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 참사, “애도의 극장”의 덫을 넘어서 >
ㅡ 강남순 교수
1.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가 정치적 무대 위에 올려져 ‘연기(perform)’되고 있다. 정치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 참사가 일어나자마자, “애도의 극장 ((Theater of Mourning)”을 만들고, 애도의 매뉴얼을 만들어서 그대로 따라서 하라고 온 국민에게 지시하고 있다. 왜 이렇게 재빨리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분향소를 만들고, 모든 활동을 중지하라며, 돌연히 ‘애도의 선두 주자’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에서,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정치적’이니 지금은 ‘애도만’ 하라며 1) ‘국가 애도 기간’을 정하고, 2) ‘애도 방식’을 규정하고, 3) 계획된 공연들과 같은 문화예술 활동도 금지하라는 ‘애도 지침’을 지시하고, 4) 동시에 참사가 아닌 ‘사고,’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 등과 같은 규정 ‘언어 규율’을 만들어서 배포한다. ‘국가 애도 기간(10/31~11/5)’을 선포하면서 모든 공연들을 취소하라면서도, 전형적인 ‘반애도적’ 행위인 한미연합 공중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한다. 정부 기관에서 분향소들을 만들어서 ‘국가적 애도’를 ‘연기’하고 있다. 규정된 애도 방식이 아니면 허용하지 않는다.
2. 애도가 단일한 모습으로 획일화되어 국가 권력에 의해서 강요될 때, 그 애도의 장치는 애도 방식의 다양성을 억누르고, 총체화시키는 폭력의 기능을 한다. 개별성을 지닌 인간에게 애도의 방식은 각기 다른 색채로 행하여지는 것이다. 고통과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그렇기에 ‘애도의 지침서’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글을 통해서, 어떤 이는 음악, 그림, 춤과 같은 언어-너머의 언어를 통해서, 어떤 이는 침묵으로, 어떤 이는 기도와 명상으로, 어떤 이들은 눈물과 통곡으로, 또 어떤 이들은 그 죽음과 고통의 원인에 대한 몸으로 하는 문제제기인 시위로서, 또는 글로서 문제제기를 통해서 애도를 표현할 수 있다.
3. 국가가 내린 지침서에 보면, 이태원 ‘참사’를 ‘사고’라고 부르라고 한다. 왜 그러한 언어 규제를 하는 것인가. 이 두 개념에 근원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사 (disaster)’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면, 인재를 의미한다. 즉 그 인재를 야기한 책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사고(accident)’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연히 또는 실수해서 사고를 겪게 된 것이기에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이태원 ‘참사’라고 할 경우, 그 참사가 야기된 책임 소재를 규명해야 한다. 참사를 ‘사고’라고 하고, 참사의 희생자를 사고에 의한 ‘사망자’라고 하는 것은, 은밀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그 어떤 책임소재나 원인 규명에 대한 문제제기와 질문을 봉쇄하겠다는 분명한 정치적 왜곡이다.
4. 전통적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에서 영토의 침입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총체화’와 ‘언어 통제’를 통해서 식민지인들의 사유를 단일화하고 집단화하는 담론적 식민화를 병행했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통제만이 아니라, 이러한 정식적인 사유방식의 통제는 식민지인들을 길들이고 지배하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도 대부분 두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몸을 통한 저항,”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글을 통한 저항”이다. 나는 이러한 이론적 해석에 하나를 첨부해야한다고 본다. 음악, 그림, 댄스 등 “예술을 통한 저항”이다. 예술을 통한 저항은 “언어-너머의 언어로 저항”하는 방식이다.
5. 지금 정부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애도’를 단일한 방식으로 총체화하면서 여타의 모든 문화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동시에 국민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규제하는 것—정확하게 식민주의자(the colonizer)가 식민지인(the colonized)에 대한 통치 방식이다. 21세기에 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 자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정치인들에 의해서 우리는 자국민에 의한 식민주의자의 모습을 대면하고 있다.
6. 몸을 통한 저항, 글을 통한 저항, 예술이라는 언어-너머의 언어를 통한 저항 등 수 없이 다른 색채를 띈 ‘애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광화문에서의 국민적 애도 집회를 불허한 서울시는 ‘애도의 극장’의 테두리안에서만 애도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태원에서 벌어진 것은 개인적 사고가 아니라, 국가적/정치적 책임 소재가 분명한 ‘참사’라는 인식이 더욱 확산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단순한 ‘사망자’가 아니다. 국민의 안전과 안녕을 책임지는 것이 그 우선적인 존재 이유인 국가의 무책임한 행정에 의한, ‘희생자’다.
7. 이태원 참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지금은 오로지 ‘애도만 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애도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 “국가 애도기간”의 설정이야말로 지극히 노골적인 ‘애도의 정치화’의 전형이다. ‘애도의 극장’을 만들어서 애도를 무대에 올려놓고서, 정부가 정한 테두리안에서만 ‘애도의 연기’를 하라는 정부의 지침은, 국민을 식민지인으로 전이시키는 정치적 행위다. 국가가 정한 애도기간이 끝나면, 이제 애도는 종결되고, 이 참사에 대한 그 어떤 물음도 물을 수 없는 것인가.
8. 개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애도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 참사의 책임에 문제제기하는 자유를 지켜내야 하는 이유다. 애도는 ‘애도 기간’에 시작되고 종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왜곡하고, 정치적 욕망을 구현하는 모든 통제에 대한 저항—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소중한 책임적 방식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에 의한 총체화되고 관제화된 ‘애도의 극장’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덫에 세 가지 저항, 즉 몸으로 하는 저항 (physical resistance), 글을 통한 저항 (textual resistance) , 그리고 언어너머의 언어로 저항 (resistance with language-beyond-language)으로 진정한 애도를 이어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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