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할머니: 팜티호아(Phạm Thị Hoa: 1928〜2013) 할머니는 베트남 중부지방 꽝아이 성(省)에 있는...

ree610 2025. 1. 22. 10:16


  팜티호아(Phạm Thị Hoa: 1928〜2013) 할머니는 베트남 중부지방 꽝아이 성(省)에 있는 아름다운 바다 곁 하미 마을에 사셨다. 1968년 초 이 동네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로 목숨은 건졌지만 두 발목을 잃으셨다. 다낭에 머슴살이 간 아들은 학살에 비켜 있었다.
아들이 자란 뒤 아들 내외와 함께 죽 사셨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꽝아이 성에서 오랫동안 사죄의 진료를 하였는데, 진료 갈 때마다 하미 마을의 팜티호아 할머니를 찾아 학살 증언을...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할머니

팜티호아(Phạm Thị Hoa: 1928〜2013) 할머니는 베트남 중부지방 꽝아이 성(省)에 있는 아름다운 바다 곁 하미 마을에 사셨다. 1968년 초 이 동네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로 목숨은 건졌지만 두 발목을 잃으셨다. 다낭에 머슴살이 간 아들은 학살에 비켜 있었다.
아들이 자란 뒤 아들 내외와 함께 죽 사셨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꽝아이 성에서 오랫동안 사죄의 진료를 하였는데, 진료 갈 때마다 하미 마을의 팜티호아 할머니를 찾아 학살 증언을 들었다.

갸름한 얼굴, 순백의 머리칼, 부드러운 주름, 선한 눈매, 이가 없어 합죽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입술…모진 세월을 기어코 견뎌내신 모습치고는 너무나 고운 얼굴이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멘트 마당에 모두 앉았고, 할머니는 두 무릎을 세우고 앉으셨다. 그제야 할머니의 두 발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왼쪽 발은 없고 복숭아 뼈 아래 부분이 납작하게 발목보다 넓어져 있어 발을 대신하고, 오른쪽은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있어 플라스틱 발목을 끼우고 계셨다.

할머니 집 앞에는 20m 넘게 보이는 야자나무가 몇 그루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 나무를 가리키며‘내 손자가 있으면 저 나무에 올라 야자를 따 너희들에게 줄 것인데 손자가 공부하러 도시에 나가 그럴 수 없으니…’란 말씀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우리를 제대로 대접 못함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왜 한국 군인들이 우리 온 동네 사람과 내 가족을 다 죽이고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란 원망의 얼굴에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그러나 금방 웃음을 지으며 “너희들의 잘못은 아니야. 그럼 아니지. 너희들은 여기 자주 놀러와. 다음에는 내가 잘해 줄게”
헤어질 때 무슨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꼭 껴안아주시면서 합죽한 입술로 우리 뺨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며 무언가 말씀하셨다.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하다가 기어코 카메라 뷰파인드에 눈물을 얼룩지우고 말았다.

할머니를 만난 그날 저녁 우리 숙소에서 베트남 최고문인상을 두 차례나 받은 탄타오(Thanh Thảo; 1946〜)시인이 자신이 겪은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우리에게 강연하셨다.
할머니가 헤어질 때 우리 뺨에 대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구수정 선생이 통역했다.

『제가 아까 통역을 하면서 오늘 할머니가 저희를 보시면서 “또이꽈”, ‘또이꽈’란 말씀을 계속 하셨어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너희들이 이 멀리까지 찾아오니 불쌍해서 어떡해. 너무 불쌍해. 불쌍해." 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탄타오 선생님께 전달해드렸는데요. ‘또아꽈’의 의미에 대해서 탄타오 선생님이 더 깊게 설명해주시고 싶데요.
이것은 ‘불쌍하다’라는 표현이 맞지만, 여기 이 중부지방의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표현할 때 ‘또이꽈’ ‘또이꽈’라고 표현한다는 거예요. 이 표현 속에는 불쌍한 것 보다는 할머니의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탄 타오 시인의 말씀입니다. “제가 전쟁전선에 나갔을 때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보다 더 어린 병사였을 겁니다. 그 때 이 중부지방 가난한 마을에 가면 북에서 내려온 저 같은 병사를 재워주고 밥 먹여주는 어머니들이 계셨는데 그때 저희만 보면 ‘또이꽈’ ‘또이꽈' 하셨어요. 너무 젊은 나이에 전쟁에 나가는 우리들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말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애정의 표현이예요. 저는 이제 세월이 지나 늙었지만 그 말의 어감. 그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이꽈’처럼 따뜻한 체온이 담긴 말이 얼마나 있을까?

할머니 말씀에서 증오를 넘어선 순수한 용서를 가득 담은 영혼을 느꼈다. 우리말에도 ‘또이꽈’ 만큼 마음을 듬뿍 담은 말이 있다. 바로 ‘고맙다’란 말이다.
어느 국어학자가 ‘감사’란 말은 정중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고 ‘고맙’이란 말은 그냥 구어체로 쓴다고 하였는데 이런 해석은 무식의 극치다.
물론 ‘감사하다’와 ‘고맙다’는 비슷한 말로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는 사전의 정의는 거의 같다.
‘또이꽈’가 불쌍하다를 넘어 진한 사랑을 담고 있듯이 ‘고맙다’도 서로 주고받는(give & take)란 범주를 넘어 어머니 마음 같은 사랑을 담은 말이다.
옆 집 철수와 영희가 어릴 때는 비행을 저지르고 이웃 부모 속까지 썩이더니 커서는 의젓한 신사숙녀가 됐다는 소문을 들을 때 어머니들께서는 ‘잘 자랐다구? 그래,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도 남의 잘된 모습이나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고맙다’란 표현을 옛 어른들은 쓰셨다. ‘고맙다’는 어머니 마음처럼 한없이 깊고 따뜻한 말이다.

나도 이젠 70살,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는 늙은이가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번 ‘계엄사태’ 이후 몇몇 현상이 나를 기쁘게도 하고, 실망의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한남동 얼어붙은 보도블록에서 눈 맞으며 밤을 꼬박 샌 은박 키세스 젊은이들과 서부지원에 난입한 서북청년단 후예 같은 백골단 젊은이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늙은이를 좋은 의미로 ‘원로’라고 한다.
백골단 젊은이들을 저지하고, 은박 키세스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게 진정한 늙은이 곧 원로가 아닐까?

나는 ‘원로’가 되고 싶다.
고마운 젊은이에게 지갑을 열고 입을 다무는 그런 늙은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