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해 동안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매체를 통하여 무언가 쓸 만한 생각을 발표했다기보다는 매체의 요구에 따라가면서 내 생각을 형성하였다는 생각이 앞선다. 퍽 보수적이라고 할까. 나는 원래 신앙이란 이 세상을 떠나다시피 하면서 심야에 명상하는 자세, 말하자면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그 초월적인 세계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는 자기 혐오증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독교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나를 구출해서 이런 사회참여라고 할까, 격동 속에 빠져 있는 한국의 현실 속에 나를 던져버리게 했다. 이런 지난날을 회상할 때 김관석 목사나 오재식 선생 등 기독교 안에 있던 몇몇 분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타일렀다고 할까. 그리고 기독교 안에, 말하자면 「기독교사상」과 같은 매체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격려해주었다고 할까. 그러니까 「기독교사상」 편집인들이란 기독교적인 매체를 통하여 기독교적인 사회를 만들고, 기독교적인 인간을 만들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건에서 사회참여의 길로 날짜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 1960년 4・19 직후로 추측한다. 오재식 선생이 현대 사회에서 경건주의란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모임에 나를 강사로 불렀다. 이날은 아마도 내가 기독교적인 사회참여에 발을 내딛게 된 첫날이라고 생각된다. 장소는 YMCA의 다락방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에는 하비 콕스의 세속주의가 한창이었다. 나는 그런 신학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세속으로 가면 타락하는 것이니 경건의 신앙을 견지해야 한다고, 내 딴에는 열변을 토했다. 그러고 나서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자니까, 전혀 다르게 세속주의를 오늘 어떻게 기독교에 도입할 것인가를 논하는 것이 아닌가. 내 강연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야말로 새로운 신학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 후 급하게 콕스의 『세속도시』를 읽어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기독교사상」의 장병일 선생이 찾아왔다. 일면식도 없었던 그는 나에게 「기독교사상」 주간이 나를 「기독교사상」 편집위원으로 위촉했으니 다음번부터 꼭 편집회의에 참석해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편집위원이 되었고 그 뒤로 수없이 많은 글을 쓰며 이른바 사회참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나를 세속주의와 만나게 해준 인연은 바로 당시의 「기독교사상」 주간이신 김관석 목사였다. 그분들은 이렇게 소리도 없이 내 길을 인도해주었고, 다가오는 어려운 시대를 향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신앙과 사상의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가올 새 시대의 고난을 짊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1961년 5・16 이후에 한국교회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준비하고 계셨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고난의 시대에는 그 고난을 짊어질 소수자를 준비하신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자는 고난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다수와의 연대를 끊을 수가 없다. 수난을 당하는 소수자는 언제나 연약한 다수자와 함께 있다. 이것이 교회의 본래 모습이고, 일제하를 살아온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 김관석 목사나 오재식 선생과 함께 교회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나누던 나날이 떠오 른다. 1967년 나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군사정권에 의해서 학교에도, 잡지사 「사상계」에도 있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관석 목사나 오재식 선생이 받은 신학적 훈련이 내게도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사실 거친 정치참여의 길을 떠나 고요한 학문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관석 목사가 유니온에서 공부한 것은 1964년 가을에서 1965년 봄이었는데 나는 그 후 2년이 지난 1967년에서 1968년까지 유니온에서 공부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김관석 목사는 이미 「기독교사상」을 떠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유니온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해서 교회와 사회를 논하면서 「기독교사상」에도 글을 쓰고 대학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과의 싸움에서는 후퇴했다고 할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카데미즘으로의 회귀라고 할까, 그런 야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972년 드디어 나는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정치사상사를 