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의 창간과 초기 내용 :
기독교사상」이 1957년 8월 창간호를 발행한 후 지령 700호와 창간 60주년을 기념하게 된 것은 장구한 역사만으로도 한국 잡지저널리즘의 차원에서 매우 의미가 큰 것이다. 더군다나 일제강점을 거쳐 6・25전쟁을 겪은 후 여전히 사회적으로 정연한 질서를 찾지 못한 혼돈의 1950년대 후반에,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사상의 불안정과 빈곤을 극복하여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신학적 차원에서 이끌어가겠다고 밝힌 창간 취지에 걸맞게 종교저널리즘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사상」의 창간과 초기 성과를 살펴보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가야 하는지 가늠해본다는 면에서 매우 뜻깊은 일이다.
「기독교사상」은 개신교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 연합하여 활동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언론매체이자, 신학사상지로 창간되었다. 대한기독교서회는 「기독교사상」을 창간한 후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수익성을 앞세우는 대중성을 지양하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소수 지성인을 대상으로 세계적 신학의 흐름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사회적 의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저널리즘의 역할도 하였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대한기독교서회가 「기독교사상」을 발행하였기 때문에 진보 성향의 신학잡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기독교사상」은 일제강점기, 신문이라고는 총독부 기관지 3개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유일하게 창간한 「기독신보」의 명맥을, 기독교방송(CBS)과 함께 이어간다는 점에서 한국 종교저널리즘이 진화해가는 과정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기독신보」가 1937년 폐간되고 해방이 된 후에야 비로소 한국교회가 종교저널리즘 활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1954년에는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으로 CBS가 창립되었고, 1957년에는 「기독교사상」이 창간되었다. 한국 언론의 암흑기로 표현되는 일제강점기에 언론의 역할을 해낸 「기독신보」처럼, 「기독교사상」은 CBS와 함께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종교저널리즘 진화과정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혼돈의 시대에 창간된 「기독교사상」
「기독교사상」이 어떤 논의와 과정을 거쳐 창간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파악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관련 회의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48년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였던 김춘배의 구상과 의지에 따라 「기독교사상」이 창간되었다는 구전을 담은 일부 증언의 기록이 전부이다. 김춘배는 단행본 위주의 서회 출판 경향을 벗어나고자 어린이 잡지, 가정 잡지, 신학 잡지 등의 간행물을 구상하고 발행하였다. 이에 따라 1949년 1월 가정(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가정」이 발간되었다. 이는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4년 「새가정」으로 제호가 바뀌었고, 후에 한국기독교가정생활위원회에서 발행하였다. 1952년 부산에서 어린이 잡지 「새벗」이, 1957년에는 신학잡지 「기독교사상」이 각각 창간되었다.
「기독교사상」이 창간된 1950년대 후반은 한국 기독교계 정기간행물 발행 역사에서 혼돈기였다. 해방 후 자유당 시대에 이르는 기간으로 혼돈 속에서도 자기 위치를 찾아가던 기간이었다. 사상적・신앙적 갈등은 교회 분열이라는 비극을 낳았고,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기독교 정기간행물도 우후죽순처럼 여러 종류가 나왔으나 지속성 없이 사라지는 것이 많았고 신앙노선 및 교단신학을 뚜렷하게 내걸고 자기주장을 펴는 신문들이 많았다. 대화와 화해보다는 갈등과 분쟁이 많던 시대였다.(이덕주, “한국 기독교 신문・잡지 개관,” 『한국정기간행물 100년』, 기독교문사, 1987.)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기독교 복음으로 질서를 세우고자 한국교회가 창간한 잡지가 「기독교사상」이다. 창간호 권두언 첫마디에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혼돈이라고 함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지적한 배경이다. 「기독교사상」은 “눈을 돌려 어디를 보나 혼돈과 무질서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라며 “이 혼돈과 무질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겠다.”라는 창간의 목적을 밝혔다.
창간호의 표지를 보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탕색을 붉은색에 가까운 분홍색으로 하고, 제호는 한자 基督敎思想을 가로쓰기로 하였으며, 주요 기사 제목 세 건을 표지에 세로쓰기로 편집하였다. 본문은 국한문 혼용이다. 일제강점기에 「기독신보」도 제호를 한자로 썼으나, 창간 초기 한글 전용을 추구하면서 한자인 경우 한글을 병기한 것과 다소 비교된다. 표지의 대부분은 니나 윙클 작 <마음속의 빛>을 흑백사진 세로편집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자로 쓴 제호는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가 쓴 것임을 차례 페이지에 기록하였다. 「기독교사상」은 창간호부터 한동안 매호 3,000부를 발행하였고, 1980년에는 월평균 4,800부를 발행하였다.
