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416 : 촛불은 탕왕이다
촛불이 밝혀진 지 4개월이 지나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어떠한 의미에서든 앞으로 오랫동안 이 땅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 할 이 두 사건이 광장에서 만났고, 세월호는 촛불의 중심이 되었다. 세월호 촛불들은 두 사건의 공통분모인 박근혜–최순실 정권을 여러 명의 최순실들을 불쏘시개로 하여 불사르고 있다. 헌재의 결정을 앞두고 있지만, 긴 세월 군림해온 친일독재 세력의 고리가 탄핵으로 끊어지기 시작했다. 탄핵 인용은 새로운 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광장은 촛불들이 민주와 자유, 정의와 생명, 연대와 평화의 가치를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고 몸으로 익히고 자유발언과 함성으로 쏟아내는 배움터였기 때문이다. 노인들을 포함한 모든 세대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 되는 광장의 벅찬 감동은 부모에게 업혀 나오는 아이들부터 초중고 학생들까지 무수한 미래들이 이 땅에서 그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강력한 동인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촛불 속의 세월호는 아직 어둠이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노란 리본이 나비처럼 곳곳을 날아도 세월호 침몰의 진실은 세월호와 함께 아직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7시간’의 바다에 갇혀 있다. 이 시간은 박근혜 한 사람만의 7시간이 아닌 그 집단의 ‘7시간’이고 또 실제로 훨씬 길어질 수도 있는 ‘7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자체의 인양이 곧 진실의 인양은 아니다. 세월호가 파공 등으로 변형되었다면 더욱더 그렇다. 세월호를 둘러싼 수많은 질문의 출발점은 세월호가 침몰하기까지 당시 해경의 활동 목적이 구조가 아니라 구조 거부나 방해 또는 침몰 방관이나 지원으로 비쳐진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배후를 향한 물음들은 여전히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특검이 연장되지 못한 채 마감된 시점에도 ‘시간’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고 견고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 해도 세월호는 촛불들을 타고 진실의 항구로 항해 중이다. 다시 침몰하는 일 없이 탄핵 인용 후 머지않아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진실이 마중하는 그때 304인은 들뜬 모습으로 시끌시끌 웃으며 세월호에서 내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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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세월호는 광장을 거대한 용광로로 만들고 있다. 하나 된 그 둘은 생존권과 노동권을 위해 산재지정과 악법 철폐를 요구하는 노동자들, 사드 철회와 평화를 외치는 성주 시민들, 한국사 왜곡에 저항하는 교사들, 블랙리스트를 풍자하는 예술인들, 농정파탄과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트랙터 농민들, 이재용 영장 기각에 항의하는 법조인들, 성차별을 고발하는 여성들 등 이 시대를 앓는 다양한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낸다. 그들의 모든 외침이 광장에서 ‘박근혜 탄핵’ 하나로 모아지고, 거기서 정치–경제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찌든 이들에 의해 일그러진 한국 사회가 알몸으로 그 모습을 모두에게 드러내고, 억압과 불평등과 차별과 왜곡에 대 한 대중의 깊은 분노가 분출된다.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녹아져 나오는 이 광장의 분노는 맹자가 양혜왕에게 백성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일깨우기 위해 인용한 서경 탕서의 한 구절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해1가 어찌 떨어지지 않는가? 나와 너 모두 망하겠다.
時日害喪 及女皆亡2
이것은 걸왕 치하에서 폭정으로 삶의 근거를 잃고 삶에 지친 백성들이 그의 몰락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죽음으로 내몰리는 백성의 한과 분노가 그 속에 서려 있다. 그러한 백성이 왕을 위해 열심을 내고 협력할 리가 없다. 백성의 탄식을 ‘들은’ 탕왕은 그에 응답하며 탄식하게 하는 걸 왕을 축출키로 하고, 그 정당성을 ‘상제 경외’에서 찾는다. 바로 그 탕왕의 모습을,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옴을 자각한 촛불들에게서 보고, 또 세월호 사건에 고통스러워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 촛불 속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교회라면 그래야 한다. 신학한다면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이 있는 곳에 있어야 교회이고 그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 신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왕 치하에서 백성들이 가진 그 절박한 마음이 바로 양혜왕 당대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맹자는 강변한다.
백성이 저(해)와 함께 (왕이) 망하기를 원하는데 (왕에게) 비록 누각과 연 못, 새와 짐승이 있은들 어찌 홀로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民欲與之偕亡 雖有臺池鳥獸 豈能獨樂哉
백성의 삶을 잊고 백성의 고통과 신음 위에 홀로 즐거움을 찾는 권력자에 대한 백성의 마음은 시대와 상관없이 동일하다. 맹자는 왕 앞에서 탕과 걸의 예를 들어 혁명의 정당성을 암시한다. 백성과 유리된 왕은 존재 할 이유가 없다. ‘이 해가 어찌 떨어지지 않는가?’
