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제타 홀의 『로제타 홀 일기 1-4』홍성사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은 미국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서울에 신설된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의료선교사로 우리나라 교계에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녀에 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하고, 여기에서는 바로 네 권의 일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녀가 조선에 들어온 날은 1890년 10월 13일이며,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날은 1933년 10월 2일이다. 그녀의 네 권의 일기는 1890년 8월 21일부터 1894년 10월 1일까지에 해당한다. 즉 그녀의 일기는 조선에 들어오기 전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여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멈추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육아일기는 아들 셔우드 홀의 경우 1893년부터 1902년까지 출생부터 아홉 살까지의 일기와 1906년 9월 10일 열두 살 생일 사진을 사춘기의 첫 모습으로 남겼으며, 딸 이디스 마가렛의 경우 1895년 1월 18일부터 1900년 5월 23일까지의 일기를 포함하고 있다. 로제타 홀 일기는 아들인 셔우드 홀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유품으로, 셔우드 홀의 장남인 윌리엄 홀의 유골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두고 싶어 한 가족들과의 접촉을 계기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결과 양화진문화원에 기증되었으며, 현재 번역 및 출판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녀의 일기는 모두 6권이며, 1–4권은 그녀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일기이고, 나머지 두 권은 아들과 딸의 육아일기이다. 지금은 5권의 번역이 완료되어 6월 초 발행을 목표로 작업 중에 있으며, 올해 말경이면 로제타 홀 일기 여섯 권에 대한 출판이 모두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나오게 될 육아일기는 제외하고, 일기 1–4권 각각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일기 1권은 1890년 8월 21일 목요일부터 같은 해 9월 23일 화요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대륙 횡단 철도와 태평양 횡단 증기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요코하마에 도착할 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일기 2권은 그 뒤를 이어 9월 24일 수요일부터 1891년 3월 29일 주일까지 요코하마를 포함한 일본의 선교지를 경유한 과정과 제물포에 도착한 이후 약 7개월 동안 서울에서의 초기 상황을 담고 있다. 일기 3권은 1891년 5월 15일 금요일부터 12월 31일 목요일까지 보구여관의 의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모습과 여름에 중국 즈푸에서 휴가를 보낸 내용,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 홀이 한국으로 오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일기 4권은 1892년 3월 8일 화요일에 시작하여 1894년 10월 1일 월요일 미처 다 쓰지 못한 일기로 끝난다.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쓴 10월 8일 자 편지가 삽입되어 있고, 그녀는 그 편지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일기 4권의 마지막에는 윌리엄 제임스 홀의 추도예배 순서지가 들어 있다.
일단 『로제타 홀 일기』 1–4권을 통해서 당시 선교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반 시설이 우선 서울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과정과 그러한 시스템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갈 무렵에 경쟁적으로 신속하게 조선의 각 지방으로 사역의 가지를 뻗어나간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매우 구체적인 사실들을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자료적 가치이다. 선교사 개인적으로는 멀리 뉴욕에서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며 서울로 들어오는 구체적인 경로와 중간 기착지에 점점 다가가며 선교지에 대한 기대와 각오를 다지는 섬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그녀가 소속된 미국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경우 미국 각 중심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미국감리회와는 별도의 독립된 기관으로 스스로 기금을 마련하여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세계 선교에 이바지하고 있는 모습도 엿보인다.
