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영성

그런 신은 없다 : 종교를 욕망의 도구(?)

ree610 2021. 10. 11. 09:30

<‘그런 신’은 없다: 종교가 '권력 욕망의 도구'로 이용될 때 >

1. 2013년 백인 교수인 나의 대학 동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순복음 교회’를 함께 간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한국을 방문하는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곤 한다. 나와 동료 교수는 맨 뒷자리에 앉았고, 수요일 저녁이어서 동시통역 서비스가 없기에 나는 동료 교수에게 대충 통역을 해주며 예배에 참석했다. 그날 저녁 설교 담당자는 담임목사였다. 그런데 나의 통역을 통해서 그 설교를 듣고 있던 나의 동료와 내가, 어느 순간에 ‘이제 충분하다’라고 거의 동시적으로 눈짓을 교환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의 뒷자리에 앉았었기에, 둘은 조용히 일어나서 예배 자리를 나왔다. 설교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충성하면 얼마나 큰 물질적 복을 받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설교의 매 문장마다 교인들은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멘’과 ‘할렐루야’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는 기계적인 구호 같아서, 그들이 정작 설교 내용을 듣기는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2. 노골적인 ‘축복의 자본주의화’ 된 설교내용을 통역하면서, 나는 고도의 인내심을 작동시켜야 했다. ‘하나님께 충성’은 결국 ‘교회와 목회자에게 충성’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충성’이란 헌금 많이 내는 ‘희생’을 하는 것이고, 목회자 말에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어디에 투자할지도 기도 중에 알려준다면서, 어느 대 기업 사장을 예로 들고 있었다. 이 사장은 기도 중에 ‘직접’ 하나님 음성으로 계시받고서 임원들이 모두 반대하는 곳에 투자했다고 한다. 결론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물론 이 부분에 교회당이 떠나갈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나는 동료 교수에게 웃으며, ‘신이 직접 음성 메시지를 전달한 것을 보니, 한국어도 할 줄 아는가 보다’하고 통역에 덧붙였다. 여기까지 통역을 하면서, 나는 더 이상 인내심을 작동시킬 의미를 가지기 힘들었다. 나의 통역을 통해서 설교를 듣던 동료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그 교회의 특유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수의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이 이러한 ‘물질적, 성공 지향적 축복’을 그들의 주요한 ‘종교적 메시지’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3. 신학대학원에 소속되어 가르치고 있는 내가 종종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there is no such a god).”

경기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
자기 자식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
기도하고 충성하면 물질적 축복을 내려주는 신,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
질병에서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
선거에서 이기게 해 주는 신,
선거에 출마하라고 계시해 주는 신,
부자들을 축복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무관심하고 방기하는 신 등.

이런 ‘교환 경제의 신 (economy of exchange)’ 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철학자/신학자들이 가장 고민했던 물음이다.

4. 많은 이들은 기독교의 경전으로 간주되는 <성서>를 ‘교환경제의 신’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용해 왔다. 특히 선거철이면 ‘성서’와 기독교 집단인 ‘교회’, 그리고 신의 대변자처럼 행세하는 ‘목회자’들은 특정 정치인의 권력에의 욕망을 부추기는데 이용되곤 한다. 성서-교회-기도-목회자는 연결고리로 묶여서, 특정 정치인의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 이용되고 버려지곤 한다. 트럼프의 경우, 그리고 이번 대선 정국에 등장한 여러 정치인의 경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5. 전 검찰총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갖가지 종교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개신교, 대학 때는 천주교, 직장인으로는 불교, 또한 결혼 후에는 신종교 ‘도사’ 의 조언을 받으며 한국에 있는 다양한 종교와 연결되어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성서’를 들고 교회로 향하는 모습,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연출도 했다. 얼핏 보면 열린 마음으로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종교적 개방성을 지닌 사람처럼 누군가는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세하게 그의 언설과 행보를 보면, 다양한 종교적 소속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철학적인 ‘다종교성 (multi-religious citizenship)’을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재현하기 위하여 모은 그의 ‘기도하는 손’ 모양은 참으로 어색하다. 그가 진정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나 예측 가능한 답이다.

6. 미디어에서 확산되고 있는 그의 ‘기독교인 연기’는 노골적인 ‘교환경제의 종교’의 민낯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를 그 연극무대로 설정한 것도 매우 정교한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닌가. 그는 참석자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축복’과 지지를 온몸에 받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이러한 ‘종교적 연극’을 아무런 수치심조차 없이 기껍게 감행하고 있다.

7. 종교란 무엇인가,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기도’란 무엇인가. 다양한 질병, 전쟁, 참사, 빈곤, 정치경제적 위기, 난민 위기, 생태 위기 등이 무수한 어른 사람과 아이 사람들의 생명과 일상적 삶을 위협하는 이 현대 세계를 살아가면서, 이러한 근원적인 종교적 물음을 다시 묻고, 대면하고, 씨름해야 한다. “종교란 책임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작크 데리다의 종교 개념을 상기하면서.

ㅡ 강남순 교수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