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위로의 마을에서 꾸짖다 (마가 1:21~27)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1-27)
1
오실 주님을 준비하라(2-3절)는 이사야의 글 인용으로 마가복음은 시작된다. 세례 요한은 그 준비로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4절)를 설교한다.(케류소) 세례(밥티스마)는 씻는(밥티조) 것이다. 더러운 죄를 씻어 깨끗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다.(9절, 에밥티스쎄, 밥티조의 3인칭 과거 수동태) 씻김을 받자 거룩한(깨끗한) 영, 성령이 임재한다.(10절)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해지는 것이 회개이다. 이 거룩한 영은 거친 광야로 예수님을 몰고간다.(12절) 거기서 ‘더러운 영’인 ‘사탄’의 시험을 받는다.(13절) 거친 삶의 광야에서 더러운 영과 맞설 때, 비로소 거룩한 영임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본문의 더러운 귀신(영) 축출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로 이어진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절)
이 회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버림’(‘버리다’, 압히에미, 18절, 20절)으로 나타난다. 믿음은 단지 고백이 아니라 주님처럼 살겠다는 ‘따름’이다.(17절에서 ‘따라오라’로 번역한 헬라어 ‘듀테 오피소 무’는 직역하면, ‘내 뒤에서 오라’이다.) 제자들은 ‘따랐다.’(18절의 따르다는 헬라어 ‘아코루쎄오’를 썼고, 20절에서는 ‘그 뒤에서 가다’는 뜻의 ‘아페르코마이 오피소 아우투’를 썼다.) 회개의 세례와 믿음은 단지 예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변화인 버림과 따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개-씻김(세례)-버림은 같은 의미를 갖고 이어지고, 믿음(따름)에 대한 전제가 된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예수의 교훈(가르침)의 중심 주제도 회개와 믿음일 것으로 보이며, 더러운 귀신(영)은 씻어야 할 죄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서, 본문은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로 시작하고 있다. 가버나움이란 단지 장소만 의미하지 않는다. 가버나움(카페르나움)이란 ‘위로(나움)의 마을(카페르)’이라는 뜻으로 제2 이사야의 서두인 이사야 40장 1절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를 연상케 한다. 바벨론에서 혹독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다. 그런데 이 위로의 마을에서 예수님은 위로하지 않았다. 본문 25절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왜 예수님은 위로의 마을에서 위로하지 않고 오히려 꾸짖었을까? 거기에는 꾸짖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 기적 이야기다. 이 사건은 본문 21절 이하에서 말하듯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안식일’이라는 거룩한(깨끗한) 시간, ‘회당’이라는 거룩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곳, 그 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룩한 주일에 거룩한 교회에 거룩한 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안쓰로포스 엔 프뉴마티 아카싸르토이)이 있었다. 여기 귀신은 헬라어로 ‘프뉴마’다. 개역개정은 물론 한글 성서 대부분이 ‘귀신’(새번역) 혹은 ‘악령’(공동번역)으로 되어 있어 ‘더러운 귀신 들린’ 상태를 마치 신 들린 빙의현상으로 오해하기 쉽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더러운(아카싸르토스) 영’을 예수께서 세례(씻김)를 받으시고 임재한 성령(거룩한 영, 깨끗한 영, 10절)과 대조하여 쓰고 있다. 또한 ‘더러운 영’에 대해 마가는 마가복음 7장 21-23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기서 마가는 형용사 ‘더러운’(아카싸르토스)을 사용하지 않고 ‘더럽게 하다’(코이노오)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더럽게 하는 항목들을 볼 때, 이것이 빙의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윤리적·영적인 악한 것들(타 포네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사람’(안쓰로포스)이 단수이기에 ‘더러운 영 안에 있는 한 사람’ 혹은 좀 더 쉽게 의역하자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어 성서 ESV의 ‘a man with an unclean spirit’가 가장 적절한 번역인 듯싶다.
이 하나는 숫자 하나가 아니다. 문법적으로 대표 단수다. 하나하나가 모인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이 항목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7:21-22)에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더러운 영 안에 사로잡힌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세울 때 비로소 이 본문은 이해될 수 있다. 시간도 거룩하고(깨끗하고) 장소도 거룩하고 말씀도 거룩하지만 사람은 거룩하지 않다.(더럽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현실이다. 아니 마가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2
다시 본문 첫 절인 21절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로 돌아가자. 여기서 ‘들어갔다’(에이스포루온타이, 에이스포루오마이의 3인칭 복수 현재형)는 말이 우리말로는 과거형인데 헬라어 원문은 현재형이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이 기원후 70년경이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약 40년 전인데 어떻게 이것이 현재로 쓰였을까? 이것을 역사적 현재형이라고 한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에도 계속될 때 쓰는 시제다. 말하자면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마가가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예수님 사후 40년 정도가 지났어도 거룩한 안식일, 거룩한 회당, 거룩한 말씀이지만 여전히 그 시간 그 장소에 모인(수나고, 이것에서 나온 ‘수나고그’가 회당이다.) 사람은 거룩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현재형이다. 오늘의 교회 현실이다. 거룩한 주일에 거룩한 예배당에 거룩한 말씀이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나 말씀을 듣는 성도는 그 이름처럼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더러운 영 안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친다. 본문 24절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나사렛’은 경멸받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비참하고 때로는 불순한 세력으로 오해받는 지역이다. 요한복음 1장 45절 이하를 보면 제자 빌립이 후에 제자가 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라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여’라는 호칭은 경멸의 표현이다.
