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핵 이후, 극우 출현의 구조적 맥락에 대해
드디어 탄핵이다. 온갖 ‘기술’이 난무했지만, 법은 결국 민주시민을 선택했다. 손바닥에 ‘왕’자를 새겨넣은 자의 권력 독점 욕구는 ‘길을 잃었다.’ 물론 친위쿠데타 공모자들의 촘촘한 그물망은 아직 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길 잃은 자가 제 것이라 주장하던 ‘용상’으로 되돌아오는 게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탈선한 자는 훨씬 더 많이 헤매야 겨우 돌아올 수 있겠지만, 민주시민은 더 많은 방어 수단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 Institute)의 내년도 보고서에선 한국을 매우 길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 같다. 21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퇴조 분위기가 역력한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새로운 출구,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으로. 실제로 《뉴요커》(The New Yorker), 《타임즈》(The Times), 《가디안》(The Guardian) 등 세계 유수의 매체들이 탄핵 인용 보도를 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democratic resilience)에 깊은 찬사를 보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던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한국 민주주의가 왜 단단한지를 시사한다.
말했듯이 21세기 이후 퇴조 기운이 역력한 서구발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암세포처럼 자라난 세습권력의 카르텔은 절망계층을 크게 확산시켰다. 이는 절망을 분노로 번안해내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들에겐 기회의 장이 되었다. 더 약한 타자를 향한 증오의 정치가 절망계층 다수를 열렬한 지지자로 포획했고, 변혁을 추구하는 많은 엘리트들이 극우파로 전향했다. 과거엔 변혁을 갈망하던 이들이 혁신정치를 부르짓는 진보정치의 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데 이제 과거의 혁신정치는 체제내화되었다. 물론 그 현상은 ‘더 많은 복지’,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 절망계층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고, 과거의 혁신정치가 이 현상을 제지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은, 혁신가들 다수가 극우화되는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 온라인 기반의 뉴미디어는 빛의 속도로 증오의 정치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제 광폭해진 증오라는 거대한 해일은 민주주의가 구축한 방파제 곳곳에서 균열을 내버렸다.
한국이라고 다르겠는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야말로 무방비로 노출된 세계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구조적 위기를 반전시킬 기반을 거의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극우 포퓰리즘적 독재체제를 꿈꾸던 정치인은 법에 의해 탄핵되었다. 비결이라면, 한강 작가가 말한 ‘죽임당한 이들’과 산 자가 공존, 공생하는 ‘살림’ 기조의 민주주의가 하나의 아비투스로 우리 신체에, 정신 속에 잔류한 덕이 아니었겠는가. 요컨대 권력욕구로 무수한 희생자를 낳았던 자에게 죽음으로 맞서면서 이겨냈던 기억의 정치는 그만큼 강력했다. 넘실거리는 독재의 욕구를 퇴각시킨 대중의 승리의 기억 말이다.
1년 전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는 한국을 독재화로 이행하고 있는 국가(a country moving towards autocratization)로 평가절하했다. 한데 말했듯이 내년도 보고서에선 아마도 21세기 세 번째 10년대에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국가로 재평가할 거라는 논의가 국내외적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평가에서 생략된 것이 있다. 절망계층의 분노의 목소리를 진정시킬 수 있는 구조적 해법을 우리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마 피케티가 지적한 21세기적 세습자본주의는 한국에서 어느 장소를 진원지로 하고 있을까. 전광훈과 그의 대중은 그런 권력세습의 변두리에 있는 이들 다수가 결속한 정치종교 분파에 지나지 않다. 해서 그들의 극우는 위험하지만, 그 위험을 봉쇄하는 것이 극우화에 대한 충분한 해법일 수 없다. 그보단 세습 권력의 카르텔을 발견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찾는 게 좀 더 충분한 해법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세습 카르텔의 아성이 강남권 대형교회 현상과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상위권 계층 수만 명이 매주 모이는 곳, 더구나 그 모임은 수십 년 이상 계속될 것이기에, 그 장소성은 그야말로 극강의 친밀성의 네트워크 체계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사회 파워엘리트 연구에서 40.3%가 개신교 신자였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이들 강남권 대형교회에 집중되어 있다. 친밀성의 네트워크는 기회의 편파성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이런 계층적 권력 카르텔은 절망계층을 양산하는 구조적 배후일 수 있다. 아니 매우 결정적이라는 것이 현대 극우주의 연구의 일반적 해석이다. 한데 한국에선 그런 권력 카르텔이 강남권 대형교회 현상과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권력세습의 욕구, 그 견고한 접속을 해체시키는 ‘다른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윤석열 폭정종식 그리스도인 모임 제28차 시국논평 (2025. 4. 8.)
-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 민중신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