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3월 11일 ~ 16일 가정 예배

ree610 2024. 3. 9. 17:06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본문 : 요 4:1~14
찬송 : 302장
 
사막을 걷는 사람들이 간혹 탈수 현상으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탈수로 죽는 사람들 가운데 삼분의 이가 물병에 물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탈수현상으로 죽게 될까?
물을 아껴 마시려다 그랬을까? 아니다. 탈수를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탈수가 와버린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노인들에게 목이 마르지 않아도 물을 마셔야 한다고 충고한다. 몸의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막을 걷는 사람들에게 가이드가 안전 수칙을 말할 때 목이 마르지 않아도 30분 또는 1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물을 마시라고 한다. 은혜는 물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마셔 둬야 한다. 예배가 필요하고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안에 말씀으로 인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목이 마르지 않고 지금 배가 불러도 우리는 때가 되면 물을 다시 마시고 밥을 다시 먹게 된다. 지금 은혜로 충만한 성도들도 다시 예배를 통하여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받아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충만한 성도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도 아무리 사람들이 싫어도 물은 길러 와야 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으셨기에 물이 필요하다. 물 없는 세상은 아예 생각할 수 없다. 세상의 물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시고 나면 이내 목이 마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진수성찬도 4시간만 지나면 소화가 다 되어 버린다. 물도 그렇다. 사랑도 그렇다. 즉 인생이라는 것이 늘 목이 마른 것이다. 늘 배가 고픈 것이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신 말씀, 그리고 주시고 싶은 말씀이다. "이 물을 마시는 자 마다 다시 목이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이다.

믿음이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이 기도를 만들고, 그 믿음의 기도가 더 깊은 기도를 만들고, 그 기도가 다시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이 헌신을 만들고 충성을 만들고 소망을 만들고 은혜를 만든다. 능력을 만들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변함 없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인해 말씀과 기도가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 물을 주시기 위함이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 이 물을 은혜라고 한다. 우리는 이 물을 복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물을 마시는 그릇을 믿음의 그릇이라고 한다. 예배를 통한 말씀과 기도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는 심령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본문 : 막 8:27~33
찬송 : 339장
 
 평창 동계올림픽, 2018년 평창 대회에서 처음 채택된 종목으로 매스스타트 경기는 분리된 레인이 없어지고 웜업 레인까지 포함, 경기장 전체를 트랙으로 활용하는 경기다. 16바퀴를 도는데, 4, 8, 12바퀴를 돌 때 1~3위에게 각각 5, 3, 1점을 주며, 마지막 바퀴는 60, 40, 20점을 부여하여 최종 점수가 많은 선수 순으로 순위를 정하는 경기이다. 여러 명이 함께 출발해 겨루는 종목으로 우리나라는 이승훈 선수가 정재원 선수와 함께 결승에 올라 금메달을 땄다. 자국 올림픽에 처음 채택된 경기의 초대 챔피언이 되는 영광을 이승훈 선수가 가지게 되었다. 국민들은 결승 경기에서 중반 레이스 전체를 그룹의 선두로 이끌었던 정재원 선수의 경기에 주목했다. 정재원 선수가 계속해서 그룹을 앞에서 이끈 것은 이승훈 선수를 위해서였다. 그는 이승훈 선수의 페이스를 유지해 주고, 막판 스퍼트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조력자였다.

경북 의성의 4총사 미녀가 컬링으로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영미~'라는 유행어와 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선수들은 경기 중에 휴대폰을 반납하고 경기에만 집중하느라 자신들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승까지 우리 선수들의 집중력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결과는 값진 은메달이었다. 네 명의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우리 가족은 무엇에 집중하고,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 집중하는 그것이 우리 미래의 행복이요, 신앙이다. 자기가 꾸는 꿈에 집중하면 자신의 꿈을 이룰 것이고,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께 집중하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신앙생활에 집중하고, 매사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집중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있을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예수님과 달랐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꿈꿨던 일을 이루고자 했다. 급기야 베드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에게 항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보다 자신들의 일이 우선이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기성취, 자기 꿈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생각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은 자신을 주시고 생명을 구원하시는 일이다. 우리 가족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주고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집중하자.

오늘의 기도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온 이기적인 생활을 용서하소서. 교회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집중하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말씀이 주는 유익
본문 : 시 19:7~11
찬송 : 200장
 