맹자는 그 반대 모습의 왕을 걸왕 이전의 문왕에게서 찾는다.4 그가 누각과 연못을 지을 때 백성은 자발적으로 온 힘을 모아 하루도 못 되어 이를 만들어내고 왕이 이를 즐기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 까닭을 맹자는 저 옛사람이 백성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그가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여민동락이다.5
그것은 정치인들의 민생탐방처럼 자기를 선전하기 위해 서민을 이용하고 불편하게 하는 연극이 아니다. 특정 기업 총수를 위하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것인 양 국민연금을 축내고 사익을 위해 그와 뒷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한 이념의 포로 된 지지자들에게 감사편지 따위를 보내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핵심은 함께 나눔이다. 세월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죽음의 작업장에서 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일자리가 없어 이것저것 포기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세대에게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과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이러한 의미의 여민동락을 정치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즐거움은 권력이 독점하고 고통은 국민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현재의 정치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6 그렇다 해도 오늘날 여민동락의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가? 맹자는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왕을 백성 지향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정치를 바꾸고 정치인을 제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맹자는 여민동락의 또 다른 한 예를 제선왕과 문왕의 비교에서 찾는다. 문왕의 정원은 사방 70리(약 28km)나 되지만 백성들은 이를 적다고 여겼고, 제선왕의 정원은 사방 40리(약 16km)에 불과했지만 백성은 이를 크다고 여겼다. 그 이유를 묻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문왕의 정원은 사방 70리이지만 그곳에는 ‘꼴을 베거나 땔나무를 베는 자들도 가고 꿩이나 토끼를 잡는 자도 갑니다. (문왕이) 이를 백성과 함께하니 백성은 (그 정원을) 작게 여깁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와 달리 제선왕의 정원에 있는 ‘고라니와 사슴을 죽이는 것은 살인죄와 같습니다. 그러니 그 사방 40리는 나라 가운데 (파놓은) 함정입니다. 백성이 이를 크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7
함께 나눔 여부가 각 왕에 대한 백성의 태도를 결정한다. 여기에는 두 유형의 왕이 왜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짤막하게나마 율곡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왕이 걸왕이나 주왕이 되는 까닭을 왕의 뜻의 관점에서 찾고 뜻(의지)이 욕심을 이루려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8 권력을 공의 실현과 나눔이 아니라 이(利) 곧 사익 (私益) 추구와 독점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탓이라고 그의 말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맹자의 관점과 일치할 것이다.
욕심은 권력의 사유화를 낳는다. 율곡이 다른 뜻으로 이어서 말한 것을 이에 부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권력의 사유화는 왕이 권력을 농단하는 신하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고, 면전에서 아첨하는 자들을 모으는 이유가 될 것이다.9 이것들은 특검이 박근혜 정권과 관련하여 밝혀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사심이 없다거나 국가와 결혼하였다는 말은 지극 히 얄팍한 ‘정치적’ 수사로 싸구려 선전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후자는 국가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도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동시에 국가를 사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와 독점욕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매우 불행한 말이다. 내가 국가라는 속내를 감춘 음험한 말로 읽혀지기도 한다.)
혁명은 여민동락 위에 여민동락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 촛불은 광장에서 이를 이미 보여주고 있고,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왕과 같은’ 정치인을 만들어낼 때에 촛불은 그가 목표하는 지점에 이를 수 있다.
3
신학과 교회는 이에 기여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정치–경제 권력자들 편에 붙어 기생하는 교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집단을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외치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촛불과 함께하고 그 촛불로 교회 안을 비추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고백할 수 있는 신학과 교회라면, 그 신학과 교회는 신학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탄핵 이후 한국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신학과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세월호 이후 신학이 가능한가? 하나님을 계속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물음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그 답은 아직 얻어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신학과 교회는 그 물음들을 뒤로한 채 그 이전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촛불이 그 퇴로를 막고 나섰다. 촛불 속에서 일하는 하나님이 세월호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촛불과 세월호를 양손에 잡고 계신 하나님이다. 그 물음 앞에 신학과 교회가 벌거벗은 채 서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이전에 알던 대로 침묵하고 눈물 흘리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하는 하나님일 수 없다. 그는 저 차디 찬 물속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져야 하는 하나님이다. 죽음의 세력에 굴복 되어서는 안 되는 분이었다. 그런 하나님을 보복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304인의 죽음을 억울해하며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이다. 그는 그들의 피맺힌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귀머거리도 아니고, 침묵하는 벙어리도 아니었다. 촛불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보복의 불이다.
