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3월 4일 ~ 9일 가정 예배

ree610 2024. 3. 3. 14:48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본문 : 시 23:1~4
찬송 : 414장
 
   한 여인이 잡화점에 들어가 아주 강력한 행운의 부적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상점 주인은 여러가지 부적을 보여주었다. "이 부적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효과가 좋습니까? 아들이 남태평양에서 일을 하게 되어 곧 배를 타고 바다로 갑니다. 아들을 지켜줄 강력한 부적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손님이 여인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제발 부탁이니 그것을 제게 소개해 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부인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 아들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세와 능력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며, 요새이며 피할 바위가 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능력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한다.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 시편의 기자도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한다고 고백한다. 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 고백할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는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를 내려놓고 세상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상전에게, 주모에게는 종이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없는 것이 없으신 풍성하신 하나님이다. 그것을 늘 경험했던 바울 사도는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길 배웠다 고백하며 빌립보 교회 성도를 향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채우시리라 축복한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까지 주셨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아시기에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주시며 구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솔로몬의 인생고백은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실 것이며 풍성하신 대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헛된 가치를 바라보고 사는 허무한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고 눈을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본문 : 행 18:1~4
찬송 : 436장
 
성경에서 만나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 부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아담과 하와, 이삭과 리브가, 룻과 보아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대표적인 부부이다. 그들은 서로 만나 부부가 된 이후에 그들의 생애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단연 돋보이는 부부이다. 이 부부는 처음에 로마에 살고 있었다. 사도행전 18장 1~4절을 보면, 그들은 로마에서 꽤 잘 나가는 부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굴라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이었지만 브리스길라는 그 이름으로 볼 때,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브리스가 가문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이 부부가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명령에 의해 로마에서 강제 출국 당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고린도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고린도에서 그들은 뜻밖에도 선교 여행 중이던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사도 바울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 곡선을 그리며 고린도까지 왔다. 그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비방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쉼없이 고린도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신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던 사도,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자기 집으로 맞이했고, 생업이 같다 보니 일도 함께 하면서, 아마도 이 부부는 힘을 다해 바울을 도왔음은 물론 그에게 복음의 진수를 배우게 되었다.

  얼마나 이 부부가 고마웠을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로마서 16장 3~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 의해서는 '브리스길라'라고 하는 애칭으로 불렸고, 바울에 의해서는 '브리스가'라고 하는 최고의 존칭으로 불려지게 된다. 사역의 어려움이나 난민이 되어 고린도까지 오게 된 이들 부부나 힘들긴 매 한 가지인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목을 내 놓고 주의 나라를 위해 달려온 바울 사도를 위해 그들의 목이라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가족도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사랑의 수고와 희생을 할 수 있는 가족이 되면 좋겠다. 우리 부부, 우리 자녀들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살아가면 좋겠다.

오늘의 기도
우리 가족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교회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을 다해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본문 : 시 66:9~12
찬송 : 339장
 
  하늘나라는 이 땅의 국가와 분명히 구별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이유이다. 3.1절에 헌신했던 선배들의 신앙을 기억한다. 1919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1800만여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25만 명 정도였다. 3.1운동으로 구금되었던 교역자는 기독교가 244명, 천도교가 125명, 불교 120명이었다. 전체 피검자의 수는 기독교가 17.6%, 천도교 11.8%, 유교 3.8%, 불교 1.1%, 무종교 47.7%, 미상 20%였다. 그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찬미가 14장이었던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께 큰 은총을 입은 나라이다. 6.25 전쟁 당시 UN 소련대사가 안전보상이사회에 참여했더라면 UN군 파견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당하는 조롱과 멸시는 우리의 교만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나의 방법을 고집하는 데서 만들어진 고통이다. 3.1운동 때는 1.5%가 안되는 믿음의 선배들이 이 민족의 소망이 되었고 지도자들이 희망을 걸었다. 그 때를 돌아보며 우리는 하늘나라의 환상을 회복하여 나라와 한국교회를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살리시고 실족함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는 주님이십니다"(시 66:9).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십자가에 피흘려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또 단련하신다.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습니다"(시 66:10~12). 한국교회는 이념의 그물에 걸렸다. 하나님은 교회의 쇠퇴라는 짐을 우리의 허리에 매어 두셨다. 세상 사람들이 조롱과 멸시로 우리 머리를 밟게 하고 계신다. 아직도 우리가 통과해야 할 물과 불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주님은 신실하시다. 그 분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신다.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는 명칭을 기꺼이 허락하셨다. 누가 이 문제 많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편지가 될 것인가?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후 3:3)는 말씀을 따라 편지가 될 사람! 그물에 걸려도 기도할 사람! 무거운 짐을 허리에 매고도 앞으로 나아갈 사람! 사람들이 머리를 밟고 가도 주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십자가를 질 사람, 어디 없는가?

오늘의 기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힘을 당합니다. 손해를 입으면서도 기꺼이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하나님께 감사
본문 : 빌 1:3~5
찬송 : 434장
 
바울이 박해를 받아서 옥에 갇힌 소식을 듣고서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가 바울을 걱정했다.
그들은 바울이 쓸 것을 마련하여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전했다.
바울은 그들의 사랑에 기쁘고 감사했다. 아울러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빌립보서를 기록해 보낸다.