쓰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기독교사상」과 관계하면서 인연을 맺은 일본의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세계」의 주선으로 도쿄대학의 기독교인 교수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기독교사상」과 깊이 관계하면서 그때까지 맺은 정치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이제는 이른바 아카데미즘으로 복귀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NCCK 총무가 된 김관석 목사와 아시아교회협의회에서 산업선교를 담당하게 된 오재식 선생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월간지 「세계」(世界)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쓰게 되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김관석 목사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세력에서 얻어낸 정보를 중심으로 써나간 글이었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1987년의 6월항쟁에서 승리하는 날까지 매달 집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1960년대 초에 「기독교사상」에서 비롯된 우정의 연대, 동지적인 연대에서만 가능했다. 사실상 「기독교사상」의 필진이 중심이 돼서 자아내는 민주화운동 그리고 그들이 적어내는 민주정치를 갈망하는 글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정말 1960년대에 시작하여 1987년의 민주화혁명에 이르는 기독교 저널리즘의 험준한 길은 한국 근현대사 측면이든, 한국 기독교사 측면에서든 잊을 수 없는 기독교의 민족사적인 공헌이라고 해야 한다. 일제 통치하에서 기독교가 짊어져야 했던 많은 민족적인 고난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사상」에서 다진 우정 「기독교사상」 지령 700호를 맞이하면서 아무래도 거기서 다져진 신앙적인 우정이 그 후에 어떤 결실을 보게 되었고,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었는가에 대하여 다소 언급하고자 한다. 신앙적인 우정이란 그렇게 발전하면서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는 하나의 증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김관석 목사는 「기독교사상」에서 다진 기독교적 현실 감각과 인식을 가지고 1968년부터 NCCK 총무로 12년, 기독교방송(CBS) 사장으로 8년간 활동하는 등 지속적으로 기독교 언론의 중심에 자리하였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출구를 찾는다는 의미로 1972년 가을부터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관석 목사와 맺은 우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독교사상」과의 관계도 지탱하고 있었다. 우리 몸은 「기독교사상」 밖에 있으면서도 「기독교사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험준한 한국의 민주화라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사상」도, CBS도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특히 김관석 목사가 NCCK 총무로 재직하던 시대는 한국교회가 민주화투쟁에 거의 전면적으로 참여하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 민주화운동에 한국교회 일부만이 참여하였다고 할는지 모른다. 이미 앞에서 짧게 언급했고 다른 책에서도 인용하였지만, 우리는 어려운 신앙적인 투쟁에 참여할 때, 그런 것에 참여하는 자는 소수자이지만 그 뒤에는 다수자인 교회가 있다는 신앙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이런 생각은 신학자 폴 레만이 주장한 “ecclesiola in ecclesia”라는 말과 그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말은 교회 안의 교회, 즉 큰 교회(ecclesia)에 속한 작은 무리의 교회(ecclesiola) 곧 소수자를 뜻한다. ‘ecclesiola’와 ‘ecclesia’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적이며, 희생적인 소수자는 더 큰 조직인 교회 안에 있으면서 그것과 하나라는 것이다. 위기에 처하여 소수자는 앞에 서서 희생적인 용기를 발휘하고, 다수는 뒤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굶주릴 때 아파하면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일제하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ecclesiola’는 단순한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 안에 있는 소수자이며, 그들이 박해를 당하면 다수자인 교회가 함께 아파하면서 몸부림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70–80년대에 한국교회가 민주화운동에서 보여준, 그야말로 수난 속에서 거두어들인 교회사적 열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교회 밖에서는 보기 어려운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이다. 이것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커다란 교두보 역할을 했던 것 아닌가. 김관석 목사도, 기독학생회의 오재식 선생도 이러한 한국교회의 투쟁에 앞장선 첨병이었다. 그러니까 민주화운동의 첨단에 서서 싸우고 희생을 당한 기독학생들은 CBS와 하나였고, 「기독교사상」과도 하나였으며, 바로 NCCK의 교회 속에서 아파하는 소수자의 무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는 군사정권하에서 소수의 기독교인이 이에 참여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온 교회가 한국이 진정한 민주국가로 탄생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한국의 민주세력은 승리했다. 