창간호 표지의 구성 체제는 지령 700호에 이르기까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창간호 본문은 권두언 자리에 편집위원장 홍현설의 창간사로 시작되었으며 칼 바르트의 “인간구조론”을 비롯해 라인홀드 니버의 “빨트는 왜 헝가리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나”를 소개하고 있다. 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 모두 신정통주의 신학자인데,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창간 초기부터 소개함으로써 세계적 신학사상의 흐름을 국내에 전하려는 「기독교사상」의 발행 취지를 보여주었다.
앞서 말했듯 「기독교사상」은 창간사에서 “사상의 불안정과 빈곤에서 비롯된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를 기독교 복음진리로써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목적을 밝혔다. 혼돈과 무질서의 양상이 일반 사회는 물론 기독교계도 민심을 교란하고 사회의 윤리와 양풍을 문란케 하고 있음을 진단하며, 종교계(기독교) 지도자들이 반성하고, 해결에 나서야 할 것을 지적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기독교 지도자는 일반 신도들의 신앙 훈련과 지적인 교양을 위해서 명확한 지도 원리나 이념을 지녀야 하며, 「기독교사상」이 이를 뒷받침할 것임을 밝혔다. 기독교의 복음진리를 올바로 파악하여 생의 목적과 생활 이념을 지도하는 현실의 산 힘이 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 복음을 해석하되, 편견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입장을 공평하게 해석하고, 세계교회와 보조를 같이하여 기독교의 세계화운동을 이끌 것을 천명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사회참여 활동 의지를 밝히며,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는 진보적 입장에서 기독교 복음을 해석하여 사상의 불안정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이 사회 문제 해결의 방안이 되게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1960년대는 한국신학의 개화기이며, 「기독교사상」 시대로 표현된다.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겨우 신학에 눈을 떴고, 1940년대 이후 제2차 세계대전, 8・15 해방과 독립 전후의 혼란, 6・25 전쟁에 의한 파괴와 혼란, 자유당 정권의 타락과 난맥 등으로 한국 문화가 발전할 수 없었다. 1960년대를 맞아 비로소 각 학문 분야와 함께 기독교 신학이 활발해지는 개화기를 맞이했는데, 「기독교사상」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기독교사상」은 기독교 연합기관에서 발행한 신학지였기 때문에 일부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 신학자들이 필자로 등장해 연간 60여 편의 신학적 논문이 발표되었다. 복음의 진리가 현대 한국에서 산 힘이 되게 하려는 창간 취지에 걸맞게 봉사하는 사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다산글방, 2003.)
편집진과 논조
「기독교사상」의 역대 주간은 초대 김천배(1957–)를 비롯해 김관석(1966–), 박형규(1968–), 유석종(1971), 유동식(1972), 장병일(1973) 순으로 맡았다. 김천배는 1959년 가을 광주YMCA로 가게 되는데, 이후 1966년까지 누가 주간을 맡았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창간 초기에는 외부 필자를 구하기 어려워 얼마 동안 편집위원들의 글이 많이 실렸고, 번역물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였다. 편집위원장은 창간부터 1969년까지 홍현설이 주로 맡았으며, 초창기 편집위원회 구성은 다음 표와 같다.