로제타 홀은 그녀의 일기를,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일기책을 매우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출판된 『로제타 홀 일기』의 겉표지는 그녀가 직접 사용하던 일기책의 겉표지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가로 19.3cm, 세로 15.8cm 크기의 실제 일기책은 출판된 일기에서 더욱 커졌는데, 가로 21cm, 세로 29cm의 국배판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실물의 80% 크기로 스캔한 일기를 원본 그대로 윗부분에 넣고, 번역은 해당 페이지 아랫부분에 싣기 위해서다. 그리고 여백에는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설명이나 사진만 들어 있는 원본을 각각 배열하였다. 이러한 편집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제타 홀이 자신의 일기를 기록하면서 객관적인 정보가 담긴 수많은 자료를 일기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물론 각종 엽서와 낙엽, 꽃과 같은 것들과 옷감, 승차표 영수증, 식사메뉴 등을 꼼꼼히 챙겨두었다가 일기를 작성하는 데 활용했던 것이다. 그녀의 일기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일기장을 멋진 작품으로 꾸며놓아 거기에서 더욱 많은 것들을 살필 수 있게 한다. 각 권 말미에는 타이핑된 영문판 일기가 함께 들어 있으며, 영문 색인과 별도의 해설이 실려 있다. 그녀의 일기에는 그동안 예사롭게 판단하여 지나친 부분들에 대한 상세하고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말 그대로 예사롭게 보이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의사이자 선교사로 여기며 직면한 일상이 주는 의미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 특별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 가령 공기나 물과 같이 소중한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어 온 것처럼, 오히려 무감각함으로 자신과 마음의 담장을 쌓아버리는 그러한 것들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 땅에서 제대로 살지 못했던 여성들, 그중에서도 아픈 이들을 치료하면서 로제타는 조선인 여의사를 배출하는 것을 자기 사역의 최종 목표로 정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내용이 그녀의 일기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는 세간에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로제타 홀은 일기에서 자신이 조선 땅에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묻는다. 그 대답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그리고 조선인과 자신의 관계에서 찾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녀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다. 여성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자신이 해오던 선교활동에서는 안정적인 입지를 확립하였지만, 제임스가 들어오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곁으로 그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를 한국으로 불러낸 것을 자신이 이곳에서 한 가장 큰 일이라는 것으로, 개인적 사랑의 차원을 넘고자 하는 명분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 역시 하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일기 한 구절에 그 마음이 담겨 있다. “설사 어떤 연유로 내가 의사 선생과 헤어지게 되더라도 나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 더욱 관대한 사람이 되리라 확신한다.”(1891년 12월 31일 목요일) 그녀의 일기에는 한 선교사의 사랑이라는 대목이 클라이맥스로 펼쳐진다. 로제타가 기록으로 남긴 남편과의 사랑의 결실은 당시 내한 선교사들의 결혼과 신혼여행, 육아 및 여름휴가 등에 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신혼이라고 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선교적 사명과 관련된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그녀에게는 결혼 이후에도 당분간 계속 병원 일을 하는 역할이 주어졌고, 남편에게는 평양 선교지부(station) 개설이라는 책임이 주어졌다. 따라서 둘에게는 같이 머물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각자는 이별의 시간을 이겨내며 주어진 역할을 감당했으니, 거기에서 초기 보구여관의 여성의료 사역이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 등으로 확장되었으며, 평양에서도 선교사가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교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 사이에서는 감리사를 포함한 다른 선교사들과의 공적이거나 사적인 영역 모두를 포함한 각양각색의 인간관계를 살필 수도 있는데 의외의 내용도 꽤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장 기뻐한 순간은 북한산에서의 추억이었다. 1893년 7월 26일부터 약 2주 동안 그들은 북한산 정상에서 특별한 여행을 하였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텐트나 해먹에서 쉬고 있으면 남편이 음식을 준비해서 함께 먹고 나중에는 남편에게 기대 주변을 산책하곤 했으니 그녀 평생에 행복으로 가득한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처 사찰에서 다른 선교사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말은 북한산 진관사 등에서 선교사들이 머물곤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 또한 선교사의 활동을 추가적으로 살필 수 있는 새로운 차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 곁을 오랫동안 지켜주지 못하고 먼저 하늘로 떠나버렸다. 그녀의 일기도 이 장면에서 끝이 난다. 아직도 다 쓰지 못한 그녀의 일기는 1894년 10월 1일 자로 남겨져 있다. 그 뒷장에는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열린 남편의 추도예배 순서지가 마지막으로 놓여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로제타 셔우드 홀이지만 그녀의 일기에서는 전혀 새로운 로제타 홀을 만날 수 있다.
이용민 | 성결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교회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으며, 만남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광성교회 56년사』, 『내 길의 한 줄기 빛: 성봉 이만영 장로 회고록』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