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삶

한완상 경험에서 온 글

ree610 2017. 5. 19. 21:30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1970년대는 필자에게 희망과 절망, 좌절과 보람이 거칠게 교차한 소중한 시간이요 역사였다. 1970년대 전반부는 필자의 인생에서 희망과 의욕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1967년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3년간 미국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면서 참으로 신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침 미국은 1960년대 세 가지 큰 역사적 변혁을 겪었는데 바로 그 역사 변혁의 한복판에서 필자는 대학원 생활을 하고 대학교수로서의 삶을 살았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의 돌풍이 불어닥친 때 그 운동의 중심부 역할을 하던 애틀랜타에서 대학원 생활을 했다. 30대의 특출한 흑인 민권지도자요 개신교 성직자였던 킹 목사의 주도하에 백인 차별구조를 혁파시킨 그 운동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감동의 변혁운동이 킹 목사의 복음적 결단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며, ‘아하! 기독교 복음이 바로 이 같은 변혁운동의 동력이 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인종차별적 정치와 정책을 기독교 신앙이 결코 용인할 수 없고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사명임을 이때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또 하나의 혁명적 변화가 미국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다. 주로 대학 중심으로 벌어진 변혁 흐름이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삶의 양식에 젊은이들이 저항한 반문화(counter–culture)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소유의 가치를 우상으로 섬기는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도전하면서, 그 대안으로 인간적 공동체를 살려내고 몸소 실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 운동의 실천 주체는 히피들이었다. 그들은 대학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1960년 후반 필자가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필자의 강의실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반문화운동에서 월남반전운동으로 이행하는 바로 그 시점에 필자는 미국 주립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그들의 동기와 삶의 양식을 볼 수 있었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기도 했다.
1970년이 되자 마침내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한데 모교에 출근한 첫날, 서울대학교가 고즈넉한 상아탑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박정희 군사 정치권력과 맞부딪쳐 싸우는 전투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연구실로 가는 시멘트 길 위에 지우기 힘든 흰 페인트로 쓰인 “중앙정보부를 해체하라!”라는 글을 보자 그 분노에 찬 외침이 들리는 듯했고, 등뼈로 찬 기운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기 전의 그 무서운 공포 분위기가 캠퍼스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귀국 당시 가진 필자의 희망과 의욕은 조금씩 절망과 좌절로 바뀌었다. 미국 대학에서 8년간 배운 것과 격동기 미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직접 느끼고 깨달은 바를 조국에 돌아와 실천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예언자적 지식인으로(나는 이것을 사회의사로 보았다.)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길러 한국 사회를 더욱 자유롭고, 더욱 정의롭고, 더욱 평화롭게 변화시키고 싶었지만, 이 꿈은 군사독재체제로 치닫던 1970년대 초반에는 참으로 이룩하기 어려웠다.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지식인의 노력이 불온한 행위로 낙인 찍히고, 정의와 평화를 강조하는 강의나 강연도 대번에 반국가적 일탈로 규정되었다.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대학은 더더욱 군사정부의 제1 통제과녁이 되었다. 필자의 희망과 의욕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지식인 집단이 있었다. 예수를 믿고 실천하려는 교수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필자는 국립대학 교수로서 겁 없이 이 공동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 지식인 집단은 한마디로 종말론적 희망공동체였다. 유신체제하에서 이 집단은 자연히 ‘불온한 반정부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필자가 서회와 갖게 된 인연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학원에서 추방되기 시작했다. 1975년 가을,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교수들을 학원에서 제거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면서 1976년 초에는 여러 분들이 대학에서 축출되었다. 고려대학교의 이문영 교수와 김용준 교수, 연세대학교의 김찬국 교수와 서남동 교수 등이 쫓겨났다. 이때 필자도 2월 28일 자로 서울대학교에서 추방되었다. 교수직 이외에 그 어떤 직장을 가져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땅을 파자니 힘이 딸리고, 장사를 하자니 너무나 우둔하고, 정치를 하자니 스스로를 정치시장에 내다 팔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빚도 지고 있어, 정말 앞길이 캄캄했다.
이때 기독교방송(CBS) 사장이던 전성천 박사님이 뜻밖에도 위로 전화를 주시면서 CBS 논설실장으로 오라고 하셨다. 언론계에 진출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으나 CBS는 다른 매체와 달리 매우 날카로운 시사평론과 용기 있는 정치보도로 높은 공신력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로 갈 생각을 했지만,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한완상 교수는 안 된다”라는 통보를 전 사장님께 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전 사장님이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필자를 추천한 곳이 바로 대한기독교서회였다. 조선출 총무님이 당시 서회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전성천 박사님과 절친한 관계였다. 마침내 1976년 3월부터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거기서 「기독교사상」의 편집고문을 맡았다. 이 인연으로 만 4년 동안 참으로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보람이었을까?
