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법

3·1운동 100년을 준비하며,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

ree610 2016. 7. 28. 22:50

생명 세계의 거듭남을 준비합시다
  - 3·1운동 100년을 준비하며,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

 

1919년의 3·1운동은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학생과 시민을 비롯한 전 민족이 거족적으로 일어나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자손만대에 그리고 온 세계에 천명한 운동이었다.
3·1운동의 의의는 제헌헌법 이래 우리나라 헌법 전문(前文)에 자리매김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는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하면, 3·1운동 정신과 역사적 전통 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심정적인 계승이 아니라, 3·1운동과 그로부터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체제 하에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일본이 패전하였을 때 ‘대한민국’의 독립이 기정사실로 될 수 있었던 정치적·현실적인 배경으로서도 분명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각각 다른 역사적·신앙적 배경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천도교가 20세기 초, 이민족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땅에서 만나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고, 죽음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시위하고 투옥과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순국의 대열에도 함께하였다는 것은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는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순도 순국의 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해 준 당시의 지도자와 교인들의 후학이자 후예로서 오늘의 천도교, 기독교, 불교인들은 ‘피를 나눈 형제’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나라 종교계의 환경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부침과 격변을 거쳤고, 그것을 둘러싼 우리나라의 형편도 더없이 굴곡진 역사를 만들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어제의 천도교 자리에 오늘의 기독교가 서 있고, 그때의 기독교 자리에 지금의 천도교가 놓여 있음을 느끼며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수 없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1919년 당시 천도교는 자타가 공인하여 ‘300만 교세’(의무 실행자 200만 명, 당시 전체 인구 약 2,000만 명)를 구축하고 있었다면, 30여 년의 선교 역사를 기록하던 당시의 기독교(개신교)는 ‘겨우’ 20만 명 안팎의 교인 수였던 것이 지금은 정반대의 교세(그 격차는 더욱 크다.)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천도교 사이의 비교 문제가 아니라, 그 사이 우리의 국가와 사회 그리고 그 속의 문화와 시민(국민)의식의 대격변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통계수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필자가 하고자 하는 ‘3·1운동 100년을 준비하며,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라는 주제하의 이야기도, 그러한 변화를 기본 전제로 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오늘 현재의 기독교의 형편에 대한 구구한 이야기는 필자보다 독자들이 더 여실히 알고, 또 느끼고 있을 터이므로, 필자는 다만 100년 전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했던 그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한 번 ‘신천지 신세기’로 나아가는 동반자로서의 길을 모색하자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3·1운동 시기까지의 천도교 역사
3·1운동 당시 천도교는 탄생한 지 겨우 60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종교’였다. 1860년, 경주시 서쪽의 구미산 계곡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에서 당시 37세이던 수운 최제우 대신사(水雲 崔濟愚 大神師, 1824-64)가 한울님으로부터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을 시작으로, 천도의 진리를 대각(大覺)하고 이를 정리하여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다.
