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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서거 80주년, 그는 오늘 한국교회에 무엇인가?* 독일 신학자이자 나치스에 저항했던 본회퍼..

ree610 2025. 4. 14. 16:26

*디트리히 본회퍼, 서거 80주년, 그는 오늘 한국교회에 무엇인가?*
  
- 한 종호

  
독일 신학자이자 나치스에 저항했던 본회퍼. 그는 현실의 고난, 그 중심에서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낸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영광스런 신적 존재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바로 이 십자가 신학 속에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을 극적으로 목격한다.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1945년, 플로센부르그의 집단 수용소에서 반 나치스 저항단체 조직 혐의로 사형을 당한 그는 기독교가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를 온 몸으로 증언한 존재였다. 그는 나치스로 인해 독일은 물론이고 인류사회가 전쟁과 억압의 현실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이를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희생당해도 좋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과 현실의 권력이 정면에서 충돌한 지점이었고, 그 자신은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린 운명이 되었다. 나사렛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도 사형을 당했고, 죽음으로 마감했으나 그것으로 본회퍼의 삶이 잊히고 패배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역사의 무덤에 묻히고 패배의 낙인이 찍힌 것은 본회퍼를 십자가에 매달은 나치스였다. 그것은 로마의 권력과 이와 야합한 그 모든 세력이 예수를 죽였으나 역사가 패자로 결론지은 것은 바로 그들 살해자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억압과 폭력이 있는 자리에서 본회퍼는 언제나 부활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죽음을 안기려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는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그렇게 단호하게 외치며 정면으로 이 힘과 마주 서는 용기는 그렇게 생명의 부활로 가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지내면서 모두의 존경과 장래에 대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스가 조국을 지배하면서 본회퍼는 위험한 독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 더 머무르기를 바라는 당시 미국의 동지들의 뜻과는 달리 죽음의 자리, 골고다의 독일로 떠난다. 그는 그 자신의 ‘신학’대로 살고 행동한 것이다.

이후 본회퍼는 칼 바르트와 함께 독일 고백교회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학살의 위협에 직면한 유대인들을 돕고 나치스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쳤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독일 사회의 새로운 부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동임을 확신했다. 그가 말한 유명한 비유는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일깨운다.

“술 취한 버스 기사가 몰고 있는 차 안에 있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기만 하면 될까? 아니면, 그 기사에게서 운전대를 빼앗아 승객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일까?”

본회퍼의 대답은 분명했다. 미쳐가는 사회에서 이 미친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으면 모두의 안전과 생명은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이 본회퍼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 교훈 역시 분명하다. 이 사회가 과연 올바로 가고 있는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안전과 생명을 보장해주고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로서의 행동을 선택하는 신앙의 용기를 품고 실천해야 한다.

본회퍼는 기독교가 교회의 종교가 되고 있음을 탄식했다. 그는 기독교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그 세상의 고뇌와 마주하고 신앙의 능력을 펼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회 안에서 구원을 외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말하자면 고난과 억압의 현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곧 예수의 뒤를 이어가는 기독교의 진정한 역할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자면, 한국교회는 교회 안의 종교가 되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의 현실 앞에서 아무런 외침과 행동의 고뇌가 없다. 분단의 지속 앞에서 승리주의 신학에 매몰되어 반북 캠페인에 몰두하고 있다.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강대국 미국을 도리어 숭배하면서 그 폭력적 선택을 옹호하고 있다.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진정한 생명의 미래를 펼쳐나가는 일에 진력을 다하기 보다는, 권력과 자본의 기득권에 동참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을 겪는 한이 있다 해도 정의와 평화, 선과 생명의 길을 가는 선택을 하는 교회는 소수일 뿐이다.

그로써 교회는 세상의 영광을 구한다. 세상의 권력을 향유한다. 세상의 지위를 얻는다.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확인하려 들고 신도의 숫자로 신앙의 위력을 입증하려 든다. 거대한 강대국의 편에 서서 가난하고 약한 동포들이 짓밟히는 것에 협력한다. 지금 나라를 걱정하고 있는 이들은 한국교회를 ‘지겨워하고’ 있다.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광란의 종교의식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하기조차 한다. 기독교는 반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한국교회가 존경할 만한가 하고…’ 그에 대하여 예, 하고 대답하는 이를 찾기는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신앙을 희화화하고 대중들에게 가벼운 웃음을 선사하는 미끼로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하려는 얄팍한 선교술수가 판을 치고 우경화된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로 전락한 현실에서 본회퍼에 대한 관심은 존재할 수 없다. 본회퍼가 보았던 현실의 모순과 억압에 눈뜨지 못하고 있는 이름만의 교회일 뿐이지 사실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탐욕과 무지에 찬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그 교회 앞에서 현실은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 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파하며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자, 복이 있다”고.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본회퍼가 예수의 뒤를 따라 그리도 애통해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과는 달리 욕심에 휩싸여 또 하나의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는 그 권력을 난타하는 양심의 목소리가 뜨겁게 들려야 하는 그런 지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