첫째, 황량한 들판으로 쫓겨난 한 지식인에게 대한기독교서회는 따뜻하고 뜻 있는 신앙과 삶의 공동체가 되어주었다. 새로운 희망의 터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필자의 신앙을 더욱 깊고 뜨겁게 해주었고, 신학적 관심과 열정을 더 넓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곳 서회는 하나의 직장이 아니라 자유와 희망을 심어주고 넓혀주는 문서선교의 현장이었다. 필자는 창졸간에 그 안정된 직장이던 서울대학교에서 쫓겨나 삭막한 유신 현실로 내동댕이처졌으나, 서회는 필자에게 새로운 자유를 주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되어주었다. 학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전국을 교실로 삼아 강연도 하고, 설교도 하고, 토론회도 하면서 현장의 민중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같은 에큐메니컬 공동체를 비롯해서 전국의 교회, 기독교청년단체 등에서 자유롭게 간증하고, 시국강연하고, 신학강좌를 펼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필자의 활동 마당을 크게 확장시켜 주신 것이다.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여러 곳을 다녔다. 들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고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분단된 조국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를 위해 싸우는 분들을 만나 민중의 힘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 처절했던 유신 정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로, 또는 꼴찌(the last)로 위축된 분들, 특히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이들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 기간을 통해 민중사회학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함께 대학에서 쫓겨난 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난의 역경 속에서 민중신학을 잉태하고 있었다.
둘째, 그렇다고 서회의 일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사상」이 이미 일궈놓은 명성과 그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는 편집고문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려 했다. 특히 매 호 시대상황에 적절한 복음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긴장감 있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기독교사상」의 편집위원들이 모두 신앙과 신학에서 수준 높은 식견과 혜안을 갖고 있어서 「기독교사상」이 ‘광야에서 외치는 한국적 예언자’의 소리를 담아낼 수 있었다. 다만 날카로운 예언자적 소리가 번번이 유신 당국의 검열에 걸려 묵살되었다. 때로는 묵살될까 봐 작은 소리로 다듬어 썼다. 그래도 「기독교사상」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신학적 수준이나 예언자적 비판 수준에서 확실히 앞서가는 매체였다.
당시 권두언을 자주 썼는데, 대학교 연구실에서 글을 쓸 때 체험하지 못한 짜릿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글이 쉽게, 그리고 힘 있게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기독교사상」의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자유롭고 거침없이 쓴 글들이 나중에 필자의 『민중과 지식인』, 그리고 『지식인과 허위의식』 같은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또 한국교회를 향한 필자의 비판과 질타가 후일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이런 책들을 읽은 젊은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어, 군사 권위주의체제를 더욱 용기 있게 비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새삼 감사했다. 서울대학교 재직 시 제한된 교실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줄 수 없었던 열정으로 필자는 서회의 그 작은 편집고문실(한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사회변혁의 메시지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로는 엄청난 큰 들판 마당에서 당신의 선교(missio Dei)를 알릴 기회를 허락하셨다고 믿었다. 만일 서울대학교에서 추방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서회에서 「기독교사상」의 편집고문으로 일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책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서회에서 4년간 새로운 삶을 살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드린다.
셋째, 서회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지식은 세상을 해석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른바 포이어바흐(Feuerbach)의 명제를 1970년대 후반 서회 일꾼으로 있으면서 새롭게 깨닫고 실천할 수 있었음을 지금도 감사하게 여긴다. 필자는 갈릴리 예수(역사의 예수)의 삶에서 예수의 말씀과 실천, 특히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 나타난 실천적 삶에 새삼 주목했다. 예수는 관념적 지식인처럼 왈왈(曰曰)의 가르침보다는 친히 조교처럼 실천하면서 우둔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셨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전체 삶에서 고난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가 매우 심대함을 깨달았다. 필자 자신의 삶도 들판으로 쫓겨나 유신 군부독재의 억압을 매일 두려워해야 하는 삶이었기에 이 깨달음이 더욱 절박하고 또 소중했다. 고난과 고통, 그것도 억울한 고통 속에서 예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사상」 편집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기독교사상」 편집고문으로 일하면서 생긴 일화가 있다. 1970년대 끝자락에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목요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대중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김 선생님께서 「기독교사상」에 실린 정담 시리즈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를 옥중에서 탐독했다고 하시면서 한국 개신교회의 고질적 문제와 함께 민주화의 노력도 깊이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또한 사회구원과 개인구원과의 관계,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 등에 대해 한국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도 하셨다. 이 말을 듣고 필자는 매우 기뻤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동교동에 있는 김 선생님 댁에 갈 일이 있었는데, 잠시 그분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책장에서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를 뽑아보았더니, 거기에 깨알 같은 촌평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정독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분의 민주화 투쟁에 「기독교사상」이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참으로 뿌듯했다.