그로부터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60년 동안 동학은 창도주인 수운 최제우와 2세 교조(敎祖)이신 해월 최시형 신사(海月 崔時亨 神師, 1827-98)가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잇달아 순도(참형과 교수형)하고, 영해교조신원운동(1871)과 동학농민혁명(1894) 등에서 수십만 명의 도인(道人=敎徒)들이 순도 순국하는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해월 선생의 뒤를 이어 3세 교조가 되신 의암 손병희 성사(義菴 孫秉熙 聖師, 1861-1922)가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는 이름으로 선포(宣布)하면서 그때까지 비합법적이며 전근대적인 신앙공동체·수행공동체인 동학을 근대적 ‘종교’의 틀로 개편하였다.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반란’(反亂)이었던 동학농민혁명과 갑진개화혁신운동(1904)의 주체로서 모진 탄압을 받으며 지하로 잠복할 수밖에 없었던 동학도인들은 ‘천도교’라는 근대적인 종교 체제 아래 재결집하였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잠시 혼란을 겪었으나, 천도교는 곧 저력을 발휘하여 보성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 기관과 각급 학교를 인수 운영하거나 지원하였고, 「만세보」와 같은 일간 신문이나 「천도교회월보」 같은 월간지를 비롯한 각종 교서(敎書)를 간행하면서 민중 교화와 계몽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천도교의 활동에 ‘기대’를 가진 민중들이 속속 천도교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 민족의 진로를 고심하던 민족주의적인 신구 지식인들이 잇따라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그들 명망가를 따라 또다시 수많은 일반 민중들이 가세함으로써 1919년 무렵 천도교는 호왈(號曰) ‘300만 교단’이라는 당시 국내 최대의 종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천도교 성장의 역사는 기독교의 대부흥운동(1907) 이후의 폭발적인 성장과 비견할 수 있다. 다만 그 저변이 훨씬 광범위하였던 관계로 천도교의 성장력이 기독교에 비하여 훨씬 폭넓었을 뿐이다. 이러한 교세는 천도교가 기미년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3·1운동 준비와 천도교, 기독교의 만남
천도교는 창도(1860) 당시부터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핵심적인 과제로 내세운 종교이다. 보국이란 ‘나라’의 정치를 도와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함을 의미하며, 안민이란 사람(백성)들을 교화하여 영적인 성숙과 정신적·물질적 안녕을 누릴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국안민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무상(無上)의,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창도 이래 동학 천도교인들은 보국안민을 위한 활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민권의식과 민지(民智)의 성장 확산을 두려워한 조선왕조의 탄압에 의해 수십만의 희생자(순도)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1910년의 한일강제병탄은 천도교단으로서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정의롭지 못하며 나라와 백성들을 질곡(桎梏)에 빠뜨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의 시정을 위한 즉각적인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당시 천도교의 교주(敎主)인 의암 손병희는 한일병탄 직후에 교단의 주요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내 10년 안에 나라를 찾으리라.”는 결심을 밝혔다. 이를 위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를 운영하는가 하면, 시 외곽(오늘의 강북구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이라는 학사(學舍)를 지어놓고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을 불러들여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대의(大義)를 위한 길에 나설 수 있는 신념과 영성을 기르는 수행을 정려(精勵)하였다. 1912년부터 3년여에 걸쳐 483명의 지도자들이 49일 동안의 용맹정진 수련을 통해 이신환성[以身換性: 육신의 관념을 성령(性靈) 관념으로 바꾸어 죽음을 초월함]의 도력(道力)을 갖추고 고향으로 돌아가 현지의 교인들을 결속시키며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세계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국내외의 독립운동 준비 세력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천도교의 교주인 의암 손병희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지도부의 핵심 세력인 최린, 권동진, 오세창은 상해 쪽의 독립운동 세력, 일본에서의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또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전 민족적인 3·1운동의 전개를 모색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탄 이후 국내의 결사(結社)들은 종교단체를 제외하고는 전면적으로 해산된 상태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조직적인 만세 준비는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도 했다.
기독교 계통에서도 1919년 초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서울의 선우혁 등이 이승훈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협의한 것을 시발로 주로 서북지역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준비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월 초순부터 천도교 측과 연합 추진이 되기 시작하였고, 이승훈 선생이 여러 가지 이유로 천도교와의 연합을 망설이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독려하여 민족적 거사의 성공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청년회를 매개로 해서 학생 대표들과도 연합하기에 이르렀다. 또 2월 말경에 한용운 스님이 앞장서서 백용성 조사까지 합세하게 됨으로써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대연합전선이 완성되었다.

