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길

노회찬 님 추모 설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시 12:1~8, 요 12: 24 ~ 25)

ree610 2021. 7. 23. 10:12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노회찬 님의 영전에

●구약의 말씀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시편 12:1, 5-8)
● 신약의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5)
-----------------------------------

[서] 노회찬 님의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들은 지난 월요일 아침, 이 땅에서 가장 찬란하고 고귀하게 빛나던 한 별이, 저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는 슬프고 황망스러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게는,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과 같이 황망스럽고 믿을 수 없었던 뉴스였습니다.
먼저, 우리 교우들은 노회찬 님의 삶과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먼저 추도의 묵도를 드린 후, 서로 느낌을 나누는 시간을 잠시 가지겠습니다.

[1]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1) "유튜브(YouTube)"에 들어가 위의 글을 치면 노회찬 님이 진보정당의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연설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직 전철이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 4시에, 서울 구로구 가로수길을 출발하는 첫 버스와, 5분 후에 출발하는 버스는 몇 정거장을 못 가서, 50대와 60대의 아주머니들이 버스의 복도에까지 주저 앉아 가는 만원 버스로 강남을 거쳐 개포구 주공단지까지 약 2시간에 걸쳐 운행되는 버스 이야기입니다.
신새벽 3시에 일어나 5시 반까지 강남의 빌딩의 숲에 내려 하루 종일 고단한 몸으로 청소와 같은 온갖 궂은 일들을 하고 월 85만원 정도의 소득으로 가정의 살림을 한달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있어도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투명인간"들이고, 그들이 필요로 느끼고 손들을 내밀 때, 진보정당 마져도 그들에게는 냄새 맡을 수 없고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투명정당"이 되어 버렸기, 당대표가 되어 그의 정당을 그들 곁으로 데려가겠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연설이 노회찬 님의 삶을 요약해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우리의 교회들이 그러한 “투명인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도움의 손을 뻗쳤을 때, 그들 곁에 있어야만 하지 않는지요? 우리들은 그들에게 모두 “투명 크리스챤”이 되고, “투명교회”가 되지 않았는지요?

(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저는 개인적으로 노회찬 님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자유 민주주의"는 가진 사람들만 "자유"가 있고, 소위 부르조와나, 쁘띠 부르조와 계층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법과 질서"의 관료주의가 그 핵심 내용이 되어버린 민주주의 체제입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의회 민주주의 제도 아래 각종 로비와 뇌물과 이득과 특혜를 통해 그들을 위한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 테두리 안에서의 "질서"를 강제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법과 질서(law and order)"의 진면목 입니다.
노회찬 님은 이런 구조와 체제를 변화시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법과 질서"의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권력과 부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법이라도 그들은 지키지 않고 더 많은 특혜로 이 법망을 잘 빠져 나가기 때문에, 유시민 작가가 지적한대로 "법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힘있는 사림들이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3) 사회 정의를 위한 삶과 투쟁.
노회찬 님이 함께 한 사람들은 늘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노동자들과 해고 노동자들, 장애인들, 성소수자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었고, 이들을 위한 정의의 실현과, 구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양성 평등을 위한 호주제 폐지와 같은 법제정을 위한 입법 활동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의 내용인 "정의(tzedakha)와 사랑(hesed)"을 그의 삶에 체현한 삶을 산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삭막한 정치와 노동운동에 음악(첼로)과 장미꽃을 선사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진보, 따뜻한 진보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 보인 분입니다.

[2] 오늘의 예수는 누구인가?

(1)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나치(Nazi)에 저항하다 순교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옥중서한》에서 예수의 삶의 비밀은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삶"(Being-for-Others)이었다고 압축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노회찬 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을 위해 자기을 버린 사람, "타자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문화를 사랑하던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나 첼로를 배우고, 그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를 나왔다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얼마든지 입신양명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신 반대 운동을하고, 대학 졸업하던 해에 용접기술을 배워 용접 노동자로 노동운동의 험한 가시밭 길을 택해 세상을 변화시켜 보려 했습니다.
그의 삶은 가난한 사람들, 해고 노동자들, 장애인들, 성소수자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여권 신장(호주제 폐지)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그 누구도, 아니 그 어떤 목사들도, 그 어느 크리스챤들도, 노회찬 님 보다 더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예수의 모습을 어디에서, 그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노회찬 님이 기독교인이었는지, 교회를 다녔는지, 세례는 받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모두 아닐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회찬 님의 삶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요?
우리들은 노회찬 님의 삶 앞에 우리들의 삶을 가져다 놓고 부끄러워 한다면, 특히 목사들이,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뇌물을 먹다가 발각나게 되니까 자살한 사람"이라고 어느 목사가 비방한다는 글을 보고 저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2) "종교 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religion)"
노회찬 님의 촌철살인의 비유와 해학, 정곡을 찌르는 요점 설명은 예수님의 비유에 비견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철학적 개념 정립과 현학적 설명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묻어 나오고, 만나는 일들에 대한 민중의 언어로 민중들이 이해하는 비유들입니다.
그의 종교는 기성 종교의 틀과 교리를 벗어난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찾는 기도와 삶이었습니다. 그의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와, 그들을 위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삶이었고, 운명이었습니다. 데리다(J. Derrida)가 말한 "종교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religion)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의 대상이었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그와 같은 촌철살인의 지혜로운 말들이 예수님의 비유처럼 쏟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말을 사랑하여 국어사전을 늘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또한 적절한 비유와 해학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믿습니다.

