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예레미야애가 1:12~22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찬송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Ⅱ.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음 (애 1:12-22)

ree610 2024. 10. 17. 16:45

예레미야애가 1:12~22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찬송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Ⅱ.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음 (애 1:12-22)

(1)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교회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여 말한다. 그녀는 모든 구경꾼들에게 호소한다.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12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와 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 빠질 떼 흡사 자기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쉽다. 만일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같이 섞어서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면 아마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오 주여 원래의 내 고통을 돌려 주시옵소서."

(2) 예루살렘은 고통을 주는 도구들 너머로 그 고통을 만드신 분을 본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12절). "여호와께서 진노의 날에 내게 대하여 노를 발하사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구나." 교회는 지금 열에 들떠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13절). 또한 그물에 엉키어 있는 것같다. 그 그물은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 더 엉켜 들어가는 그물이다. 그녀는 적막한 광야에 있는 자처럼 되었다.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며 의지할 것이 없나이다." 그녀는 멍에를 멘 자처럼 되었다. 그 멍에는 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통의 멍에였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14절). 그리스도의 계명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마 11:30). 그러나 우리가 범죄함으로 묶인 멍에는 무겁고 힘들다. 양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하여 우리를 묶는다. 그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이 우리에게 멍에를 씌우사 묶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멍에를 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의 손 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는` 분이시다(15절). 그 성은 또한 술틀에 밟힌 자처럼 되었다. 하나님이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그녀는 원수들의 손에 붙여진 바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붙이셨다`(14절).

(3) 예루살렘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고만 있는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12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너희들이 그토록 무관심하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너희 이웃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단 말인가"

(4) 예루살렘은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한다(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내가 `밤새도록` 울어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구나."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17절). 이것은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절망의 표시이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이 멀리 계실 때 성도들의 영혼이 쇠약해지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옮겨졌으므로 전혀 예루살렘을 도울 수 없데 되었다. 자신을 돌볼 수도 없는 그들이 어찌 예루살렘을 돌볼 수 있겠는가 그 성의 기쁨과 희망이었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다(18절). 친구들 역시 그 성을 실망시켰다. 어떤 이들은 도울 뜻이 없었고 어떤 이들은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녀, 곧 그 성은 도움을 바라며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었다`(17절). 그녀는 우상들을 사랑했고 애굽과 앗수르를 믿었으나 그들은 그녀를 김나하였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선두에 나서서 사람들을 지도했어야 했으나, 굶주림으로 `기절하였거나`(19절) 또는 `소성시킬 식물을` 찾아 구걸에 나섰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이 있고(20절).

(5)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즉 자기의 죄가 이러한 재앙을 받을만하다고 인정하였다. 그토록 무겁고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 멍에는 바로 자신의 `죄악의 멍에`였다(14절). 이는 곧 자신의 채찍으로 자기 자신을 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불의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8절). 또 한번 반복하여 고백한다.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20절). 죄에 대하여는 아무리 나쁘게 말하여도 충분치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에 대하여 가장 나쁘게 말하여야 하고 심지어 `패역` 곧 가장 큰 패역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이어야 하며 그것은 영혼을 움직여야 한다.

(6) 예루살렘은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 이 두 가지 측면으로 호소한다. 여호와여 돌아 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그녀는 원수들이 그녀에게 행한 해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한다(21,22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사 예언에 기록되어 있는 그날을 이르게 하시어 내 원수들을 나와 같이 만드시고 지금 내 손에 있는 진노의 잔이 그들의 손으로 옮겨가게 하시옵소서."

**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과 축복은 무엇인가?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예레미야 애가 1장 16절)

** 내 눈에 눈물이

* 사랑하는 자(1:19)
‘사랑하던 자’, 즉 ‘친구’는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적 우방이며 동맹국이었던 애굽, 모압, 에돔을 가리킵니다(2절). 멸망 직전 시드기야 왕은 애굽과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동맹국들은 돕지 않고 오히려 신의를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했습니다(호2:7).

* 유다를 술틀에 밟으신 하나님(1:15)
예루살렘의 황폐한 모습을 설명한 예레미야는 이제 이 황폐케 된 예루살렘으로 인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는 본문의 말씀은, 유다를 철저히 파멸시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포도를 술틀에 넣고 밟아 그 포도즙을 짜내듯 예루살렘 사람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 주어 짓밟히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패역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며 가슴을 찢게해 주시고 주님의 긍휼을 입혀주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