3·1운동 성공을 위한 최적의 조합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모이고, 탑골(파고다)공원에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시작함으로써 민족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족적·거국적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1운동 3대 원칙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생명·평화 사상을 반영한 운동의 기본 방침으로서, 절대적인 무력으로 한반도 전체를 압도하던 일본제국주의에 맞서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독립선언을 확산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최적의 방침이었다. 현재 시중에는 민족대표들이 합의하고 내세운 이러한 3대 원칙의 ‘불철저함’을 비판하는 입장도 있고, 3·1운동의 실제 전개 과정에서 시위 참여자들의 ‘자발적·불가항력적’인 ‘(긍정적 방향으로서의) 폭력투쟁’이 많았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사망자 7,000여 명을 포함한 수만 명의 체포, 구금, 부상자 등을 거론하며 3·1운동의 성격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으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의 의병 투쟁 당시,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의 숫자, 그 당시의 무력 쟁패 상황 등을 볼 때, 3·1운동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채택한 3대 원칙은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노선이었다. 이러한 노선을 채택하는 데서 종교인들의 의기투합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 과정에서 기독교 특유의 평화 애호 정신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사실 당시 천도교 일각에서는 무력 투쟁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고, 천도교단과 해외 무장독립세력과의 연계설도 나돌아 최종 단계에서 기독교-천도교의 연합이 와해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생장(生長) 배경과 지향이 판이하고, 현실적인 세력 분포가 크게 차이 나는 세 개의 종파가 한자리에 모여 죽음으로의 길을 함께하기로 서명하는 데까지 우여곡절이 없을 수는 없었다. 준비 과정에서의 숱한 곡절은 무력항쟁 여부를 둘러싼 설왕설래, 그리고 ‘독립선언’과 ‘독립청원’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 이어, 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들의 순서를 정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서로 자신의 종단 지도자들 이름이 앞자리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남강 이승훈 선생은 “순서는 무슨 순서, 죽을 순서라면 내 이름부터 올리시오!”라고 말함으로써 최후의 베일마저 걷어내고 말았다. 3·1운동은 사실 이 순간에 완성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가야 한다는 확신은 모두가 한결같았으나 여전히 자기중심성의 인정(人情)을 떨치지 못했던 민족대표들이 이 마지막 말로써 광명(光明)의 신세계로 해탈(解脫)하는 희열 속에서 그날 그 시각, 태화관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처럼 3·1운동 준비과정의 숱한 고비들은 각 종단들이 각자의 입장을 한 발 또는 두 발씩 양보하고 서로 대승적인 결단을 내림으로써 넘어설 수 있었다. 이는 각 종단에 손병희, 이승훈, 백용성과 같은 압도적인 권위(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창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종단(천도교)과, 그리고 이 땅에 닻을 내린 연한이 그보다도 더 일천한 종단(기독교)이 창도 근본 정신, 본래의 선교 사명을 망각하지 않은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도교의 경우는 교단 차원에서 결의가 있었고 ‘교주’(敎主-손병희)가 직접 앞장선다는 조건이 구비된 반면, 기독교의 경우는 교리적·신앙적 특성 때문에라도 ‘이교도’(異敎徒)와 함께 대사를 도모한다는 것이 더 고뇌에 찬 결단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민족대표들은 그 깊은 고뇌를 ‘기도’로써 극복하고 3·1운동을 성사시켰다. 즉 대의명분과 신앙적 순결성 사이의 모순에 대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한 끝에 “4,000년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민족대표 기독교 대표 중 신석구의 회고) 하는 음성을 듣고 최종 합류를 결심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천도교-불교의 연합으로 일어난 3·1운동의 내재적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3·1운동은 우선 보기에는 민족 대 민족의 관점에서 압제에 놓인 한민족이 일본(민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대결적이며 투쟁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지만, 독립선언서 등에서 드러나는 정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좀 더 본질적으로는 일본(민족)을 적대시하거나 배타하는 운동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적 맹목(盲目)을 개안(開眼)시키고, 무지몽매를 계몽하여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평화를 구축(構築)하고자 하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신천(新天), 신지(新地), 신인(新人) 사상과 비전을 실현하는 종교운동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다시 선언문에서 당시의 민족대표들은 ‘우리의 행동은 인류 평화를 위한 것’이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당당히 표명하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3·1운동이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불교계와 연대하고, 학생과 시민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전개된 것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에서 최적의 조합이었으며, 최선의 선택이었고, 최고 최대의 민족적 역량의 결집 방식이었다. 천도교단은 300만이라 일컫는 거대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이 국내에만 집중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 한계를 극적으로 돌파하게 한 것은 선교사 등을 매개로 세계 전역에 연락망을 갖추고 있던 기독교가 동참한 것으로, 이는 참으로 절묘한 조합이었다. 특히 당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내공은 대부흥운동의 성과 덕분으로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데, 이는 교인 숫자가 천도교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3·1운동의 결과로 순국하거나 체포 구금된 기독교인의 숫자가 천도교인을 상회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다만 이 통계는 전체 참여자의 일부만을 대상으로 조사된 한계가 있다.)