보복하는 하나님, 이러한 관점에서 이사야 35장을 읽고자 한다. 35장은 40장과 함께 짝을 이루며 대단히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희망을 노래한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자연의 변화
1 – 2a절 광야/메마른 땅/사막: 기쁨과 즐거움, 영광과 아름다움
2b 절 : 야훼의 영광과 아름다움
B 눌린 자들의 변화
a 3 – 4a절 늘어진 손/후들대는 무릎/초조한 마음: 힘, 안심
b 4b절 야훼: 보복
a 5 – 6a절 눈먼 자/귀먹은 자/저는 자/말 못하는 자: 봄, 들음, 뜀, 노래함
A 자연의 변화
6b – 7 절 광야/사막/불타는 땅/메마른 땅/승냥이 터: 물, 시내, 못, 샘
풀/갈대/부들
B 눌린 자들의 귀환길
8 – 10a 절 큰 길, 거룩한 길: 깨끗, 안전10
(5 – 6a절에 언급된) ‘저들을’ 위한 길/구속받은 자들/야훼가 속량 한 자들
10b 절 돌아옴: 기쁨과 즐거움이 이르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짐
자연의 변화와 포로되고 눌린 자들의 변화가 ABAB 형식의 평행법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일어난다. 메마른 광야에 샘이 터지고, 생명 없는 곳에 생명이 움튼다. 창조의 감동과 놀라움이 재현된다. (창 1–2장 참조) 이와 함께 사람 사는 세계의 변화가 나란히 일어난다. 억압과 두려움 때문에 버틸 힘조차 잃었던 사람들이 힘과 용기를 얻고, 신체장애 때문에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던 이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뛸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안내하는 길은 패인 곳을 북돋고 솟은 곳을 평탄케 하여 만든 대로이다. 안전하고 길 잃을 염려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길이다. 생명 회복과 질서 전복의 길이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 가?
하나님이 보복하려고, 보응하려고 오시기 때문이다! 귀먹고 눈멀고 혀 잘린 하나님이라고 불리던 하나님의 깨어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응과 보복의 하나님은 눌린 자를 높이고 억압자를 낮추어 고르게 하는 하나님이다. 이 둘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때 비로소 해방은 온전한 의미의 해방이 된다. 분노 없는 사랑, 보복 없는 자비를 말하는 것은 허구이다. 거짓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함께 선포하신다. (사 61:1–2 , 눅4:18–19 참조)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 애끊는 마음으로 분노의 ‘칼’을 휘두르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다. (출 22:21–27, 사34:5–8 참조) 이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다른가? 아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고 그때를 기다리신다. (마 25:31–46 외 다수)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받았다고 선언한다. (요 3:18) 심판하지 않는, 심판할 수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다.
분노와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는 하나님이 낮고 낮은 곳에 내려와 그 변화를 일으키고 희망과 기쁨을 선물한다. 이 하나님을 교회는 고백할 수 있고, 신학은 진지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촛불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복의 칼을 들고 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반쪽 하나님으로 만드는 비신앙적・비성서적 행태와 위선에서 벗어날 때 신학과 교회는 “세월호 이후 신학이 가능한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4
탄핵으로 열리는 4월이다. 권력을 겨눈 촛불 속 하나님의 칼은 한편 이 땅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에 대한 분노의 응답이고, 다른 한편 악을 편들고 불의를 지지하는 교회와 신학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다. 동시에 그것은 새 질서의 새 세상을 향해 전진하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 이행의 토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촛불 경험으로 낡은 세력과 그 세상을 거부하는 새 세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넘어 공감 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며 새 세상의 희망을 공유한 세대이다. 416 촛불 세대이다. 분노를 거대한 에너지로 바꾸고 연대와 공감, 평화와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대이다. 그렇기에 416 촛불 세대의 출현으로 이 사회 의 패러다임이 바뀌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발, 성장, 독재, 친일, 분단, 경쟁, 효율, 이익, 독점, 억압, 착취 등이 지배하던 틀에서 보존, 분배, 민주, 민족, 통일, 협력, 생명, 생태, 평화, 평등, 공생이 일상의 가치가 되는 틀로의 전환이다. 모진 겨울의 광장에서도 촛불을 밝혀온 416 촛불 세대가 만들어낸 희망이다.
신학은 이 세대와 더불어 하는 신학이 되고, 교회는 이 세대를 품고 자 리를 마련해주며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여야 할 것이다.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분노를 목격한 신학과 교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탄핵이 인용되었다.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통과를 이루어낸 촛불의 힘이 꽁꽁 닫혀 있던 청와대의 문을 열어젖히고, 거짓과 조작과 농단의 세력을 끌어내린 순간이다. 사막에서 샘이 터지고 늘어진 어깨들이 펴지고 저는 다리들이 똑바로 뛰는 환희의 시간이다. 생명을 앗긴 세월호 304인, 농민, 노동자들이 달려온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새 생명으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추며 거룩한 대로를 달린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환호한다.
