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福)이냐, 박이냐?
본문 : 신 28:1~14
찬송 : 463장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대박'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큰 이윤이나, 성공, 행운 따위를 일컫는 말이라 하는데, 그야말로 세상은 박을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로또 열풍으로 인생역전, 가상화폐로 대박이 터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정선 카지노에는 앉을 자리가 없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차는 사람들이 많다. 놀부 심보로 흥부의 박이 터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박'이 아닌 '복'을 권한다.
'박'은 세상이 기대하는 것이고, '복'은 하나님이 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시는 은혜요, 선물이다. '박'은 세상에서 차지하고 누릴 물질이나 권력 등을 말하지만 '복'은 하늘의 것이다. '박'은 일시적인 것이나 '복'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박'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본문은 성경에서 '복'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복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교훈을 따라 살아갈 때 이루어질 것들이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떡 반죽 그릇도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고, 집안의 식구는 물론 가축까지 복을 받는다. 식탁의 풍성함은 물론 산업전반에 부족함이 없게 된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은 전(全)방위적으로 복을 받는다.
그러나 복 자체는 공짜요, 은혜요, 선물이지만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복종이 필수조건이다. 복을 받을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 따라야 한다. 대박을 바라는 사람은 윤리나 도덕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삶에 터질 '대박'의 내용만 중요하기 때문에 남 생각은 하지도 않고, 욕심만 부리면서 요행이 쏟아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대가(代價)를 치러야 대가(大家)가 되듯이 저절로 얻을 수 있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을 바라지 않고, 복을 받을 삶은 도외시하고, 대박을 바란다면 그는 우상숭배자이다. 복음성가 가사처럼 '받을 것만 계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신자가 많다고 하지만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은 적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기도하지 않고, 의인의 삶인 구제와 봉사와 헌신의 삶과는 거리가 멀면서 무병장수, 만사형통을 바라고 하나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처럼 생각한다면 놀부의 박을 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대박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고 받는 참된 신자가 되자.
오늘의 기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유념하여 실천함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하시고, 복 받은 우리의 삶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본문 : 창 43:1~10
찬송 : 369장
우리는 요셉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 결말이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문을 보면, 요셉의 형들은 빨리 막냇 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는 7년 풍년 뒤에,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고 지금은 두 번째 맞는 흉년이다. 아직도 흉년이 5년 동안이나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더 고생하지 말고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가야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 계획이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도 알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며 베냐민만은 절대 애굽으로 못 데려간다고 반대하고 있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사실 야곱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그러다가 다 잃게 될 거야.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라면서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 내 예감만을 주장하다가는 오히려 고생이 더 심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라도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을 재촉하시기 때문이다. 1,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기근이라는 압박을 더 심하게 가하심을 볼 수 있다. 우리 삶에도 야곱이 당한 기근처럼, 시련에 시련이 더해질 수 있다. 그것을 빨리 끝내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좋겠는가?
야곱과 아들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서로 잘잘못을 따지며 비난하고 있다. 문제가 계속 엉키고 있다. 그때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한 명 있다. 베냐민을 무사히 데려오는 일에 유다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 이 말을 듣자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한다. 사실 유다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베냐민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었고 그 마음을 입술을 통해서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유다를 크게 보셨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예수님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장자로서의 권세를 더하여 주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에 나서지 않는다.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기도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책임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해결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비난만 하지 말고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자. 우리에게는 방법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로 선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광을 안겨 주신다.
오늘의 기도
기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다 힘들지만 기도로 사는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
본문 : 롬 2:14~26
찬송 : 546장
기독교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신본주의적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오해하기를 도덕적,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것과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본문의 말씀이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롬 3:21~22, 갈 2:16)와 상치된다는 이유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그와 같은 판단이 전혀 근거 없는 오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는 때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로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출신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대대적인 박해에 직면하여 많은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매우 피폐한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교리를 오해하여 믿음만을 강조하고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등한시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알고 있는 것만큼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부르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14~20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밝힌다. 여기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구체적 실례를 들어가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서 자기를 구원하는 데 있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면서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을 입술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인데 입술로는 귀신도 스스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본문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신앙인에게 반드시 따라야 할 행함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행함으로 입증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지나온 믿음의 행적을 돌아보고 행함이 있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하자.