3·1운동 당시 일본군에 의해 학살 참극이 벌어진 수원 화성의 제암리교회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선교사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기독교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내·외국인들이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 3·1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사례이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와 인근의 고주리(천도교인 일가족 몰살), 그리고 그 이전에 인근의 수촌리 등에서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고, 그 대가로 함께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잘 아시다시피 제암리교회 안에서는 그 마을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함께 희생되었다.)
이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일 뿐,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개된 대부분의 시위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거나 연대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어갔다. 즉 3·4월 사이 전국적으로 주동자가 밝혀진 340여 차례 시위 가운데 기독교인이 주동한 시위가 78회, 천도교인이 주동한 시위가 66회,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한 시위가 42회로 이는 전체 시위의 절반을 상회한다. 또한 그해 말까지 구속 수감된 약 2만 명의 수감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17%, 천도교인이 11%를 점하여, 모두 합쳐 28%가 되는 데서도 기독교와 천도교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연말까지, 그리고 해를 넘겨 192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에 분포한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과 기관(교당, 교회)이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3·1운동은 ‘민족종교’로서 창도되고 고난 속에서 ‘후천개벽’의 길을 모색해온 신생(新生) 종교 천도교가 ‘민족의 종교’로 성장해 가는 도정(途程)의 신진(新進) 종교 기독교와 결합하면서 피워낸 민족사의 꽃이자 세계 민족운동사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한국의 천도교, 기독교, 불교 각자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영적으로 심화하고, 현실세계와 더욱 밀착하게 하며, 역사를 아울러 당당한 면목을 세우게 함으로써 한반도라는 땅과 그 위의 하늘 사이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하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한 은총이기도 하다.

다시 초심으로-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며
3·1운동이 즉각적이고 명백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었다. 3·1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만주를 중심으로 한 무장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으며, 전 세계에 조선 독립의 필연성을 심어줌으로써 전후에 조선의 독립을 전제로 한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 기독교-불교-천도교의 연합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의 전개라는, 인류 역사상(歷史上) 희유(稀有)의 대역사(大役事)를 경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세계적으로 ‘종교 간 평화의 모범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던 결정적인 계기도 바로 기미년의, ‘피로써 다진 경험’의 결실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조선통치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하여 국내에서의 천도교와 기독교의 민족운동 노선도 전면적인 항쟁에서 계몽주의와 실력양성론으로의 선회가 일어난다. 이는 천도교와 기독교의 ‘신앙 행태’의 변곡점을 이루는 계기도 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 말기의 굴곡(屈曲)의 역사마저 거치게 된다. 이는 3·1운동과 그 이후의 민족운동에 투신한 천도교와 기독교가 치러야 하는 목숨보다 큰 희생이기도 했다.
기독교는 광복 이후의 한국사 전개 과정에서 숱한 고난들을 특유의 신앙적 결집력을 발휘하여 극복하였고, 몇 차례의 대부흥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전후 기독교의 내적으로 다져진 선교 역량이 기반이 되었고, 대외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흐름에 모두 효과적으로 대응한 덕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장세가 너무도 가팔랐던 만큼 그로 인한 성장통 내지 부작용이 뒤따른 것도 사실이다.
그 기간 동안 천도교는 분단과 남북 교세의 단절(분단 당시 천도교의 교세도 대부분 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기독교의 주축 세력이 월남한 데 비하여, 천도교인들도 다수 월남하기는 하였으나, 그 주축/주력은 여전히 북쪽에 남아 있었다.)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남북 간의 상쟁 이후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흐름 속에서 급격한 교세 위축을 겪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맞이하게 되는 3·1운동 100주년은 천도교는 물론 기독교에도 중대한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믿는다.