연 도 위원장 위 원
1957 홍현설 김하태 전경연 강신명 박창환 전영택
1958 홍현설 김하태 전경연 강신명 박창환 전영택 고황경
1959 홍현설 김하태 문익환 박창환 송정율 이종성 현영학
1960 홍현설 김하태 문익환 박창환 송정율 이종성 현영학 지동식 강원용
1961 김하태 홍현설 문익환 현영학 윤성범 강원용 박상증 장하구
1962 홍현설 지원용 장하구 문동환 조요한 손명걸 윤영춘 곽철영
1963 홍현설 지원용 강원용 정하은 한철하 지명관 곽철영 윤영춘 조요한
1964 홍현설 지원용 강원용 정하은 지명관 김용구 김찬국 이병설
1965 홍현설 지명관 한철하 정하은 김용구 김용옥 김찬국 이극찬
1966 정: 홍현설
부: 이종성 김용옥 한철하 정하은 지명관 김찬국 이극찬 김용구 김동수 조덕현
1967 정: 홍현설
부: 정하은 김용구 김용옥 도양술 민경배 지명관 박신오 박형규 오재식
1968 정: 홍현설
부: 김관석 곽선희 김경동 김용구 조종남 김용옥 민경배 박창환 오재식 조덕현 현영학
1969 정: 홍현설
부: 김관석 김경동 김용구 김용옥 김진만 민경배 한철하 홍동근 박봉랑 오재식 장성환 정진경 조덕현 지명관 현영학
창간호부터 50호(1962.1)까지의 집필자를 교파별로 보면(김정준, 1962.1, 50호 기념), 논설의 경우 감리교 26명, 기독교장로회 26명, 예수교장로회 13명, 성결교 1명, 기타 20명, 선교사 2명이다. 설교를 쓴 필자는 예수교장로회 11명, 기독교장로회 11명, 감리교 11명, 성결교 2명, 소속 불명 7명이다. 수필류를 쓴 사람은 감리교 12명, 예수교장로회 10명, 기독교장로회 10명, 소속 불명 6명이다. 서평을 쓴 사람은 감리교 14명, 기독교장로회 8명, 예수교장로회 5명, 소속 불명 6명이다. 감리교, 예장, 기장 소속의 필자가 대다수를 이루며 「기독교사상」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사상」의 논조는 미국, 정치권력,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1950년대 보수 성향의 기독교 교단지나 기관지에서 미국중심주의로 미국에 대해 긍정적인 논조를 보인 것과 다르게 「기독교사상」은 미국에 대해 긍정과 비판이 함께 나타나는 논조를 보였다. 먼저 미국의 자유와 사회정의에 대해 연대의식을 나타냈다. 미국의 자유란 신앙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며 사회정의를 실현한 힘이며, 자유분방한 차원이 아니라 신앙과 양심을 기반으로 외부의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된 자유이기에 「기독교사상」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보였다. 하나님의 공의를 제외하고는 모든 권위를 거부하였기에 신앙과 양심을 억압하는 모든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삶의 기반이 되는 사회정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정희 시대 이후 민주화와 인권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김세령, “1950년대 기독교 신문・잡지의 미국 담론 연구,” 「상허학보」 18집, 2006.)
기독교적 가치로서 자유와 관련하여 박신오는 “미국교회 목회수감”(1959.3)에서 “미국 자유의 분위기는 건국정신의 발로이고,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가두시위도 허용된다.”라며 “자유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과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소개했다.
미국(서양) 선교사가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냈다. 송정률은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사업정책”(1959.7)에서 “한국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사업을 현지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으로 실천하여 가는 경향이 아직도 뚜렷하게 보인다.”라며 “일부 선교사들은 생각과 행동이 이미 굳게 관습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대한감리회 출범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를 심히 꺼려하기도 하였다.”라고 지적했다. 김하태는 “한국기독교와 사상적 빈곤”(1958.1)에서 “70년 전 선교사들이 물려준 신학에 구속되어 그 윤곽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라며 “우리는 과거 근대화란 명칭 하에서 서양학문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고, 서양적 사고방식이 갖는 모든 약점을 그대로 기독교 내에 포함시켰다.”라고 비판했다. 김재준은 “한국교회의 신학운동”(1960.1)에서 “선교사들은 대학과 신학에서 훈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후계자인 한국 목사는 겨우 일반 교인보다 조금 높은 교육밖에 받지 못하게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라며 “한국적 신학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아직 나타난 것은 없지만, 한국의 신학도에게 좋은 과제”라고 밝혔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 변곡점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 및 1961년 5・16 군사정변과 관련하여 「기독교사상」은 권력의 탄압이 예상되는 상황임에도 여느 언론 매체와 달리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1960년 4・19 혁명 전후 및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기독교사상」은 자유당 정권과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했다. 4・19의 원인을 제공한 3・15 부정선거에 대해 「기독교사상」은 4・19 이전에 발행한 1960년 4월호에서, 야당계 선거운동원들이 대낮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한 것, 경찰의 총탄에 쓰러진 사건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우방국 미국 정부 관계자와 AP, UPI 등 외국통신의 부정적 평가도 소개하며, 데모를 폭력으로 억누르지 말고 민의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4・19 직후에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며, 독일에서 히틀러 독재에 대해 언론도, 대학도 침묵하고 교회만이 항거에 나섰는데,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독재에 항거했음을 높게 평가했다.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민주주의의 감시병이 되어야 할 것을 주문했다. 5・16 직후에는, “혁명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다. 더욱이나 군사혁명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혁명에서 오는 희생과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군사혁명은 군의 독재의 위험성을 내포하며 국민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군사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주로 표현한 글이었지만, 서슬 퍼런 군사정변 직후 잡지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매우 높게 평가할 일이다. 당시 다른 언론 매체들이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기독교사상」은 간헐적이지만 멈추지 않고 독재를 비판한 것이다.