넷째, 서회에서 편집 일꾼으로 일하면서 고민한 것은 과연 창조적 지식인이 자기의 존재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는 필자가 속한 계급의 영향을 초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예수따르미’로서 예수처럼 자기 존재를 구조적으로 규정하는 사회 규범과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를 고심했다. 산상수훈에서 ‘율법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으나,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식의 창조적 대안을 제시하는 예수의 어법이야말로 참다운 예언자적 통찰력을 지닌 참 지식인의 실천일 터인데, 과연 나 자신도 그럴 수 있겠는가를 생각했다. 원수사랑을 역설하신 예수의 이 같은 급진적 대안 제시는 자기초월적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데, 이 능력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필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장차 이 세상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를 영원한 미래의 일로 무작정 미루지 않고, 현재 나의 삶 속에서도 조금씩 착실하게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회학의 준거집단(reference group) 개념도 이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장차 이뤄질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질서, 하나님의 사랑이 활짝 꽃피는 새 질서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장단에 맞추어 오늘 여기서 춤 추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통상적 신앙은 따지고 보면 신플라톤적 인식과 유사한 것이지 예수의 몸의 부활신앙이 요구하는 구체적 역사 실천(praxis)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사상」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런 고민을 하다가 1980년 3월 1일로 복권・복직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부하의 총을 맞고 사망했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서울대학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학교로 돌아가서도 서회에서 깨달았던 것이 더욱 구체화되고 육화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두 달 보름이 지나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고난과 고통의 길로 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회에서 보낸 4년간 잊을 수 없는 가족공동체의 따뜻함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조선출 총무님의 인간적 품격 탓인지 서회는 관료조직 같지 않았다. 매우 공동체적이었고, 심지어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편집위원들은 한국의 각 교파 신학교를 대표하는 명망 있고 실력 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었다. 편집회의는 항상 진지했으나 또한 퍽 인간적이었다. 또한 김정준 박사님의 그 따뜻한 신앙과 신학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 여러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경험 때문인지, 그분은 항상 다정하면서도 초탈한 듯한 멋을 지니고 계셨다.
1년에 한두 번 모든 직원과 편집위원들이 버스로 전국여행에 나서기도 했다. 서회가 운영하는 서점을 전국적으로 둘러보면서 경치 좋은 곳을 들러 친목을 도모하는 시간이었다. 이 같은 공동체 투어는 유신체제하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던 우리에게 신선한 탈출이자,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모든 직원이 식구들을 동반해서 소풍을 갔는데, 이런 코이노니아는 필자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대학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던 특이한 사귐이요 소통이요 끈끈한 유대였다.
이제 이 글을 마치면서 오늘 한국교회와 교계를 생각해본다. 우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의 4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는 그때보다 훨씬 더 질적으로 낙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고치려 하기보다,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고 고치라고 외치고 있다. 교회는 소금이 아니라 부패를 촉진하는 듯하며, 빛이 아니라 어둠의 주역 같다. 국민 다수는 촛불광장에 나가 나이와 지역과 성과 학력을 초월하여 참으로 부끄러운 국정농단, 국가 공권력의 사유화를 극복해내려고 평화적으로 힘쓰고 있는데, 일부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태극기와 십자가를 들고 나가 국기문란 행위자를 옹호하고 두둔하면서 평화적 명예시민혁명을 오히려 색깔론으로 폄훼하고 있다. 이 같은 기독교의 변질은 이제 더 이상 추한 수준, 부끄러운 수준으로 내려갈 수 없는 듯하다.
기독교를 깨우치게 하는 일,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을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지난날 한국 민주화를 선두하던 「사상계」 운동이 필요하며, 더욱이 「기독교사상」이 지난날 누렸던 그 아름다운 권위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 빛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나라, 곧 사랑지배(Kingdom of Love), 공의지배(Kingdom of justice), 평화지배(Kingdom of Peace)가 이 분단된 비극의 땅, 조국 땅에 세우는 일을 감당하는 「기독교사상」의 부활을 필자는 갈망한다. 특히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한반도 역사 현실에서, 아니 국정농단의 한국 현실에서도 꼭 이뤄지는 실마리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또한 「기독교사상」이 복음의 전위로 더욱 힘내기를 바란다.

한완상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한국사회학회 회장,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다. 저서로 『지식인과 허위의식』, 『민중과 지식인』, 『예수 없는 예수교회』, 『바보예수』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