천도교단은 몇 년 전부터 3·1운동 100주년 준비에 대한 교단 내부의 논의를 거쳤고, 3년 전에 100주년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천도교는 3·1운동 100주년의 기본 방침을 첫째, 100년 전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천도교 독자적인 기념사업이 아니라,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아우르는 범민족적인 차원으로 전개한다는 것으로 정하였다. 둘째, 1919년의 3·1운동의 과제가 민족의 독립과 민족자주정신의 함양이었다고 한다면 100주년을 맞이하는 3·1운동 100주년의 과제는 민족의 통일과 생명평화정신의 고양과 확산이라는 데에 착안하였다. 셋째, 100년 전의 3·1운동 전개는 교세의 폭발적인 증가(천도교는 1905년부터 1910년대 중반 사이에 10배 넘는 성장을 기록하여 300만 교도를 구가하였다.)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으나 2019년의 3·1운동 100주년은 ‘성장사회에서 성숙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환경 속에서 맞이하게 된다는 점을 유념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는 우리 사회의 주류 종교로서 준비 과정이나 전개 과정에서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의 상당 부분을 감당하는 것은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의 종단을 아우르고 배려하며 대등한 입장에서 연대함으로써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민족적 성화(聖花)를 꽃피웠다. 오늘날 그 역할의 대부분은 기독교로 넘어가 있다. 우선은 교세의 측면에서 당당히 그러하고, 해방 이후 혁혁한 민주화운동에서의 역할, 사회활동이나 교육운동에서의 공로 등 이력과 공적으로 보아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담당할 요건을 갖추고 남음이 라 하겠다.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적실하게 준비하는 것은 기독교가 광복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대성장 과정에서 답습하였던 부정적인 성향과 경향과 행태를 씻어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변곡점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천도교가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며 기독교에 바라는 바는 이처럼 ‘단순하고 당연한’ 사항이지만, 그 실천과 실현이 녹록한 것만은 아니다. 몸집이 커진 만큼 기독교 내부의 목소리는 다양다기(多樣多岐)하고, 성향과 지향은 복잡다단하여 이를 한두 가지의 처방으로 전환케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도교는 물론 기독교 또한 ‘총인구 감소, 종교인구의 경향적 감소’라는 외적인 조건과 ‘민족통일의 달성’과 ‘환경위기와 물질문명의 대전환’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앞에 두고 맞이하는 3·1운동 100주년을 결정적인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교단 자체로나 민족(국가)적 상황 모두가 심각한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은 과거를 지향하고 자랑하는 복고적인 사업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 100년을 전망하고, 종교계의 향후 100년 방향을 모색하며, 한국 사회가 인류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새로운 동력을 마련하며, 무엇보다 죽음 지향의 문화를 생명 지향의 문화로 돌려세우는 중차대한 과업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참여와 대승적인 결단이 없이는 이러한 과제를 성취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3·1운동 100주년을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치러낸다면 천도교는 물론 기독교 또한 내부적으로 고질화된 갖가지 병증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치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각 교단의 손익을 따지지 않고, 교단 차원의 운동 방향의 골간마저 양보하며, 나아가 교리적·의례적 정체성 훼손마저 감수하면서 대단결의 노선으로 일원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구구한 논리로써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와 천도교에 요구되는 자세와 각오도 그와 같다는 점은 서로의 입장이 상전벽해가 된 만큼 더욱더 분명해 보인다. 교단 차원으로 볼 때, 기독교의 경우 근본주의적 신앙 행태나 ‘물량주의’를 극복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신앙세계를 구축해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고, 천도교의 경우 노쇠하고 한미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교단의 상황을 극복하며 제2의 현도(顯道)를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두 교단의 과제를 극복하는 것은 단지 두 교단의 이해(利害)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 해결을 위해서나 생명평화세계 건설이라는 보편적인 과제 달성을 위해서나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필자는 두 종교가 다시금 ‘그때 그곳’에서처럼 서로 연대하고 유무상자(有無相資)할 때, 그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믿는다.
130여 년 전, 한국교회의 선각자들은 우리나라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임하며 이 땅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미처 자리를 잡기 전인 기미년에 각 교단의 전력을 기울여 민족적·동아시아적·인류적 과제 앞에 헌신하였다. 무엇보다 현대 한국교회의 내부에는 ‘기독교계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수많은 성직자와 교인들이 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130년 전 이 땅에 첫발을 내딛던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나라의 ‘빛과 소금’으로서 정좌(正坐)하는 길을 모색하고, 100년 전 기미년 당시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민족사의 ‘빛과 소금’으로 헌신(獻身)하는 길을 걸음으로써 또 한 번의 생명 세계의 거듭남(復活)을 함께 이룰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박남수 | 전 천도교 교령으로서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과 한국종교연합(URIKorea) 상임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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