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진과 밈의 총화가 이루어낸 쾌거>
대한민국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가 되었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목말랐던 소식이었고, 한국인의 예술성과 국격을 온 세계에 드러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광주 출생 작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씨는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으며, 부녀가 모두 ‘해변의 길손’, ‘몽고반점’이라는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문학가 집안이다. 아마 아버지의 DNA 유전인자 진(Gene)이 한강의 강물처럼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흘렀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녀의 피에 흐르고 있는 또 다른 문학적 유전인자는 광주라는 시대적 아픔을 안고 태어났다는 사회적 문화유전자 밈(Meme)이 아니었을까?
한강의 작품 세계에는 5.18의 국가 폭력을 아름다운 시적 절규로 승화시킨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의 비극을 체험한 한 가족의 삶을 꿈속에서 눈길을 헤매듯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려낸 ‘이별하지 않는다‘와 같이,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깔려있다. 그녀의 폭력에 대한 저항은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난 사회 문화적 폭력과 가정적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그 끔찍한 역사와 죄악으로 점철된 인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사랑과 회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드러낸다. 어쩌면 그녀의 그런 역사의식 때문에 정부에 따라 한강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보수 교육감이 들어서면 그의 책들이 도서관에서 폐기처분되기도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평양과기대에서 가르칠 때, 졸업반 학생들을 데리고 매년 2주가량 중국 수학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마침 월드컵 시즌이라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식당에서 생중계 되고 있는 한국팀과 다른 나라 간의 축구 중계에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다가 골이 들어가자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일제히 환성을 지른 일이 기억난다. 축구 골 하나가 이념의 장벽을 그냥 넘어버린 것이다.
반면 이런 일도 있었다. 양가 부모가 모두 경상도 태생인 나였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고국 포항 땅에서 남북의 분단 만큼이나 처절한 남남 갈등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나를 오랜 세월 후원하고 지지했던 모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우리 영남 사람들이 호남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먼저 회개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한마디 했다가 온 교회로부터 마치 역적이 된 것처럼 모진 질타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호남출신 성도들은 조용히 밤에 찾아와서 자신들의 오랜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눈물로 인사했다.
평생을 민족의 화해와 하나됨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으로서 비록 질타와 공격을 사방에서 받을지라도 멈출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요, 우리 후대들에게 영광스런 나라를 물려줄 수 있는 길입니다. 제발 서로 미워하지 맙시다.”
이번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소망이 생겼다. 이번 기회에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영호남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호남 간에 KTX도 만들고, 서로 인정하고 칭찬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는 광주의 아픈 상처에 그것이 북한군 소행이었다는 거짓 이야기로 그들의 마음에 더 큰 아픔을 안기지 말고, 이제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해 용서하고 끌어안는 그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준비되면 비로소 일본도 북한도 그 과정으로 나아올 수 있다.
폭약을 만들어 전쟁의 참상을 일으켰던 노벨이 세계 평화와 발전을 위해 노벨상을 창립했던 역설처럼, 고난이 오히려 축복으로 나타남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경험한다. 광주의 참혹함이 오늘 노벨의 영광으로 나타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고난을 통과한 유태인들의 축적된 에너지가 문학과 예술과 과학기술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진과 밈의 DNA로 발현되었듯이, 제 2의 유태인들이라고 불리는 우리민족이 겪었던 모든 아픔들 역시 우리가 지닌 뛰어난 근면성과 예술성과 창의성의 얼을 통해 세계를 향해 마음껏 노 저어 갈 수 있는 대항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월드컵에서의 골 하나의 통쾌함이 삼천리 반도강산을 들었다 놓을만한 함성으로 나타난 것처럼, 이번 노벨상 수상을 통해 온 민족의 맺힌 역사적 응어리를 풀어내고, 마침내 남과 북의 장벽 마저 허무는 그 에너지로 용솟음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될 때, 지난 150년의 근현대사 속에서 온갖 식민의 핍박과 전쟁의 상흔과 독재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역사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더 큰 나라가 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호(포항공대 교수, 유라시아 원이스트씨 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