「기독교사상」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와 관련하여 반공의 입장이었지만, ‘기독교=반공=미국=이승만 정권’이라는 도식적 인식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김정준은 지령 50호 기념호에서 “지난 5년간 나타난 논설이나 연구 중에서 공산주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본지가 금후 관심해야 할 또 하나의 제목인 줄로 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동식은 “기독교사상이 500호를 내기까지 공산주의에 대한 논문이 거의 없다.”라며 “기독교가 공산주의를 적대시해 왔고, 민족적으로도 그래 왔는데 이를 보면 너무 무관심해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독교사상」에는 창간 후 2000년 12월호 제504호까지 1만 2,245건의 글이 게재되었는데, 공산주의를 직접 제목에 언급한 글은 모두 15건이다. 이 중 4건은 221호에, 3건은 126호에, 2건은 302호에 각각 게재되었다. 물론 글에 공산주의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것도 있지만, 제목에 직접 공산주의를 언급한 글은 전체 글 중 0.12%이고, 504개 호 중 9개 호로 1.8%이다. 창간 10주년까지는 “콩고의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이장식, 1961), “에큐메니칼 운동과 공산주의”(정하은, 1963) 등 두 편 글의 제목에서 공산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사상」의 내용
「기독교사상」이 창간되던 1950년대 신문과 잡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텔레비전도 없었고 라디오조차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문과 잡지는 문화나 교양, 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 잡지의 논조는 보수적 경향과 진보적 경향으로 구분되었다. 교단지나 기관지 형식의 신문, 잡지의 논조는 보수적이었고, 주류 기독교에 대해 비판 의식을 가진 이들이 만든 신문, 잡지에서는 진보 색채가 나타났다. 「기독교사상」은 적자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어려움이 없었기에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고 독립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김세령, 2006)
「기독교사상」 제50호(1962.1)와 제100호(1966.9)를 기념하여 김정준은 각각 창간호부터 내용 분석을 하였다. 또한 창간 20주년 기념호(1977.8, 김경재)에서도 「기독교사상」의 내용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기독교사상」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창간호부터 제50호까지(1957.8–1961.11) 「기독교사상」은 사상의 불안정과 빈곤으로 인해 혼돈 상태에 빠진 사회와 교회에 기독교 복음진리로써 질서를 잡겠다는 창간 목적에 충실하였다. 제2호부터는 ‘특집’이라는 명칭으로 한국 기독교사회 안에서 문제가 되는 주제들을 찾아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다. 특집에서는 신학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신학(교육)의 문제로는 “성서”(1957.11), “종교개혁”(1958.10),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세”(1960.1), “근본주의 신학”(1960.2), “자유주의 신학”(1960.3), “신정통주의”(1960.4), “카토리시즘”(1960.5), “신학 교육의 재검토”(1961.7)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교회의 문제로는 “대학과 그리스도”(1958.2), “혼란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방향”(1958.8), “교회의 새 방향”(1958.12), “기독교 신앙과 평화문제”(1959.3), “농촌교회의 당면문제”(1959.6), “한국교회와 선교정책”(1959.7), “한국정변과 교회의 반성”(1960.6), “교회와 정치문제”(1960.8・9), “기독교 학교의 현재와 장래”(1960.10), “한국교회의 신앙 양상”(1961.6), “세계교회운동의 성격과 방향”(1961.10) 등을 다루었다.
