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꽃을 따는 처녀, 1세기, 프레스코, 나폴리 국립고고미술관 겸손한 이성 - 모호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

ree610 2024. 10. 4. 22:18

꽃을 따는 처녀, 1세기, 프레스코, 나폴리 국립고고미술관

겸손한 이성 - 모호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


서기 79년 8월 24일 로마 남쪽의 휴양지 폼페이시 근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짙은 화산재는 당시 인구 2만 명 이상이 거주하던 폼페이시를 그대로 뒤덮어버렸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 2천 여 명이 재를 뒤집어쓴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재난을 당한 인간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폼페이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경각심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주고 있다. 그 후 도시 전체를 뒤덮어 굳어버린 5m 이상의 화산재 때문에 폼페이는 역사로부터 잊혔다가 18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다시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반 정도 복원된 상태다. 화산재 덕분(?)에 폼페이는 당시의 생활상과 예술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그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꽃을 따는 처녀’이다.

젊은 여인이 맨발로 춤추듯이 살짝 풀밭 위를 걷고 있다. 왼손에는 꽃병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꽃을 따고 있다. 여인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몸매다. 나풀거리는 옷은 왼쪽 어깨에 걸쳐있고 오른쪽 어깨끈은 팔까지 내려와서 어깨선이 다 드러나 있다. 어깨로부터 목덜미를 지나, 뒤로 묶은 머리를 넘어서 꽃을 바라보는 여인의 오른쪽 얼굴에 이르면 모호한 아름다움과 마주친다. 이 여인이 누군지, 왜 꽃을 따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이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단지 뒷모습만 볼 뿐이다. 어느 집 벽에다가 프레스코(Fresco/새로 석회를 바른 벽이 채 마르기 전에 수채화를 그리는 화법)를 그린 화가는 왜 여인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을 담았을까? 마음 같아서는 벽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 여인 앞을 가로질러 가서는 내 고개를 확 돌려 그 앞 얼굴을 확실하게 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여인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뒷모습만으로 표현된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보는 이는 조금 답답하지만, 인간이 잘 알지 못하는 공간이야말로 ‘앎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신비적 아름다움’이 기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모더니스트(Modernist)다. 근대 이전까지 숲속에는 요정이 살았고, 산과 강에도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비가 있었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마구 파헤칠 수 없는 두려운 존재였다. 근대는 신비의 영역을 인간 이성으로 거침없이 들춰냈고, 현재 세계 전체를 규정하고 있는 근대화란 바로 과학화의 놀라운 확장이다. 과학화는 곧 비신화화(非神話化)였다. 인간은 더 이상 잘 모르는 영역을 방치하지 않는다. 어떡하든지 그 신비를 벗겨내고 파악(把握)하고자 한다. 이제 인간 이성이 비추는 구석구석마다 신비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거처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과학적 현대인은 끈질기게 하나님께 요구한다 ;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명확하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시라, 인간 이성이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모습으로 실험대 위에 올라오시라… 그러면 우리가 신을 믿겠다고! 근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해진 인간, 그 인간이 만들고 있는 현대 세계는 더 행복해지고 있는 걸까? 과학기술의 풍요와 편리는 인간의 품성과 가치를 더 높이고 있는가? ‘이성’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며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당신의 뒷모습을 살짝 드러내 보여주셨다. 다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신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겸손한 이성이야말로 현대 우리가 안고 있는 거대한 문제들과 실존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