경멸적으로 부르면서 이 사람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묻는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의 헬라어 “티(대문자) 헤민(‘에고’의 복수 여격) 카이 소이(‘수’의 여격)”는 관용구이다. ‘티 A(여격 인칭대명사) 카이 B(여격 인칭대명사)’는 ‘A가 B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는 뜻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잔칫집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하자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응한다. 이 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가 헬라어로 ‘티(대문자) 에모이(‘에고’의 여격) 카이 소이(‘수’의 여격)’이다. ‘내가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는 말이다. 당신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어 남의 포도주 모자란 것에 나서느냐는 투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마치 불량배에게 어떤 사람이 당하고 있을 때,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네가 뭔데 끼어드느냐고 위협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다. 너와는 상관없으니 까불지 말고 가던 길 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러운 영 안에 있는 ‘한 사람’이 여기서 ‘우리’로 변한다. 한 개인에서 집단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사람’의 더러움의 실체이다. 자기 자신 하나를 ‘우리’라고 말한다.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가 아니라 다수인 ‘우리’라고 말한다. 교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목사님,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김 장로도, 박 권사도, 이 집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합니다.” “제 의견은 이렇기 때문에 이런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교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집단을 동반함으로써 힘을 자랑한다. 세력을 과시한다. 집단적 세력을 과시하는 것, 더러운 영이 자신을 드러내는 한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처형하고자 할 때 대제사장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다. 여론 몰이를 한다. 마가복음 14장 64절이다.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며 집단을 선동한다. 그렇기에 여전히 교회도 힘의 크기에 의존하고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백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의 뜻을 묻는 데서 신앙은 출발한다.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라며 다수결로 몰고가려고 할 때 그것은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되고 만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이 주인의식을 갖는 데 기반을 둔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반전이 있다. ‘우리’에서 ‘나’로 바뀐다.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사람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호 하기오스 투 쎄우)니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나’로 드러나는 신앙인의 겉모습이다. 속으로는 ‘우리’라는 패거리의 힘을 과시하면서 말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그 귀신 들린 사람이 누구인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누구인지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 각자, 바로 나 자신이다. 이것을 모르고서 이 본문은 그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한다. ‘그저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있었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그 귀신을 쫓아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 본문은 묵상 하나 마나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바로 나 자신, 우리 각자가 더러운 영 안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인격성을 상실한 집단 귀신이랄까? 마가복음 5장이 말하는 군대 귀신이랄까?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한 분뿐인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하지만 내 안에 있는 ‘우리’는 더럽다. 어찌 더러운 영이 그것뿐이겠는가? 앞서 열거한 마가복음 7장 21절 이하가 다 그렇지 아니한가? 온갖 더러운 영으로 가득 찬 다중 인격은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렇기에 27절의 ‘더러운 영(들)’(프뉴마타 타 아카싸르타)은 복수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우리도 얼마든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일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늘 찬양하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제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야말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경멸하고 있는 더러운 영들 안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겠는가?
3
과연 이 더러운 영들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세상살이 힘드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위로한다고 되겠는가? 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두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다 그렇지요.”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면 그 더러운 영이 사라지는가? 오히려 더러운 영, 더러운 귀신과 타협하게 되지는 않는가? 주님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본문 25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에피티마오)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영에 대해 주님은 타협하지 않는다. 주님은 위로하지 않는다. 주님은 꾸짖는다. 타협이 없다. 단호하다. 그 꾸짖음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본문 26절은 말하고 있다. 더러운 영은 타협의 대상, 위로의 대상이 아니다. 꾸짖음의 대상일 뿐이다. 바로 이 꾸짖음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하신 주님의 가르침이다.