글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논설 및 논문 94편, 설교 44편, 수필 및 만필 47편, 서평 66편, 세계 기독교 뉴스 50회, 종교시 15편, 시와 시인에 관한 글 8편, 문예시평 4편, 번역 소설 6회, 그달의 기도문 13편, 성구명상 6편, 성서연구 12편, 그 밖에 시감, 교양, 신학자 소개, 신학 용어 해설 등 10여 편 등으로 집계된다. 글을 쓴 필자별 횟수는 논문과 소감, 시평 외에 논설과 세계 기독교 뉴스를 매호 집필한 김관석이 가장 많고, 홍현설 39편, 강원용 20편, 문익환 19편, 전택부, 전경연 각각 17편, 박대선 16편, 김재준, 김용옥, 김철손, 장하구, 현영학, 김하태 각각 15편, 전영택, 유동식, 김찬국 14편, 문상희 13편, 윤성범, 송정률, 김정준, 김춘배, 임인수 각각 12편, 김천배 11편, 김우규, 박창환 10편 등이다. 5회 이상 10회 미만으로는 강신명, 고영춘, 김윤국, 마경일, 박봉랑, 박상증, 백리언, 이호운, 이환신, 임영빈, 임춘갑, 장병일, 조향록, 채필근, 태정학 등이 있다.
100호까지(1966.9)의 내용을 보면, 75개 호에서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으며 주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현실 비판과 파악, 자주성의 양성과 그 과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의식과 참여의 정신, 교파 간의 대화와 일치의 노력,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와의 대화와 유대의 필요성 강조 등이다. 아울러 기독교윤리, 한국교회 역사, 토착화신학, 성서신학, 현대신학 등을 다루고 있다.
1957년부터 1974년까지 「기독교사상」에 게재된 논문 1,894건을 분석하면(김경재, 1977.8, 20주년 기념호), 문화와 예술 5.3%(100건), 기독교와 시대정신 17.2%(325건), 출판 및 기타 3%(56건)이며, 나머지 74.5%(1,413건)는 신학 관련 내용이다. 창간 후 17년 동안 게재된 논문에서 대부분 신학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들어 「기독교사상」에 변화가 나타났는데, 특집 주제 229건(1981–2000)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논문과 특집은 성격이 다르지만, 중점 주제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집 주제의 구성을 보면, 사회 문제 23%, 신학 21%, 교회 17%, 민족, 통일, 평화 17%, 기타 22%의 순으로 나타났다. 사회 문제와 민족, 통일, 평화를 합하면 40%를 차지하며, 신학과 교회는 38%로 이전과 비교할 때 절반 수준으로 낮아진 것이다. 일반 사회적 쟁점과 기독교 관련 사안의 비중은 비슷하지만, 기타 영역을 포함할 경우 기독교 관련 특집의 비중은 절반에 못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을 주제로 한 특집도 “폭력으로부터의 해방”(1987.5)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상황과 아픔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는 「기독신보」가 1915년부터 1937년까지 1,482건의 사설 중 309건, 즉 20.9%를 사회적 문제로 다룬 것과 비교할 때, 1980년대 이후 「기독교사상」의 사회 관련 특집 주제는 거의 두 배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2000.8, 지령 500호 기념)
「기독교사상」은 처음부터 대중잡지가 아니었고,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이 읽는 것을 목표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세계적 신학의 흐름을 소개하는 한편, 한국적 신학을 제시하다 보니, 일반 독자들로부터 너무 어렵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고, 설교 재료가 되지 못한다는 목회자들의 원성도 있었다. 대학생들은 자기들과 관련된 글이 별로 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기독교사상」은 세계를 향한 한국교회의 얼굴이고, 한국 신학을 대변하며 세계를 향해 한국 신학을 말할 수 있는 신학잡지로서의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했다.(조만, 2000.8. 지령 500호 기념 대담) 또한 신학만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시대의 아픔을 성서적으로 해석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해왔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독교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저널리즘의 역할도 하였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검열, 정간 등의 탄압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기독교 복음의 진리와 힘으로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며 성취해가는 데 힘을 쏟아왔다. 창간 60주년, 지령 700호를 기념하는 「기독교사상」의 역할과 그 역사를 높게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다.
황우선 |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목원대학교 대학원에서 「기독신보」(1915-1937)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커뮤니케이션 현상, 종교저널리즘의 역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종교 공동체를 통해서 본 한국민주주의 원형”, “한국종교저널리즘의 진화”, “한국근대저널리즘 개척자로서 헐버트 연구”, “아프간 선교단체 피랍사건 보도에 나타난 편향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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