[3] "사건(Event)"과 "해체(Deconstruction)"

노회찬 님의 슬픈 소식을 들으며, 저는 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생각하다가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떠 올랐습니다.

(1)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대표하는 사상가 중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있습니다.
카푸토(John D. Caputo)에 따르면 그는 20세기의 성 어거스틴의 "반복"(repetition)"이라 할 만큼 유사점이 많다고 합니다.
"반복"은 데리다가 어거스틴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자신을 허용하고,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어거스틴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문맥화(recontextualize)해서 자신의 삶과 세계에 재현(re-enact)하고, 재연(replay)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성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학의 맹아기에 "삼위일체 교리" 등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정립하고 카톨릭 기독교 체계 안에서 하나님과 믿음을 가르쳤지만, 데리다는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 일생을 고투하고 기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거스틴 처럼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아에서 태어나, "성 어거스틴 가"에서 "pieds noirs"(고된 노동을 통해 살아가야 하는 하위 중산층)라 불리우는 포도원의 포도주 판매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유태인-아랍계-프랑스 카톨릭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처럼,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살았던 어머니, 죠르젯(Georgette)가 있었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가 지중해 연안의 오스티아(Ostia)에서 숨을 거둔 것 처럼, 데리다의 어머니 죠르젯(Geogette)도 지중해 연안의 니스(Nice)에서 운명했습니다.
성 어거스틴 처럼, 데리다도 "어머니의 눈물의 아들" (Son of his Mother's Tears(filius lacrymarum istarum) 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어거스틴의 "고백(Confessions)"처럼 "Circumfession"을 저작해서 자신은 남들이 자기를 무신론자로 오해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유신론적 신앙과 철학을 고백했습니다.

(2) 데리다의 사상을 요약하면 "사건"(Event/événement)과 "해체"(Deconstruction)란 두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의 기회(chance of grace)"이라면, 데리다에게는 모든 것이 "사건의 기회(chance of event)" 입니다.
"사건"은 '오고 있는' 그 무엇(something 'coming' ),
'오기로 되어 있는' 그 무엇(something 'to come'),
'미래의' 그 무엇(something 'futural'), 마치 모든 삶을 변화시키는 소식을 담은 우편함 속의 편지 같은 그 무엇입니다.
그 소식은 기쁨 혹은 당혹함을 가져다 주고, 미래에 눈을 열게 해 주는 위험을 안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삶을 재창조해 줍니다.
데리다는 "무엇이 참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참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미래에 우리가 드러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3) 데리다 철학의 중요 개념의 다른 하나는 "해체"(deconstruction)입니다.
"해체"는 파괴(demolition)가 아니라, 사건의 미래에 눈을 열기 위한 길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finding a way to keep to future of a thing open, not to demolish it)
"해체"는 미래에 대한 사랑입니다(Decostruction is a love of future).
"해체"는 기도(prayer)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성령의 말 할수 없는 탄식 가운데 드리는 기도처럼 "상처받은 말"("wounded word"-Jean-Louis Chrétien)입니다.
그리하여 진리가 만들어 지고 진실을 행하게 합니다 ("facere veritatem"/making or doing truth).

[결] 신앙은 무엇인가?: "사건"과 "해체"를 위한 결단.

(1) 노회찬 님의 죽음의 소식은 일주일 전 까지만 해도 미래에 다가 올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은 "기쁨" 또는 "당혹" 속에 맞지만, 미래에 눈을 열 때 위험과 더불어 삶을 재창조합니다.
슬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는 비록 여기에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란 님의 유지에 따라, 정의당에 가입하고, 후원비를 헌납합니다.
그들의 삶이 미래를 향해 재창조되고 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노회찬 님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사건"이 되어, 우리의 삶이 재창조 되어야 합니다.

(2)"해체"(deconstruction)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열정(passion)의 삶입니다.
키에르케고오르(S. Kierkegaard)는 "신앙은 주체성의 영역에서의 최고도의 열정이다 (Faith is the highest passion in the sphere of subjectivity)"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위한 열정(passion for Truth)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passion for God), "약속을 위한 삶의 모험을 위한 열정"(a passion for the riskiness of life for the promise) 입니다.
그것은 "해체"를 위한 열정, 자기 보호의 교회 조직의 해체, 신앙과 교리의 체계에 갇힌 신앙의 해체, 어느 목사처럼 "뇌물을 먹고, 발각되니깐 자살했다"는 식의 교리에 갇힌 우리들의 종교의식과 신앙의식의 해체를 위한 열정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교에서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도, 사회정의를 위한 기도, 외국인과 나그네를 환대하기 위한 기도, 모두의 용서를 위한 기도 ('prays' not to go to heaven but for the future, for a radical democracy and for justice, for hospitality, and for forgiveness),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드리는 "상처받은 말(wounded word)"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님이여, 슬픕니다!
하나님이 님을 이 땅에서 우리들에게서 영원히 떼어 놓았다는 현실이.
-님이여, 부끄럽습니다!
님의 삶 옆에 우리들의 삶을 갖다 두었을 때.
-님이여, 고맙습니다!
님과 더불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님이여, 그립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생각날 때 마다, 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것입니다.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 하은규 목사
*위의 설교는 주일(2018년 7월 29일),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에 말씀을 조금 다듬어 올립니다.

'모리아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해야  (0) 2021.08.20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0) 2021.08.12
안코라 임파로!  (0) 2021.07.21
이낙연 후보에 대한 심리분석  (0) 2021.07.19
가난한 자는 죽지 마라  (0) 2021.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