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편 3편을 어떻게 읽었는가?
ㅡ 강치원 박사
3. 무엇이 다윗의 본심을 잘 보여주는가? - 사무엘하인가?
압살롬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큰아들 암논을 살해하고 외가로 도망가 있는 3년 동안 다윗은 큰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압살롬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3년 상이 지나자 도망간 아들에게 연민의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괘씸하게 여기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궁중출입은 금한다. 2년이 지나자, 압살롬이 아버지를 알현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기를 간청한다. 다윗은 이것을 허락하고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며 화해한다.
어쩌면 아버지와의 화해는 압살롬의 다른 계획을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른다. 곧바로 반란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럼, 자신이 내민 용서와 화해를 반역으로 내팽개친 아들에게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의 신하 중에는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과의 전쟁을 피하고 도망의 길을 택한다. 도망치던 다윗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한다. 그때 ‘어린’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아들은 전쟁 중에 피살당한다. 그 소식을 듣자, 다윗은 통곡하는데 그 장면을 사무엘하 18장 33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울었다.
그는 올라갈 때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울부짖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으려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후궁들을 더럽힌 패륜아인데도 말이다. 이렇듯 사무엘하에 나오는 다윗은 시편 3편의 다윗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압살롬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를 비웃던 시므이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논조를 읽을 수 있다. 도망가던 다윗을 향해 사울 왕가를 무너뜨린 죗값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의 저주에 다윗의 신하들은 분개한다. 그의 머리를 잘라 오겠다고 흥분한 신하에게 다윗은 저주하게 놔두라고 타이르며 매우 의미 있는 말을 한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혹시 주님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 사무엘하 16:11-12
사무엘하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으로 간주하며 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명한다. 혹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눈을 압살롬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향하게 한다. 특히, 사무엘하 13장 1절 맨 앞에 나오는 ‘그리고 이 일 후에’라는 말이 그런 수사적 역할을 하며 12장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12장에 일어난 일 후에 13장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운을 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2장에 기록된 사건은 무엇인가?
다윗과 관련된 이야기 중에 밧세바 사건이 있다. 이 여인을 성폭행한 다윗은 그것을 감추려 전쟁터에 나가 있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하게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다윗은 우리아를 전선의 최전방으로 보내 싸우다 죽게 한다. 그리고 우리아를 자기 아내로 취한다. 이 내용이 나오는 사무엘하 11장에 이어 12장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으로 시작한다. 나단을 통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 중 10-12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너는 이렇게 나를 무시하여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네 아내로 삼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고,
네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너의 아내들도 빼앗아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가 대낮에 너의 아내들을 욕보이게 하겠다.
너는 비록 몰래 그러한 일을 하였지만,
나는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앞에서 이 일을 하겠다.”
압살롬이 일으킨 왕자의 난은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저주와 맥이 닿는다. 다윗과 가까운 사람이 그의 아내들을 대낮에 욕보게 하겠다는 저주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더럽힌 것과 연결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무엘하의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과 패륜적 행위가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압살롬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사무엘하와 시편 중에서 다윗의 본마음을 더 잘 표현해주는 곳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사무엘하 13장에서 19장까지 나오는 한 가지 표현을 보다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는 시편 3편을 어떻게 읽었는가?
4. 압살롬과 다윗,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
사무엘하 13장에서 19장까지 읽다 보면 ‘어, 이상하네’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또는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구를 대하게 된다. 사무엘하 14장에 보면, 다윗의 신하 요압이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을 읽고 압살롬의 예루살렘 귀환을 계획한다. 이것이 성공하여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물론 아버지 다윗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지는 못한다. 이런 내용이 나오고 난 뒤 25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미남은 없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은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게 된다. 이 말은 당연히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혹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읽다 보면, ‘그렇지’라는 감탄사를 만나게 된다. 일단 25절은 사무엘상 9장 2절에 나오는 사울에 관한 기록과 유사하다.