이 승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세계교회의 공감과 지원을 불러일으켜서 그야말로 세계교회가 선을 위해 함께 투쟁하였다는 사실이다. 1975년에 모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과정에 김관석 목사가 우뚝 서 있다. 이따금 도쿄에 온 그를 만나려고 나는 갖은 노력을 다했고, 그를 만나 나눈 한국 이야기, 그야말로 전선의 처절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눈물을 흘린 것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를 인터뷰한 「뉴욕타임스」 기사를 그가 일본에 와서야 읽으면서 “내가 한 말 잘 전해주었네.” 하고는 눈을 감던 그의 모습이 특히 기억난다. 그리고 박형규 목사나 산업선교회의 조지성, 인명진, 조화순 그리고 조승혁 목사 등 수많은, 이제는 거의 이름도 잊어버린 분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눈물짓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해방 전 도쿄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알게 된 일본교회 지도자들과 다시 만나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일은 곧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확대해가는 길이 되었다. 이 많은 사실을 어떻게 다 여기에 기술할 수 있겠는가! 군부정권의 암흑시대에 시대를 밝히는 정보를 세계에 알리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으로 대학이나 직장에서 추방당한 분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려고 세계적으로 모금운동을 펼친 그의 노력, 1972년 이래로 박형규 목사가 계속 투옥을 당하면서 싸우던 시절 김관석 목사와 박형규 목사의 우정, 그래서 투옥된 박형규 목사를 생각하면서 눈물짓던 김관석 목사. 이제는 모두 옛일이라고 망각의 저 산 너머로 흘려보내야 하는가.
교회사란 무엇인가 늙은 탓일까. 최근에 이르러 나는 역사에 대한 일종의 회의론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역사란 무엇을 내용으로 해야 하는가? 옛날에는 왕조사에 집중하면서 민중의 호흡이란 거의 역사에서 전해지지 못한 것 아닌가? 오늘날에도 체제의 변천을 중심으로 해서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만 기록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닌 공허한 기구나 체제의 역사가 되는 것이며, 그 체제를 쥐고 흔들던 사건은 기록될는지 모르지만, 그 많은 사람이 눈물지으면서 몸부림치던 민중의 사실이란 우리가 쓰는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체제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던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들은 역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그 아래에서 허덕이던 민중이란 살아서도 이름이 없었고 죽어서도 이름이 없는 역사가 아니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전하며 또 받아서 계승해야 하는가? 나도 그런 역사에 가담해 왔다는 것을 회상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은 일반 역사에서 망각된 이름이 아니겠는가. 성서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기존의 역사는 민중의 역사가 아니라 노예주들의 역사이며,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체제와 인류사가 남겨놓은 해악적 유산이 아니겠는가. 반대로 성서는 일반 역사가 기록하기를 기피한, 예를 든다면 가난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처럼 보잘것없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닌가. 특히 신약성서에 나타난 삶이란 일반 역사에서는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하잘것없는 사건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도 성서는 기록되고 전해져야 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이 모두를 재검토할 시대에 당도해 있다. 사실 그런 인간적인 것이 모두 소거되고 없어졌을 때 인간의 역사란 얼마나 황량한 것이 되겠는가. 자칫하면 교회사조차 그런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어쩌면 「기독교사상」 700호의 역사도 그렇게 세속적인 역사에는 끼지 못하고 사라져 갈는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내세우고, 「기독교사상」이 걸어온 길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거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험준한 길을 어떻게 살려고 했으며, 그들이 가고 없을 뒷날을 위하여 어떻게 몸부림쳤는가를 기록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사상」 700호 발행을 기념하며 역사에 대한 이런 한과 바람을 기록하면서 끝을 맺을까 한다. 「기독교사상」이 앞으로 더욱 많은 열매를 맺는 매체이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세상의 역사 속에는 기록되지 않아도 영원한 하늘나라 기록에는 뚜렷이 기록되기를 바라면서….
지명관 | 덕성여자대학과 일본 동경여자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림대학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