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님께
우용이, 주용이 그리고 형수님의 건강을 빕니다.
항상 엽서의 문미(文尾)에 가벼운 인사말로 적던 이 말을 오늘은 엽서의 모두(冒頭)에 경건한 기원처럼 적어보았습니다. 우체국에서 선 채로 써보내신 형수님의 편지는 제게 여러 가지 생각을 안겨주었습니다. 평소 단정하고 무척 강단져뵈던 형수님께서 내면에 그토록 심한 고통을 안고 계신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쇄소(灑掃), 응대(應對), 진퇴(進退)에 있어 좀체로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형수님께서 "읽고 곧 찢어버리기 바라는" 헝클어진 편지를 띄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심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물론 형수님의 건강 상태나 심경을 자상히 헤아릴 수 있는 처지가 못됩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형수님의 예의 그 '단정'(端正)함이 도리어 형수님의 심경을 팽팽히 캥겨놓음으로써 피로와 부담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우려됩니다.
응접실을 비롯하여 거실, 주방에 이르기까지 놓여 있는 물건 하나하나의 위치, 크기, 수량 등이 조금도 무리 없을 정도의 정연한 질서와 정돈, 우용이 주용이의 반듯하고 정확한 언행, 형수님의 대화, 입성, 응접, 식탁 등 생활 전반에서 느껴지는 단아함은 그 자체로서 높은 균형과 정제(整齊)의 미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것을 지탱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팽팽한 정신적 긴장이 결국 형수님의 심신에 과중한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결벽증과 정돈벽이 남보다 덜하지 않았던 제가, 결코 자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징역살이라는 '장기 망태기' 속에서 부대끼는 사이에 어느덧 그것을 버리고 난 지금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정신적 여유와 편안함마저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며'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辯)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 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보내주신 형수님의 헝클어진 편지가 마음 흐뭇합니다. 그 속에는 형수님의 적나라한 언어, 아픔, 불만이 시냇물 속의 물고기들처럼 번쩍번쩍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아픔과 불만까지도 제게 열어보여준 그 편지는 형수 ― 시동생이라는 허물없는 관계를 튼튼히 신뢰함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수님께는 아픈 편지이되 제게는 기쁜 편지였습니다. 다만 형수님께서 감당해야 할 고통이 과중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저의 흐뭇함을 상쇄시켜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우리들로 하여금 형식을 깨뜨리고 본질에 도달하게 하며 환상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형수님께서 지금 힘겨워하시는 그 신고(身苦)와 심려도 머지않아 형수님의 냉철한 이지(理智)에 의하여 훌륭히 정돈되고 다스려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올 가을은 형수님께 있어 큼직한 수확의 계절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1984. 10. 5. 申榮福
'모리아 >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수님께 (0) | 2021.04.02 |
---|---|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0) | 2021.03.28 |
바다에서 파도를 만난듯 (0) | 2021.03.28 |
보따리에 고인 세월 (0) | 2021.03.28 |
독방에 앉아서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0) | 202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