다음 장인 15장에 가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당파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압살롬은 매일 아침 일찍 재판하는 자리인 예루살렘 성문으로 가 왕에게 재판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어느 성읍에서 오는지 묻는다. ‘이스라엘 지파’의 어느 성읍이라 대답하면 작전을 건다. 소송은 옳고 정당한데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다윗 왕에게는 없다고 말하며 자신을 이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 주면 자신이 그 역할을 잘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일을 되풀이 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을 사무엘하 15장 6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였다.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
압살롬과 관련하여 유독 많이 사용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이 특정 집단을 일컫는 전문 용어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들지만 아직은 그냥 넘어가자. 이제 압살롬은 무언가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헤브론으로 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압살롬은 왜 헤브론에 가 그곳에서 왕위에 오르려 한 것일까? 사무엘하 2장에 보면, 사울이 죽은 뒤 다윗은 유다의 성읍인 헤브론으로 간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찾아와 그곳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는다. 압살롬은 아버지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상징적인 곳에서 왕위에 등극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윗의 왕위 등극과 관련해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유다 족속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다의 족장이라는 성격을 갖는 이 호칭은 이어서 나오는 8-9절에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과 비교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스보셋의 호칭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이다. ‘유다 대 이스라엘’ 구도가 드러난다. 그래서일까? 사무엘하 16장에서 도망하던 다윗이 감람산 꼭대기를 조금 지났을 때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모셋의 종이 나타난다. 다윗이 므비모셋은 어디에 있는지 묻자, 그 종은 거짓으로 이렇게 답한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야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할아버지의 나라를 자기에게 되돌려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는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한 압살롬을 아버지 다윗처럼 ‘유다의 왕’으로 칭하지 않는다. 그와 관련해 등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15장 13절에서 다윗에게 압살롬의 왕위 등극을 알리는 전령의 말에도 이것은 잘 나타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쉬 이스라엘, אִ֣ישׁ יִשְׂרָאֵ֗ל)의 마음이
압살롬과 함께 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다윗과 ‘모든 백성’(칼-하암, כָל־הָעָ֥ם)은 도망을 간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자, 압살롬과 ‘모든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칼-하암 이쉬 이스라엘, כָל־הָעָ֥ם אִ֣ישׁ יִשְׂרָאֵ֗ל)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사무엘하 16:15). 다윗의 경우와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사무엘하 18장에 가면 표현은 더 직설적으로 된다. 6-7절에서 압살롬과 다윗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각각 ‘이스라엘’과 ‘백성’으로 명명된다.
“백성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들녘으로 나아가서
에브라임 숲에서 싸움하였다.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였는데,
그날 거기에서 이만 명이나 되는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하고 압살롬은 죽는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대책이 논의되는데 주도권을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전 백성’이 잡는다. 그들의 제안을 사무엘하 19장 9-10절은 이렇게 전한다.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다.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서 이 나라에서 떠나 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압살롬은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다윗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셔 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을 들은 다윗은 특별한 반응을 보인다. 예루살렘에 남아 자신을 위해 스파이 역할을 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연통을 보내 이런 부탁을 한다.
“유다 장로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시는 일에
맨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요?
왕을 왕궁으로 모시려는 온 이스라엘의 말이
왕에게 들렸는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친족이요 나의 골육인데,
어찌하여 왕을 다시 모셔 오는 일에
맨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요?”(11-12절)
사무엘하의 다윗은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에 섭섭한 마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한발 늦었지만, 자신의 예루살렘 귀환에 앞장서 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호소에 유다 사람들은 지체 없이 반응한다. 빨리 돌아오라고 전갈을 보내고 길갈에 모여 왕이 요단강을 안전하게 도하하는 것을 돕는다. 이때 왕의 귀환을 먼저 청했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에게 나와 불평한다.
“어찌하여 우리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이
당신을 몰래 빼돌려
왕과 그 가족과 다윗의 모든 사람들을
요단강을 건너게 했습니까?”(41절)
그러자 온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왕과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유대 사람에게 대답한다.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며
다윗에 대한 권리를 너희보다 더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우리를 무시하느냐?
