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10월 20일(창조절 8주) 주일 설교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ree610 2024. 10. 16. 09:02

10월 20일(창조절 8주) 주일 설교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글쓴 이: 조헌정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지구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반다나 시비)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욥 38:1-7, 34-41; 시 104:1-9, 24, 35c; 히 5:1-10; 막 10:35-45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욥기 38:1-7, 34-41}

1 그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7 그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고, 천사들은 모두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다.
34 네 소리를 높여서, 구름에게까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 구름에게 명령하여, 너를 흠뻑 적시게 할 수 있느냐?
35 번개를 내보내어, 번쩍이게 할 수 있느냐? 그 번개가 네게로 와서 "우리는 명령만 기다립니다" 하고 말하느냐?
36 강물이 범람할 것이라고 알리는 따오기에게 나일강이 넘칠 것이라고 말해 주는 이가 누구냐? 비가 오기 전에 우는 수탉에게 비가 온다고 말해 주는 이가 누구냐?
37 누가 구름을 셀 만큼 지혜로우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여서 비를 내리고,
38 누가 지혜로워서, 티끌을 진흙덩이로 만들고, 그 진흙덩이들을 서로 달라붙게 할 수 있느냐?
39 네가 사자의 먹이를 계속하여 댈 수 있느냐? 굶주린 사자 새끼들의 식욕을 채워 줄 수 있느냐?
40 그것들은 언제나 굴속에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덮친다.
41 까마귀 떼가 먹이가 없어서 헤맬 때에, 그 새끼들이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조를 때에, 그 까마귀 떼에게 먹이를 마련하여 주는 이가 누구냐?

[신학적 관점]
창조주 하느님을 재확인하는 신정론(theodocy) 신학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신이라 하더라도 정의의 신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욥으로서는 여전히 불만이다. 물론 정의의 관점을 인간중심이 아닌 만물(지구)중심으로 할 때, 전혀 다른 답을 낳는다.

[목회적 관점]

신이 욥의 정당한 질문과 불만을 이런 식으로 추궁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예를 들면 교인들이 목사를 비난할 때,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 아시나요?”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만을 말할 때, “우리가 너를 낳고 기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라는 식의 반문은 타당한가? 본문에서 언급된 일들은 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 아닌가?

[주석적 관점]

1절에 등장한 신은 ‘엘 샤다이’의 전지전능하신 힘의 신이 아니라, 약자를 편들고 돌보시는 YHWH이시다(1절). 폭풍과 번개를 움직이시지만, 이는 수탉과 굶주린 사자 새끼와 까마귀 떼를 돌보는 신이다.

[설교적 관점]

욥기의 클라이맥스이다.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욥의 질문에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YHWH는 화난 자녀를 달래는 사랑스런 부모의 모습이 아니라,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히려 ‘내가 일할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며 추궁하신다.

아장아장 이제 걸음을 걷기 시작한 한 살짜리 자녀가 밖에 나가넘어졌을 때, 그래서 아프다고 울려고 울먹거릴 때, 엄마는 이를 짐짓 모르는 채,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린다. 혼자 일어서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우리가 홀로서기를 원하신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성장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억울한 일이 일어난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손과 발이 없으시다. 우리가 그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은 개인의 정의가 아닌 사회 집단의 정의가 필요한 시대이다. 인간의 정의가 아닌 지구의 정의가 필요한 시대이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인간은 그저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다 사라진 하나의 우세한 종(種)일 따름이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마치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힌 욥이 당황하듯이 지금 인류는 당황하고 있다. 그럼에도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은 힘의 논리에 사로잡혀 전쟁을 지속함으로 인류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인간들아!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시편 104:1-9, 24, 35c}

1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야훼, 나의 하느님,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2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읍니다.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3 물 위에 궁궐을 높이 지으시고,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4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
5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읍니다.
6 깊은 물로 땅을 입히셨더니 산꼭대기까지 덮은 물결은
7 꾸짖으시는 일갈에 움찔 물러나고 천둥소리, 당신 목소리에 줄행랑을 칩니다.
8 물들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내려가 당신께서 정하신 그 자리로 흘렀습니다.
9 당신께서는 금을 그어 넘지 못하게 하시고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4 야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35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히브리서 5:1-10}

1 대제사장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을 수행하라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예물과 속죄의 희생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으므로, 무지해서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그 연약함 때문에, 그는 백성을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스스로를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심을 얻었습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신학적 관점]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신 앞에서 죄인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주체로서의 인간상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원죄(Original Sin)는 여전히 유효한 주장인가? 생태문명신학자 매튜 폭스 신부는 ‘원죄’ 대신 ‘원복(Orignal Blessing)’을 주장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성전 숙청 사건’과 ‘성전 휘장 갈라짐’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전통의 성전 제사라는 중개(broker) 신앙 체제(타력 구원)를 거부하고 신과의 직접 소통(자력 구원,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마 9:30)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명명(命名)은 잘못하면 예수의 기본 정신을 위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 또한 바로 그러한 중개 신앙 체제를 끊어내기 위함이었음을 강조한다.