오늘의 기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할 수 없는 죽은 믿음이며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거짓 믿음임을 깨닫고,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떠나야 한다
본문 : 창 12:1~4
찬송 : 146장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의 믿음의 삶의 여정의 시작을 처음 계시하는 말씀이 본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의 중심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르심의 내용, 그 중심은 '떠나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떠날 때에 그 모든 역사가 이뤄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진지한 성도의 마음의 소원, 그것은 주님 앞에 복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성경 속 믿음의 위인들과 같이, 교회 역사 속의 믿음의 선진들 같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소원하는 성도들. 그 믿음을 가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믿음의 위인들의 삶을 배워 실천해 보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성경이 계시하는 첫 번째 할 일은 '떠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떠나야 한다.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상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야 했다. 고향, 친척, 아버지, 혈육, 기타 삶의 터전들, 그의 인생을 계산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든든한 자원들을 잃어야 했다. 대신 새로이 얻는 것도 있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새로이 주어지는 삶의 터전은 모든 것이 불투명한 것들, 계산이 서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야 했다. 구체적인 것들이 아무 것도 없었다. 계산이 서지 않는 인생,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고향, 친척, 아버지, 혈육, 기타 삶의 자원들은 정말 확실한 것이었을까? 그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인가? 반대로 새로이 얻게 될 삶의 터전,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 그곳의 삶의 자원들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오직 역경 만이 가득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정말 아브라함이 떠나지 않으면 인생이 확실히 보장되고, 떠나면 모든 것이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을까? 도대체 누가 그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떠났다. 왜 떠났는가? 하나님께서 새로이 그에게 내려 주실 삶의 환경에 대하여 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놓치면 큰 일 날 줄 알고 살아간다. 정말 그럴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 그대로 가면 모든 것이 계산이 서고, 안정적인 삶일 수 있을까?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심으로 피조의 세계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 주님은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떠나야 한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복된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명령보다는 나의 눈과 경험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눈을 떠 주님의 복된 말씀을 바라보고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요단을 건너가라
본문 : 수 1:1~9
찬송 : 347장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성도의 삶은 말씀의 비전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비전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고 성취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첫 번째로 내린 명령이 나온다.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지금 광야시대를 마감하고 가나안 입성이 이루어기 직전에 주신 명령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 가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과정에서도 모세에게 주신 명령은 홍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출애굽 때나 가나안 입성의 순간에나 하나님께서 내리신 '나아가라' '건너가라'는 명령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먼저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를 향하고, 가정을 향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이 드러나고 성취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순종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이 어느 군인이 오늘 가장 탁월했는지 물었다. 한 장교는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지휘관은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에게는 순종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님도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순종하며 나아갈 때 격려도 해주신다. "내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고, 나 여호와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같이 함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세를 대적할 자가 없었듯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가나안의 어떤 대적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를 맞서 싸울 자가 없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표현해주신다. 그리고 용기도 주신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세 번에 걸쳐 반복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붙잡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면 형통케하는 복을 주신다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살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시는 비전과 계획이 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무너져 내리는 성벽
본문 : 수 6:1~11
찬송 : 545장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우리를 괴롭히고 짓누르는 온갖 장애물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의 눈높이에서만 바라보면 너무 높아 보이기 때문에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장벽일지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크고 작은 장벽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쟁취할 수 있을까?
먼저 온전한 순종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본문 3~5절을 보면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라.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라고 했다. 인간적인 수단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주위를 여러 번 돌게 하셨을까? 온전한 순종과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여리고성은 열세 번을 온전히 돈 후에야 무너졌다. 마지막 일곱째 날의 최후의 함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한 후에 외친 믿음의 함성이었다. 이처럼 한 번의 순종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과 믿음은 반드시 상황을 바꾼다.
또한 오직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본문 4, 6~9, 11절에서 반복되는 한 단어는 여호와의 궤이다.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복중의 복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삶의 초점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이나 마병이나 대포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또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어야 한다. 본문 8절을 보면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팔이 울리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행동 개시 명령으로 여겼다. 이 순간부터 이 사건과 싸움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크게 울려 퍼지고 있는 나팔소리를 상상해보라. 그 나팔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고 했다.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오늘의 기도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장벽 앞에서 주저할 때 우리의 사건 속에 개입하여 주시고 온전한 순종과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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