우리의 왕을 다시 모셔 와야 한다고
우리가 맨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43절)
혈연관계를 앞세우는 유다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의 귀환을 먼저 말한 것이 더 큰 권리를 가진다고 항변한다. ‘우리의 왕’을 소유하려는 힘겨루기는 유다의 승리로 끝난다.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 강경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는 유다와 이스라엘 구도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하거나 편집한 사람 또는 집단은 유다 지파에게는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전 이스라엘 지파’에게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 아니라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을 성군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다윗에게 반역죄를 지은 압살롬과 그를 저주하고 비난하는 시므이에게 시종일관 관용적 태도를 보이는 다윗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상적인 다윗을 보여주려는 사무엘하와 다윗의 원초적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편 3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시편 3편을 어떻게 읽었는가?
5.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다윗은 사울과의 관계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부름으로 왕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의 시기와 질투로 쫓기는 삶을 살아야 했다. 양치기에서 용사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다윗은 팔레스티나 지역의 자연환경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곳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사울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은 물론 다른 부족들과의 싸움에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고대의 인간이 그렇듯 다윗도 그 결과들을 자연환경이나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기보다는 신의 도움으로 돌렸다. 그 전형적인 예를 사무엘하 22장에서 읽을 수 있다. ‘모든 적들과 사울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시를 다윗은 이렇게 시작한다(2-3절).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
주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내 구원의 뿔,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
자신이 익숙한 지형지물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찬양하는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한다. 시편 18편에도 나오는 이 감사시의 축약판이 시편 3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방패라 고백한다(3-4절).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나를 에워싸는 방패
내 영광
내 머리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소리를 내어 주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은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들어주십니다”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느 방향에서 오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동서남북 모든 곳을 보호해 주는(바아드, בְּעַד) 방패막이가 되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왕위 찬탈로 다윗은 왕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왕위를 영광의 자리로 자랑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가 영광을 돌리고 찬미하는 대상이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넌 뒤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다윗은 올리브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올라갈 때 울고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머리를 가렸다’는 말은 ‘울다’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기에 슬프고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는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지는 않는다. 그런데 시편 3편에서 그런 자기 머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찬양한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넜을 때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과 함께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메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언약궤와 관련해 민수기 10장 35-36절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록한다.
“궤가 떠날 때 모세가 외쳤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십시오.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주님 앞에서 쫓으십시오.’
궤가 쉴 때도 모세가 외쳤다.
‘주님, 수천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로 돌아오십시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가 출발하면 길을 떠나고 언약궤가 멈추면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일어났던 기적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아직 성전이 없던 시기, 종교와 정치가 밀착되어 있던 시기에 언약궤가 있는 곳은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다. 그것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복이 임하는 것을 본 다윗은 그것을 다윗성, 곧 시온으로 메어 오게 하여 장막 안에 모시고 있었다. 이런 의미의 언약궤가 지금 그 누구보다 다윗에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는 사독에게 이렇게 말한다(사무엘하 15:25-26).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님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주님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나는 여기 머물 것이며
그분께서 좋다고 여기시는 대로 나에게 하시게 할 수밖에 없소.”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어야 할 곳은 ‘거룩한 산 시온’이었다. 대신 그에게는 하나님의 호의(헨, חֵן)가 중요했다. 그래서 특정 공간에 제한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는다. 삶의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하나님의 호의를 받게 될 때 그의 기도는 ‘거룩한 산’에 계신 하나님께 이른다. 시편 3편 4절은 바로 다윗의 이러한 믿음을 보여준다.
'메시지 > 좋은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전을 심판하신 주 예수(막 11:15~19) (1) | 2023.12.09 |
---|---|
시편 3편, 어떻게 읽지? (4) | 2023.12.08 |
시편 3편, 어떻게 읽는가? (0) | 2023.12.06 |
아름다운 합의: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1~21) (2) | 2023.12.05 |
예수, 위로의 마을에서 꾸짖다 (마가 1:21~27) (7) | 2023.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