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글

관을 뚫다

ree610 2024. 1. 11. 09:23

관을 뚫다

ㅡ  이 운룡

관을 뚫으니 썩은 어둠이 보인다
어둠의 끝자락에 매달린 생의 시간은 텅 비어서
가볍고 적막하다
하수구로 빠져나간 허드렛물은 이내
관개지를 지나 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룻밤 사이
물기 없는 집의 단단하고 무서운 적막

한 달 내내 앞뜰 감잎들을 두들겨 패던
빗방울 속도 적막하다
어린 상추 앞에 코딱지처럼 붙어 있던 달팽이도
몸만 빠져나와 맨살로 저를 밀고 다니는
집 없는 달팽이의 집 없는 집도
앞집 높은 시멘트벽만큼이나 적막할 것이다
장맛비 멀어져간 뒤
숨 끊어진 물소리가 아직 젖어 있는
수채 구멍은 더욱 무섭고 적막하다

제 소리의 행방을 찾지 못해
매운 지표를 핥아 맛을 보려는 듯
낮게 구름 떼가 몰려간다

소리는 남쪽에서 세상의 길을 찾는데
구름은 계속 북향이다

생이 버린 소리는 쌓일수록 시끄러우나
구름은 높이 떠서 적막을 넓혀간다
내 가는 길 좁아지고
자주 들러 길이 난 적막은 넓고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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