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편 3편을 어떻게 읽었는가?
ㅡ 강치원 박사
6.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도망가고 있는 도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시온에 계신 하나님과 서로 화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다윗을 또 다른 차원으로 데려간다. 이것을 그는 시편 3편 5-6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누워 (곤하게) 자고 깨어났으니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천만 대군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아무리) 나를 대적하여 나를 에워싸고 있다 하더라도.”
사울에게 쫓기는 삶에서 다윗을 두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잘 수 없었을 것이다. 압살롬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참 잘 자고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심은 편안한 잠자리만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치렀던 수많은 전투 속에서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거이기도 했다. 사무엘서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지 않음에 대한 일종의 반대어로 ‘~의 손에 넘겨주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도 대부분 강조의 능동형인 ‘피엘형’으로 말이다. 그 예를 그 유명한 사무엘상 17장 46절에서 읽을 수 있다.
“주님께서 너를 (참으로) 나의 손에 넘겨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골리앗뿐만 아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도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사무엘상 24:18, 26:8). 이런 경험을 통해 다윗은 한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군대가 아무리 많고 자신이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에워싸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고 붙들어 주시면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믿음이 된 두려워하지 않음은 그에게 반기를 든 압살롬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가져다준다. 압살롬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8:28).
이 정도 되면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천만 대군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노래하면 무언가 고조된 ‘포르테’의 반향이 나타날 법하다. 그런데 2절과 4절 이후에는 나왔던 ‘셀라’가 이번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붙들어 주심에 대한 확신과 두려워하지 않음의 믿음이 한 번 섰다고 하여 더 이상 넘어지지 않는 견고한 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매번 겸손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할 때 주어지는 복이다. 이런 이유로 7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구가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시편 3편을 어떻게 읽었는가?
7. 복을 내려 주십시오!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내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부러뜨리셨잖아요.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일어나다’(쿰, קוּם)는 말을 7절의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해 명령형으로 사용한 민수기 10장 35절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라고 명령하는지를 이렇게 덧붙인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당신의 원수들을 흩으십시오.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당신 앞에서 쫓으십시오.”
다윗도 모세처럼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어나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뺨을 치다’, ‘이를 부러뜨리다’는 말은 일종의 격언처럼 쓰이는 말 같다. 욥기 16장 9-11절은 비슷한 용례를 보여준다.
“주님께서 내게 분노하시고
나를 미워하시며
내게 이를 가시며
내 원수가 되셔서
살기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시니,
사람들도 나에게 입을 크게 벌리고
모욕하며 뺨을 치는구나.
모두 한패가 되어 내게 달려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범법자에게 넘겨 버리시며,
나를 악인의 손에 내맡기셨다.”
사울은 분명 다윗을 향해 이를 가는 자였으며 그를 대적하는 자, 곧 원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다윗에게 악인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다윗을 향해 이를 갈던 사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것을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이를 부러뜨렸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뺨을 치다’는 말은 욥기처럼 모욕적인 의미를 담은 관용구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도 있다. ‘치다’, ‘때리다’는 기본 뜻을 가진 ‘나카’(נָכָה)라는 말은 ‘죽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나온다. 일대일 대결을 제안한 골리앗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를 치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치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겨야 한다.”
‘치다’는 말을 한글 개역개정은 ‘죽이다’로 번역하고, 새번역은 ‘쳐 죽여 이기다’로 번역한다. 10절에서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한다’(하라프, חָרַף). 형들을 만나러 전쟁터에 온 어린 다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의 싸움을 목격한다. 또한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한숨 섞인 말을 듣는다. 그리고 다윗은 반응한다(25-26절).
“‘저기 올라온 저자를 좀 보게.’
군인들이 서로 말하였다.
‘또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어.
임금님은 누구든지 저자를 쳐 죽이면
많은 상을 내리실 뿐 아니라,
임금님의 사위로 삼으시고
그의 집안에는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시겠다고 하셨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준다고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
목동 다윗은 자신은 사자나 곰이 양을 물어 가면 쫓아가 그것들을 쳐 죽였던 것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쳐 죽이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골리앗을 마주 대한 다윗은 그에게 이렇게 외친다(45-47).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또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 곧 하나님을 모욕한 골리앗은 반대로 어린 목동에게 모욕당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을 쳐 죽인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돌린다.
이러한 경험을 직접 한 다윗은 시편 3편에서 그것들을 언급하며 그때처럼 지금도 일어나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그때처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다시 한번 고백한다. 그런데 이 구원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 때문에 함께 피난을 가야 했던 백성에게도 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간구한다.
우리는 사무엘서에서 ‘백성’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비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유다 백성만을 말하는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도 포함하는지 말이다. 다행히 시편 3편에 나오는 ‘당신의 백성’(암므카, עַמְּךָ)은 사무엘하 7장 18-29절에 기록된 다윗의 감사 기도에 두 번이나 나온다(23-24절).
“이 세상에서 어떤 민족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이스라엘을 구하여 내시고,
백성으로 삼아서 주님의 명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시려고 큰일을 하셨고,
당신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른 민족들과 그 신들에게서 그들을 친히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큰일을 하시었고,
주님의 땅에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튼튼히 세우셔서
영원히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또 주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는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은 시온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열왕기상 8장에 기록된 솔로몬의 기도 외에는 다윗과 관련된 부분에 가장 많이 나온다. 역대기를 빼고도 말이다. 물론 출애굽 사건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종의 관용구처럼 자리매김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시온중심주의자들이 펜을 쥐고 흔들던 시대에도 이 표현이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다윗의 입술에 이 말이 붙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시편 3편은 사무엘하에 나오는 다윗과 압살롬 이야기보다 먼저 기록되어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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