사랑과 진실이 같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고,
진실이 땅에서 솟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시 85:11–12, 사역)
탄핵인용 이후 416 촛불 세대가 열어갈 세상이다. (세월호 사건을 소추 요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1 日(일)은 하나라의 걸왕을 빗댄 말이다. 집주에 따르면, 걸왕은 “나에게 천하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가 있는 것과 같다. 해가 떨어지면 나도 망하리라.”(吾有天下 如天之有日 日亡吾 乃亡耳)라고 하였다.(『맹자』 양혜왕 상 2 장)
2 害(할)은 탕서에서 曷(갈)로 나온다. 曷은 害과 달리 ‘어찌, 어느’ 외에 ‘언제’라는 뜻도 포 함한다. 이를 따라 時日害喪은 “이 해는 언제 떨어지는가?”로 옮길 수도 있다. 후반부는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논리적이지 않다. ‘너’는 해나 해가 상징 하는 걸왕이 아니라 ‘나’와 함께 ‘우리’ 모두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3 서경 탕서에서 탕왕은 걸왕을 공격해야 하는 정당성을 논증하며 자기 백성을 설득한다.
予畏上帝(여외상제) 나는 상제를 경외하므로
不敢不正(불감부정)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今汝其曰(금여기왈) 지금 여러분은 말한다.
夏罪其如台(하죄기여태) “하나라의 죄가 나(=탕)에게 이르렀구나!”
夏王率 遏 衆力(하왕률알중력) (그러나) 하나라 왕은 백성들의 힘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率割夏邑(률할하읍) 하나라 고을들을 철저히 피폐하게 만들었다.
有衆率怠弗協(유중률태불협) (그래서) 백성들은 매우 태만하고 협력하지 않는다.
* 率(률 또는 솔)은 ‘대개 또는 모두’를 뜻한다.
* 률알과 률태, 할읍과 불협이 짝을 이루며 왕과 백성의 대립적 관계를 나타낸다.
4 시경의 구절입니다.
“처음에 영대를 계획하고 이를 측량하고 짓자 백성들이 앞다퉈 달려들었고 하루도 못 돼 완성하였다.”(詩云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누각과 못을 만들었으나 백성은 이를 환영하고 즐거워하며 그 누각 을 영대라 하고, 그 못을 영소라 했습니다.(王以民力爲臺爲沼 而民歡樂之 謂其臺曰靈臺 謂 其沼曰靈沼)
(백성은) 그가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를 가지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저 옛사람은 백성과 함께 즐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즐길 수 있었습니다.(樂其有 麋 鹿魚鼈 古之人與民偕樂 故能樂也)
5 여민동락(與民同樂)은 다음을 함축한다.
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 樂以天下 憂以天下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낙민지락자 민역락기락 우민지우자 민역우기우 낙이천하 우이천하 연이불왕자 미지우야) 백성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자, 그의 즐거움을 백성 역시 즐거워하고, 백성의 염려를 염려 하는 자, 그의 염려를 백성 역시 염려한다. 이렇게 하여 천하를 즐거워하고 이렇게 하여 천 하를 염려하고도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 자는 아직 없다.
* 以는 천하와 결합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부사구이며, 천하는 樂과 憂의 목적어이다. 王은 ‘왕노릇하다’보다는 ‘다스리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목적어 천하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6 『맹자』 양혜왕 하 1 장 비교
吾王之好鼓樂 夫何使我至於此極也 父子不相見 兄弟妻子離散
(오왕지호고악 부하사아지어차극야 부자불상견 형제처자이산)
우리 왕이 악기 연주를 좋아하시는 것이 어찌 우리를 이 끔찍한 상황에 이르게 하는가? 아비와 아들이 서로 볼 수 없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7 文王之 囿 方七十里 芻 蕘 者往焉 雉 兔 者往焉 與民同之 民以爲小 不亦宜乎
(문왕지우방칠십리 추요자왕언 치토자왕언 여민동지 민이위소 불역의호) 殺其 麋 鹿者如殺人之罪 則是方四十里 爲 阱 於國中 民以爲大 不亦宜乎
(살기미록자여살인지죄 즉시방사십리 위정어국중 민이위대 불역의호)–『맹자』 양혜왕 하 2장
8 志在逞慾 則爲桀紂(지재령욕 즉위걸주)
뜻이 욕심을 이루려는 데 있으면 걸주가 된다.(李珥, 諫院陳時事疏)
9 志無所定 則 玿 (=招?)弄權之臣 志主一偏 則聚面諛之士 (지무소정 즉 초농권지신 지주일편 즉취면유지사)
뜻에 정한 것이 없으면 권력을 농단하는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번역문과 뜻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면전에서 아첨하는 관리들을 모아들인다.(李珥, 諫院陳時事疏)
10 한글 성서 번역문과 달리 8b 절은 “그 길 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들일지라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로 옮겨져야 한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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