다시 21절로 돌아가자.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의 ‘가르치시매’(에디다스켄)와 22절의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에서 ‘놀라니’(엑세플렛손토)와 ‘같고’를 받쳐주는 be 동사(헨)는 미완료 동사다. 이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반복을 의미한다. 즉 ‘가르치곤 했다’, ‘놀라곤 했다’, ‘같지 않곤 했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자주 회당에 가서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21절의 ‘안식일’(사바신, 여격)이 복수로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그의 교훈에 놀랐다는 것이다. 여기 ‘놀라다’(엑세플렛손토, 22절)는 ‘엑플렛소’의 3인칭 복수 미완료 수동태인데, ‘엑플렛소’는 ‘에크’(~로부터)와 ‘플렛소’(타격하다. 충격을 주다, 계 8:12)의 합성어로 그 뜻은 ‘압도당할 정도까지 충격을 받게 하다’(to cause to be filled with amazement to the point of being overwhelmed)는 것이다. 그러므로 ‘엑세플렛손토’는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 그 가르침에 압도당한(overwhelmed)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미완료인 ‘엑세플렛손토’는 ‘놀라 압도당하곤 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이 놀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가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권능을 가진(엑수시안 에콘) 것에 근거한다. 이 놀람은 더러운 영을 쫓아낸 후에도 나타난다. 27절이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여기 ‘놀라’라는 말의 헬라어 ‘에쌈베쎄산’(‘쌈베오’의 과거 수동태)은 22절에서 ‘놀라다’라고 번역된 단어와 다르다. 22절의 ‘놀라다’는 ‘엑플렛소’로 ‘압도당할 정도까지 충격을 받게 하다’이다. 그런데 ‘쌈베오’는 ‘놀라게 해서 마비시키다’는 의미다. 무엇이 마비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지금은 폐어가 된 ‘타포’(말문이 막히다)와 비슷한 말로 쓰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하는 입을 마비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입을 다물게, 좀 심하게 얘기하면 입을 닥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신 ‘잠잠하라’(피모쎄티, 명령형 수동태, 25절)와 깊은 연관이 있다. ‘피모쎄티’의 원형은 ‘잠잠하게 하다’라는 뜻의 ‘피모오’다. 분명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에 대해 ‘잠잠하라’고 한 것이다. 속으로는 음흉한 ‘우리’라는 집단적 세력에 의존하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인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표리부동에 입 닥치라는 꾸짖음인 것이다. 섬뜩하다. 교인들에게는 그럴싸하게 온갖 미사여구로 거룩한 설교를 하면서도 실제의 삶은 교인 수에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에게 하시는 꾸짖음이 아닌가? 강단에서는 온갖 거룩한 말씀을 전하면서도 목사파니 장로파니 하는 우리네 모습이 아닌가? 이것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런 우리 모습을 꾸짖으며 고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러운 속을 들켜버려 말문이 막힌 놀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로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라면 권위(권능, 엑수시아) 있는 사건이라고 해야 하는데, 권능이 있는 ‘새 교훈’(헤 디다케 헤 카이네)이라고 말한다. 이미 22절에서도 ‘그의 교훈’(디다케)에 놀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교훈(가르침)만으로 더러운 영이 쫓겨나겠는가? 그래서 22절 후반부에서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교훈만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의 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꾸짖음은 회개고 씻김이다. 가르침이 사람들을 압도하고(엑플렛소)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린 충격으로(쌈베오) 다가왔다. 그것은 가르치는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영(성령)이 임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거룩한(깨끗한) 영만이 더러운 영을 꾸짖을 수 있다. 그리고 거룩한 영만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압도하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거룩한 꾸짖음이다.
예수님의 꾸짖음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6절) 꾸짖음의 가르침은 아프다. ‘경련을 일으키다’는 뜻의 헬라어 ‘스프랏소’는 원래 ‘찢다’, ‘앞뒤로 흔들다’(tear, pull to and fro)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위경련을 앓아본 적이 있다. 죽는 줄 알았다. 더러운 영과의 결별이 그렇게 아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짖음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말씀은 아프다. 히브리서 4장 12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날선 두 검으로 관절과 골수를 쪼개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더러운 영과의 결별은 경련처럼 아프다. 이것은 거룩한 꾸짖음의 말씀이다. 거룩한 영이 함께하는 권위(권능)있는 분이 하셨기에 더러운 영도 복종하는 것이다. 더러운 영은 반드시 꾸짖어야 내쫓을 수 있다. 여기 타협은 없다.
할아버지가 어릴 때 밤길에 오는 나를 마중 나오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얘야, 밤에 도깨비를 만나면 절대로 쳐다보지 말고 내려다보아라
더러운 영은 우러러보지 말고 내려다보며 꾸짖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물신주의, 권력 비호, 차별, 세습, 대형화라는 더러운 영 안에 사로잡힌 이 땅의 교회가 거룩한 꾸짖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날이 갈수록 수요가 공급을 결정한다고 고객(?)의 입맛에 맞춰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고 꾸짖고 있는데….
김종수 |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목포산돌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가 2023년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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