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1. 유토피아란 있는가

ree610 2017. 4. 29. 18:49

 

 타이 아속

 2.가장 ‘핫한 남자’ 포티락을 만나다

  3.이윤을 포기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

  4.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다

 

 인도의 오로빌

   5.자기로 살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 


 미국 브루더호프

  7.공부보다 청소와 요리에 더 열심인 아이

 8.뒷담화 말고 앞에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일본 애즈원

 9.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일본 야마기시

 11.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 곳




















기존의 방법으로 효과가 없다면, 즉 궁하면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대안공동체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타이의 아속공동체였다. 아속은 불교공동체지만, 경남 산청 기독교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김인수 교장이 해마다 학생 10여명을 데리고 한달씩 살고 오는 곳이다. 그곳에서 감동을 받은 그가 예전부터 꼭 한번 가볼 것을 권유했다. 아속에서는 항문관장을 통해 몸의 독소를 빼내 건강을 되찾게 해주는데, 내가 그곳 사람들처럼 맨발로 시골길을 거닐고 해독까지 하면 몸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더구나 그곳에선 유기농 대체의약품을 직접 만들어 판다고도 했다. 민들레학교에 다니던 아이와 함께 아속공동체에서 지내본 전 <기독교사상> 주간 한종호 목사도 달떠서 아속을 별세계처럼 소개했다. 또 그곳에서 가져온 조그만 물약을 주었는데, 통증 부위에 발랐더니 여간 시원하지가 않았다.




아속은 유토피아적인 것투성이였다. 유리병 속에 든 진열품이 아닌 날것들이어서 더욱 신선했다. 그들은 우물을 뛰쳐나온 개구리였다. 아속은 불교국가인 타이에서 주류 불교의 타락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계란으로 바위를 친 선지자들이다. 그런 배짱도 놀랍거니와 그런 소수파가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회사들’을 만들고, 오늘날 타이의 주류들도 무시할 수 없는 6개의 공동체마을을 포함한 아속왕국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군 장성 출신으로 출세 지향적이던 정치인 짬롱 시므앙을 무욕의 방콕시장으로 만든 멘토가 바로 아속의 창시자 포티락 스님이라는 것도 그랬고, 논밭에서 일하면서도 웃음꽃을 잃지 않는 학생들,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원들의 일거수일투족도 신기했다.




다음은 멀리 미국이었다. 뉴욕에서 차로 3시간쯤 떨어진 우드크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독교공동체로 꼽히는 브루더호프의 본부 격이다. 브루더호프는 내가 최초로 인연을 맺은 해외 공동체마을이었다. 또한 공동체에 대한 탐구심을 유발한 곳이기도 했다. 처음 브루더호프를 방문한 것은 1999년 초였다. 지금은 해프닝조차 잊혔지만, 밀레니엄이라는 2000년을 앞두고는 지구 멸망을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실현 여부가 관심사였다. 그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자원 고갈과 자연 파괴, 비인간화, 전쟁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대안을 보여주려 공동체운동 취재에 나섰는데, 그 첫 대상이 영국 다벨 브루더호프 공동체였다.

그 이후 한국에 브루더호프 붐이 일었다. 영국의 시골마을에 영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이 더 많이 찾아오는 이변이 생긴 것이다. 한국인, 특히 크리스천들의 열정은 아무도 못 말린다. 한국인들이 일체 개인 소유가 없이 살아가는 무소유공동체원들의 삶에 열광하는 것 자체가 의외였다. 한국인들은 브루더호프 공동체 사람들의 평화로운 표정에 매료됐다. 나도 우드크레스트에 17일 동안 머물면서 지상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우거진 숲에 둘러싸인 호수에서 낚시와 수영을 하고, 골프장 같은 초원이 펼쳐진 언덕 위의 하얀 집과 별빛 아래서 가족끼리 정답게 속삭이는 우드크레스트를 보았다면 단테도 천국을 더욱 생생하게 그렸을지 모른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은 그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싶어 마음이 벌써 바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라이터나 나이프를 버리듯 유토피아에 가기 전에 마음 보따리에서 비워내야 할 것도 알아둬야 한다. 양손에 떡을 쥔 사람은 하나님과 부처님이 합세해서 세상에서 가장 맛난 초코케이크를 만들어 던져줘도 받을 수가 없다. 브루더호프도 아속도 자신을 비워가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비우지는 않았더라도 날마다 삶에서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밖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많이 벌고 싶고, 많이 놀고 싶고, 놀고먹고 싶고, 남보다 더 잘 입고 싶고, 얼굴에 영양주사도 맞고 싶고, 돈도 좀 펑펑 쓰고 싶고, 때마다 여행도 가고 싶고, 폼 나는 차와 큰 집도 사고 싶고, 가족 친척들에게 용돈도 주며 인심도 쓰고 싶고…. 허영기 섞인 이런 욕구를 다 채울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게 헬조선이라면, 이런 욕구를 버리고 단순 소박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 게 공동체다. 공동체살이는 세상에 대한 혁명이기에 앞서, 바로 자기 비움의 혁명이다.





이 이상적인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젊은이들에겐 ‘그림의 떡’일 수 있다. 혼삶 혼술 혼밥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야 하는 공동체 생활을 구속으로 여길 수 있다. 설사 집을 나와 굶어 죽더라도 사생활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그들이다. 하지만 자유보다는 인간이 그리워 견딜 수 없는 외로운 삶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지옥이라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1인 가구 증가와 반대로 땅콩집, 캥거루족, 노소동거족 등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족이 늘어나는 현상을 퇴행이라고 비난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다. 인간은 자유에 갈급한 것만큼이나 고독을 견딜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