랑곳없이 더욱 걱정됩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의 병해(病害)에 항상 유의하여 꼬마들 함께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1981. 10. 6. 申榮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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