[목회적 관점]

가톨릭은 신부만이 감당하는 칠성사가 있고,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 신부는 신을 대신해 용서를 선언한다. 개신교는 하느님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고 세례와 성찬만을 목사에게 위임된 성례전으로 인정한다. 신도들 가운데는 목사를 신부와 같이 여겨 자신의 기도는 효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목사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주석적 관점]

모세 오경의 아론 제사장 전통과 레위 지파 전통을 능가하는 의미에서 예수는 아브라함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보는 신비에 찬 멜기세덱(살렘/평화 왕, 창 14:18-20)의 전승에 서 있음을 지적하며(7:10-11)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았음을 강조한다(5, 6절).

[설교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따라 신과의 직접 소통을 믿는 믿음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중개자(혹은 중재자)로 믿는 믿음인가? 바울은 예수를 신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무는 화해자로 고백하고 있는데 중개 신앙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 기도 끝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말씀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영원한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세 전통에 의한 아론의 집안으로서의 대제사장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고난(epathen)을 통한 배움(emathen)’으로서의 ‘복종’을 강조하는 본문은 로마제국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황제숭배와 ‘복종’을 요구하는 신앙 핍박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에 그 근본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37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신학적 관점]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신학적 논의에는 분명 정치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본문은 종교적 관점이다.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와 ‘마시는 잔’ 곧 십자가 죽음을 단순히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물’로 해석하는 일은 성급한 결론이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고 불섶에 뛰어들었다면 이는 자살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예수는 분명 갈릴리 하느님나라 운동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예루살렘 성전 숙청 사건으로 인한 군중소요죄로 인해 고발을 당했고, 빌라도 총독이 주관하는 재판에서 십자가형이 선고된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부정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치범 곧 독립투사들을 처형하기 위한 극형 제도이다. 예수는 분명 정치적 이유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복음서는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독립항쟁 직후에 기록된 것으로 일종의 불온 문서에 해당한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은 기존의 유대교와는 구별되기를 바랐지만,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는 같은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정치적 탄압과 감시를 무마하기 위해 반로마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예수의 활동과 십자가 죽음을 종교의 색깔로 덧칠을 해야만 했다. 예수의 죽음을 인류의 죄를 대신한 대속물로만 이해하는 경우, 본 훼퍼목사의 지적대로 ‘값싼 은혜’ 구원론에 쉽게 빠지게 된다.

[목회적 관점]

목사들 또한 교회의 지도자로 앞자리에 앉는 일에 습관이 들고 섬김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일에 익숙해 있다. 교단 총회장이나 감독이 되기 위해 여러 추한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주석적 관점]

‘대속물(lytron, 몸값)’이라는 단어는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 20:28을 제외하면 제2성서 안에서는 유일하다.

본문은 예수(인자)의 십자가 죽음 예고와 제자들이 몰이해를 다루고 있는 세 번째 단락이다(8:31-9:1; 9:31-37; 10:32-45). 그런데 세 번의 경우 모두 예수는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로 대체한다. 왜 십자가 죽음 관련 발언에서만 ‘인자’가 예수를 대신하는가? 이는 본래 예수의 발언인가? 아니면 후대의 해석인가? 예수의 발언이든 후대의 해석이든 왜 십자가 죽음과 관련할 때만 ‘인자’라는 단어가 등장하는가?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인자 개념을 학문적으로 다루어 왔다. 역사적으로 예수 당대 유대인들에게 있어 십자가 처형은 다반사로 일어난 일이었지, 단순히 예수에게만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 아니었다. 예수 탄생 직전 나사렛의 가까운 도시, 갈릴리의 수도였던 세포리스에서는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이천 명의 주민이 십자가 떼죽음을 당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인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민중 사건으로 재해석한 용어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설교적 관점]

참된 지도자상에 대한 말씀이다.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욕은 명예욕, 재물욕과 함께 인간의 기본 욕망 중의 하나로서 당시 로마제국 고관들의 기본 통치 방식이었다. 동시에 예수 사후 마가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자유라는 미명 하의 서로 간의 ‘경쟁’은 지배자들이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반면 서로 ‘섬김’은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도록 함으로 결국 지배자들이 설자리를 잃게 된다. 하느님 나라의 기본 정신이다.

디아코니아(diakonia, 섬김)는 본래 초대교회에서는 애찬(성찬과 관련하여)을 할 때, 식사를 나르는 일을 뜻했고, 후에 집사(deacon)의 직임으로 변천되었다. 오늘날은 봉사, 구제는 물론 선교라는 의미까지 확대되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