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의 『용서에 대하여』동녘
저자는 인간의 실존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함께 살아감’(living together)의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넘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서론이면서 동시에 일관되게 강조하는 주제이다.
2장부터 5장까지는 “용서의 정의”, “용서의 종류”, “용서와 종교”, “용서의 윤리와 용서의 정치”를 다룬다. 저자는 먼저 용서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반박하면서 용서에 대한 정의와 과정 등을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용서는 종교적・개인적 차원에 국한되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사과가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고, 망각이 용서의 전제조건이라고 간주되었다. 하지만 용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식민지 학살이나 위안부 문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 등 정치적 차원까지 확장될 수 있다. 또한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이루어져야 피해자의 자긍심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용서는 망각이 아닌 분명한 기억이다.”(247) 더 나아가 저자는, 용서는 분노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조셉 버틀러의 주장에 근거해 언급한다. “정당한 분노의 감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63)
기독교인들은 설교나 성서, 때로는 신앙공동체의 분위기 때문에 용서를 강요받기 십상이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반면, 용서하는 사람이 곧 성숙한 신앙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무언의 압박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피해 당사자의 상처나 아픔은 소홀해진다. 한마디로 용서는 피해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게 만드는 ‘사망의 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저자는 예수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라는 말씀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데리다의 명제를 근거로, 무제한적–무조건적 용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용서는 율법적 강요나 주변의 압박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용서는 수학공식이나 논리적 과정이 아니기에 정해진 해답이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사람은 기계나 로봇과 같은 획일적 존재가 아니라 다층적 존재이기에 일방적으로 용서의 과정을 거쳐나가서도 안 된다. 저자는 행여 독자들이 무조건적 용서에 대해 오해할 가능성을 우려하듯 이 사실을 이 책 처음부터 거듭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용서는 인간의 의무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보류해야 할 용서도 있다.”(65)
왜 그런가? 의무로서의 무조건적 용서가 우리의 목표 지점인데 왜 보류해야 할 용서도 있다는 것일까? 저자는 용서의 과정에서 피해자의 ‘자기 사랑’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의무화되다 보면 자칫 피해자의 상처나 아픔을 경시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향해 “그만 하면 됐다. 지겹다. 그만 용서해라.”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아직도 실종자 9명이 바닷속에 잠겨 있는데도 돈으로 보상해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도덕적 의무로서의 용서’를 도식화하고 율법화함으로써 피해자의 회복을 무시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용서를 받는 사람뿐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자신의 안녕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지켜가는 것이 ‘도덕적 의무로서의 용서’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다.”(67)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행여 “저자가 ‘용서’를 강조하다가 ‘정의’를 약화시키거나 소홀히 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지난해 적어도 기독교계에서 핫(hot)한 책인 『정의를 위하여』의 저자가 아니던가! 그 책 269쪽에서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을 때 느낀 긴장감과도 동일했다. ‘혹시 정의를 상대화하려는 의도는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 책에서는 ‘용서’를 절대화함으로써 ‘정의’를 희석시킬 수 있다는 노파심이 저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필자와 같은 의심 많은 독자의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마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을 가져라”(요 20:27, 새번역)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용서란 정의의 개념을 희석시켜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한다.
여기에서 예수의 말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라는 말씀을 다시 떠올려보자. 이 구절은 무제한적–무조건적 용서를 말하며, 기독교적 용서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이 명제는 용서가 일회적・단편적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용서는 일생 동안 반복, 확장하는 ‘회심의 여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용서의 원을 확장하는 과정”(82)이요, 따라서 “용서란 일회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단계를 거치며 이루어”(79)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완전한 용서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 그 원을 확장할 수 있을까?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용서와 분노는 양립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분노는 파괴적 분노가 아니라 성찰적 분노이다. 파괴적 분노를 버리고 가해자를 부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 동시에, 죄를 묵인하지 않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124)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지은 사람은 사랑하라.”라는 말의 의미이다. 저자는 5·18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면서 “국가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이 비극을 방지할 수 있던 책임자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반드시 진실 규명이 필요한 상황”(145)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 엄정한 진실 규명을 위해 청문회를 열고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거치는 진실 위원회가 없었다.”라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교회 입구에 “잊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았고, 지금도 걸려 있다. 현수막을 걸어놓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누군가 “언제까지 이 현수막을 붙여 놓을 생각이냐?”라고 물을 때마다,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붙여 놓을 작정이라고 대답한다. 이제 그만 잊고 용서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제3자인 필자는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망각이 곧 용서라는 명제는 ‘참’을 왜곡하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용서의 시작을 ‘기억’에서 시작해 ‘복수심 포기’와 ‘가해자의 인간 됨을 인정’하고 ‘깨어진 관계 회복에 대한 열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 책 후반부에 이르면 용서에 제3자인 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종교적 신념이 용서를 촉진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칫 종교나 신앙공동체가 용서를 강요하는 ‘도덕적 압력 단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184) 그뿐만 아니라 용서의 우선적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내가 먼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용서를 해요?”라고 절규했다. 저자가 이 영화를 보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용서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라는 점이다.
이 책 『용서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과 ‘기억’ 사이에서 일관성과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규명하고,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끝까지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용서는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용서하는 존재이고 용서받는 존재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 삶의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면서 동시에 용서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길이라는 말에 희망이 생긴다.(99, 247) 정치적 불신으로 인한 갈등과 분노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진정한 ‘용서’의 과정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나라,’ 거듭난 ‘우리’를 희망하는 2017년도를 꿈꾸어 본다.
전남식 |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거쳐 런던 신학대학에서 잠시 공부하였다. 성령이 일하는 급진적 제자도를 살아내는 공동체 목회를 지향하며, 꿈이있는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번역서로 『성령과 은사』(공역), 『근원적 혁명』(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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