타산지석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산의 거친(쓸모 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시경(詩經), 소아편(小雅篇) '학명(鶴鳴)'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로 돌(石)을 소인(小人)에 옥(玉)을 군자(君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모든 일들도 나의 인격을 도야하는데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풍부한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팔리며 가장 많은 영향력을 주는 책이 성경이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기록을 신화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사건으로 바라본다면 성경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현재를 성찰하는 미래를 계획하는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40년간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많은 부와 권력, 명예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다윗이 그의 글들을 통해 한결같이 권면하고 있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유익한 것이 부나 권력 어떤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본문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이 무엇일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킨다. 영혼을 소성시킨다는 말씀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 가르쳐주고,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며, 그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준다. 지혜란 다른 말로 하면 분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분별하여 선택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을 기반에 둔 지혜는 상대적이다. 언제나 옳은 것만 분별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세계, 구원의 지혜를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진리를 분별하게 한다. 구원의 길을 보게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은 것으로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 순간적인 기쁨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은 옳고 바르기 때문에 마음에 참된 기쁨을 준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며 기쁨을 준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말씀 듣는 것을 사모하며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을 통해 생명과 지혜,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아담과 하와
본문 : 창 3:21
찬송 : 293장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번째 사람이자, 에덴동산에서 완벽한 가정을 이룬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을 불순종과 거짓의 동산이 되게 하고, 그 곳에서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그들은 처음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창세기 3장 8절을 보면 그들의 죄로 인해 눈이 밝아져,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아래에 숨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길보다 유혹과 욕심을 따르는 길을 선택했던 그들의 불순종, 그들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만 것이다. 이렇게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가장 완벽했던 가정은 죄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그 후 이들 부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열심히 살아보고 아이도 낳아보지만, 그들의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심으로 인해 죽이고야 마는 비극적인 가정사를 이어가게 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처음 가족이 이렇게 허물어져 버렸다. 죄의 시작은 작은 유혹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한 사람의 죄가 한 사람의 죄로 끝나지 않고 한 가족과 우리 사회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늘 그렇다. 가족 구성원 한 사람의 불순종은 그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가족의 문제이고, 우리 사회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이기에 누구 한 사람의 범죄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공동체를 아프게 한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 서로도 모르게 죄의 유혹에 빠져 들어갔고, 하나님께 그들의 범죄로 얼룩진 일상을 숨겨야만 했다. 가인과 아벨은 가장 가까운 형제지간 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형에게 맞아서 죽게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가족은 에덴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도 잃어버리고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가족이 가장 불행한 가족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불순종과 죄로 인한 가족의 아픔은 사실 어느 가정에나 크고 작게 있다. 상처도 없고 아픔도 없는 가족이 세상에 있을까? 이 세상 모든 가족이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은 가죽옷을 준비하신다. 상처 난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해법은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가죽옷이었다. 동생을 죽인 죄벌이 너무 무거워 고통 받고 있는 가인을 위한 하나님의 해법은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신 것이었다.

오늘 우리 가족에게는 어떤 상처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오늘 우리 사회는 또 어떤 가죽옷이 필요한지 돌아보아야 겠다. 아프고 깨진 가정, 상처 난 우리 사회의 아픔을 잘 돌아보면서 오늘 우리 가족과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죽옷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오늘의 기도
오랜 상처와 아픔들을 잘 딛고 일어서는 우리 가족과 우리 사회가 되도록 아버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가버나움,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
본문 : 마 4:12~16
찬송 : 412장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는다. 정확히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는데 성령에게 이끌려 가셨다고 전한다. 성령님은 우리를 마귀에게로 인도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전쟁이 날 것이라고 한다. 그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은 결코 쉽거나 천국으로 직행하는 티켓을 구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마귀에게로 인도하듯 우리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반드시 겪게 하신다. 이 과정을 마치고 주님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사시게 된 것을 마태복음은 구약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전한다.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셨다고 전한다. 가버나움에 주님이 오셔서 빛이 되셨다. 빛이 비추인 가버나움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가버나움은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에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헤롯이 로마황제 디벨리우스를 기념하여 디베랴라고 하는 도시를 만들었다. 갈릴리의 모든 행정과 경제는 이 디베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갈릴리 호수가 디베랴바다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한다. 목회나 선교전략상 디베랴에 사셔야 맞지만 주님은 작은 마을 가버나움에 정착하신다.
가버나움은 히브리어의 크파르나훔의 헬라식 표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이 '크파르나훔'인 것이다. '크파르'는 우리 말로 표현하자면 동네 혹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나훔은 평화, 편안한이란 뜻이다. 구약의 '노아'와 같은 말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안위'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평안한 마을, 이곳이 우리 주님께서 정착하신 마을이다. 예수님께서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은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주님은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을 고려하시지 않았다. 주님의 지도력은 결코 영향력에 기준을 두지 않았다.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평강이 있는 마을 '가버나움'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 주님이 머무실만한 교회인가, 또 가정인가, 그런 나 자신인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후에 주님은 가버나움에 대해서 멸망을 선포하신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화평'은 거짓이다. 주님은 가버나움에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가버나움 주민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 가버나움은 저주를 받았고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다.
우리 가정과 교회를 가버나움으로 만드는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머무실만한 거룩한 처소가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가 가버나움이 되게 하옵소서. 큰 교회와 위대한 나라보다 먼저 가버나움이 되게 하옵소서. 이 종이 가버나움을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섬기러 오신 예수님
본문 : 막 10:41~45
찬송 : 212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가까웠다.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제자들은 열두 보좌에 앉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얻을 영광을 잔뜩 기대했다. 하지만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화를 내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셨다.

첫째, 이방 나라의 집권자의 태도이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간청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고 싶어 했기에 계속해서 '누가 크냐'하며 다투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다.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그들의 고관들이 행동하는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이방나라의 집권자들은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마음대로 그들에게 권력을 휘두른다. 고관들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 역시 아랫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린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것은 이방 나라의 집권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둘째,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방 나라의 집권자들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며, 그들에게 권세를 부린다. 이방나라 사람들은 남들을 짓밟고서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기를 쓴다. 이와 달리 하나님 나라는, 아래에서 섬기는 사람이 큰 자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사람이 으뜸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를 힘쓴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셋째,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이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키실 때, 인자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셨다. '인자'는 메시아 칭호이다. 예수님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시다. 둘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을 세울 때, 그 몸에 기름을 부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김의 본을 보이시며, 대속물로 오셨다. 만왕의 왕의 섬김을 받은 우리는 섬기면서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기도
종의 자리에 앉는 일에, 섬김의 자리에 머무르는 일에 시선이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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