첫째로,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다. 밤에 환상이 보였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그에게 마게도냐로 와서 자기들을 도우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렀다. 안식일에 강가의 기도하는 곳으로 갔다. 바울이 그 곳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루디아와 그의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먼저 루디아를 마음에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또 다른 안식일에는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았다. 자유함을 받아 성도가 된 그 여종을 생각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지만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옥에 갇혔지만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며 매인 것이 벗어졌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할 때에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그의 죽음을 막았다. 그 후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바울은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했다.

둘째로, 기쁨으로 간구할 때마다 감사했다. 바울은 간구할 때마다, 옥에 매여 있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간구한 것이 아니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했다. 그러할 때 바울에게는 간구의 기쁨이 넘쳐흘렀다.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생각이 긍정적이지 못하고 매사에 부정적이다. 또 남을 살피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중심적이다.

셋째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에 감사했다. 이때의 '첫날'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성도가 되었을 때를 '이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를 가리킨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난 후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다. 빌립보 교회는 많이 성장하여 집사들도 세우고, 더 나아가 감독들 곧 장로들도 세웠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힘써 참여한 결과였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할 때마다, 또한 복음을 위한 일에 함께 참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오늘의 기도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는 감사의 고백이 가득한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보따리를 풀어라
본문 : 창 39:19~23
찬송 : 440장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과는 구별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자랐다. 요셉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 요셉을 미워하던 형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일터에 찾아온 요셉이 다가오자, 그를 죽이고자 모의했다. 그러나 맏형 르우벤의 중재로 요셉은 죽음을 면하고 구덩이에서 던져졌으며, 유다의 제안에 따라 이스마엘 상인에게 이집트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다. 귀하게 여김을 받고 자란 요셉은 하루아침에 타국에서 종이 되었다. 설상가상 요셉은 여주인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

요셉은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 왔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서든지 그 곳에서 그 상황의 삶에 충실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도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을 정도로 성실하게 생활했다. 요셉은 마치 그곳이 사명지인 것처럼 마음을 열고 주어진 자리에 적응하며 이집트의 종살이를 감당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자신의 삶의 보따리를 풀었던 것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억울한 감옥에서도 삶의 보따리를 풀었던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자신의 가족을 이집트로 초청하여 꿈을 이루고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나사렛과 갈릴리에 지상의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참 하나님께서 참 사람이 되신 것으로 보따리를 다 풀어놓으셨다. 요셉과 마리아의 장남으로 가족이 되었고, 나사렛의 이웃이 되셨다.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시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다 이루셨다.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골고다를 향한 길을 향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지상에서의 삶의 모든 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대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삶의 보따리를 풀었던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십자가의 길을 완수하도록 힘을 주셨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 어디에서든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삶의 보따리를 풀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현실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늘 지켜보시고 함께 하시며 형통한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요셉처럼 억울한 자리에서도, 예수님처럼 위대한 사명의 자리에서도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현실과 직면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

오늘의 기도
꿈과 사명을 잊지 않고 매일 최선을 다하도록 힘을 주옵소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현실을 부정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자
본문 : 행 6:1~7
찬송 : 420장
 
말씀과 기도로 부흥한 초대 교회는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힘을 쓰게 된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말씀과 기도는 점점 약해지고 초대 교회가 마치 봉사하는 기관, 구제하는 기관처럼 변해 가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사랑으로 충만 하던 초대 교회가 봉사하는 일 구제하는 일을 하다가 오히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더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교회는 교회의 본래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첫째,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시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 돈을 바꾸어 주며 이윤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며 말씀하셨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 연약한 육신을 입은 인간이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은 좋은 일이고 잘 하는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도 아니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도 아니고, 그 일을 주요하게 여기시고 예수님은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다. 교회는 먼저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예배로 충만하고 기도로 뜨거울 때 성도들은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자연스럽게 일을 하는데 그것이 주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 주의 일이 결국 구제하고 봉사하는 섬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둘째, 기본이 무너지면 결국 서서히 무너진다.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고 봉사와 구제가 강해지면 우선은 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성도들은 믿음이 약해지고 이타적이 섬김은 이기적인 판단이 되고 서로에게 서로를 섬기라고 요구하는 요구가 되고 결국 그것은 불평과 원망이 되고 교회는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결국 사명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많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먼저 말씀 보는 것 기도하는 것이 충만해져야 한다. 그럴 때 성도는 사는 것 이요, 힘이 생기는 것이며,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또 다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순종의 힘이, 순종의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말씀과 기도의 기본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메시지 > 가정 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18일 ~ 23일 가정 예배  (6) 2024.03.17
3월 11일 ~ 16일 가정 예배  (0) 2024.03.09
2월 26일 ~ 3월 2일 가정 예배  (2) 2024.02.25
2월 19일 ~ 24일 가정 예배  (2) 2024.02.17
2월 12일 ~ 17일 가정 예배  (2)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