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 (마가복음 14:3-9)
먼저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179명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있지만, 이 위기를 잘 극복해서 정치인들이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나라, 가진 자들이 청지기 의식을 갖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나라, 지식인과 전문인들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한 삶을 위해 봉사하는 나라로 우뚝 서기를 소원합니다.
2025년 새해 두 번째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2025년 새해 동안 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면, 대개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죽이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맘대로 안 되면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듭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져서 너를 죽이는 것이 결국 자기까지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너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 가운데 너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경우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다니요. 어림 반 푼어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자기를 죽입니까. 어떻게 자기를 희생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너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을 죽이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 기독교인 역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달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너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죽이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비기독교인과 달라 보이지를 않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다고 해서 성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호칭하지만,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고 안타까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방식, 아니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 여인의 삶의 방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신앙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 신앙인은 주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깨뜨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여인이 소중한 향유를 담은 자신의 옥합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처럼, 우리 신앙인 역시 우리 자신을 깨뜨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깨어져야 합니다. 남을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만을 세우려는 알량한 자존심이 깨어져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간치 않고 자신의 명예와 자랑 그리고 부귀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며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깨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얻기 위해서 혈연이다 학연이다 지연이다 하며 줄을 대는 연고주의가 깨어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나 몰라라 하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우리의 무관심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무릎을 꿇기만 하면, 우리의 어떤 것이 깨어져야 할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이 깨져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만을 고집하는 요나 같은 내가 깨어져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정한 예언자였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우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강대국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멸망의 계획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지 않을까 자신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멸망되어야지 행여나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멸망 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민족적인 이기심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우주 만물의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요, 온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편협된 하나님으로 축소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뜻을 앞세워 니느웨와는 방향이 다른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엄청난 풍랑을 만났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자초했습니다.
어디 자기 한 사람만 고생했습니까? 배에 탄 많은 사람이 고생해야 했고, 그들의 소중한 물질적 손실까지 초래해야 했습니다.
내가 깨지면 그것으로 족한 것인데, 내가 깨지지 않아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이웃과 친지들도 심지어 교회와 국가까지도 어려움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약한 여인 에스더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만 장군의 간교한 꾀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부인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깨뜨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왕이 부르기 전에 왕의 면전에 나아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에스더는 자신을 깨뜨려 죽기를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심정으로 왕에게 나아갔고, 그것이 왕의 사랑을 더 크게 받는 기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부림절의 기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들, 아니 우리 기독교인만이라도 주님 앞에서 자신을 깨뜨리며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 희망이 도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마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절망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26-27)
둘째로, 우리 신앙인은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여인에게 있어서 향유는 결혼준비물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것이고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향유가 옥합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향유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직접 물려받은 유산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값비싼 향유보다 예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우선순위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기준에서 우리 삶의 모든 우선권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이 찬송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깊은 영감을 주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 예수가 나에게 귀한 것은 그분이 나에게 세상 부귀를 선물하고, 세상 행복과 세상 자랑을 보증해 주기 때문은 아닙니까. 주 예수가 나에게 귀한 것은 그분이 범사에 잘되도록 나를 인도해 주시고, 내가 건강하게 살도록 지켜주시기 때문은 아닙니까. 만일 이러한 우선순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오래지 않아 그 신앙은 산산조각이 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좋을 때는 세상 부귀도, 세상 행복도, 세상 자랑도 비교적 쉽게 얻어집니다. 무엇이든 조금만 노력해도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에게 ‘헬조선’이라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는 마음먹은 대로 되거나 얻어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도 상황은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많은데 실제로 얻어지는 것이 없다면, 주 예수가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주저하다가 주님에 대한 신앙 자체를 포기하는 일마저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우선순위에서 주님을 다른 것들 다음에 두는 사람은 사실은 주님을 복 빌어주는 무당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효험 있는 무당을 찾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라며 이 찬송가를 종종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빈번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공부란 것이 왜 그리도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까. 한 번 마음속으로 솔직하게 자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의 자녀가 신앙을 조금은 소홀히 해도 일단은 한국의 명문대학 SKY대학의 학생이 되는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설사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더라도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는가.”
대부분 교회는 어린아이들과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에게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주일학교는 물론이고, 성경학교다 신앙수련회다 특별한 프로그램을 적지 않게 운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 부모님들조차 주일에 학원을 보내는 것이 자녀의 학교 성적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주일예배조차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신앙 때문에 자녀들의 공부를 포기하거나, 자녀들의 인생 진로를 소홀히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신앙이, 외적인 성공보다는 주님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신앙을 제대로 확인한 학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공부해야겠다.”라고 결심한다면, 누가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하거나 게을리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할 것이다.”(마 6:33)
셋째로, 우리 신앙인은 주님을 우선시하는 우리의 삶을 누군가가 비난할지라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여인 주변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여인의 신앙을 칭찬한 사람은 주님 말고는 없었습니다.
여인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값비싼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일이지 하필이면 예수님의 머리에다 허비하느냐며 분을 내며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분을 내면서까지 여인을 책망했습니까. 그들은 여인처럼 자신들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도 있었고,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지만, 그들 내면에는 예수님보다 더 귀한 다른 것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 권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면, 적어도 몇 고을을 다스릴 감투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장 귀해서 예수님을 쫓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질 세상 부귀와 권력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예수님을 쫓는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숨겨진 기대가 수치스럽게 드러났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수치를 겸허히 받아들였다면, 회개하고 죽음을 각오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텐데, 그들은 수치를 외면하고, 가난한 자들을 운운하며 고상한 척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은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우선시하는 우리의 신앙 때문에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하고 뇌물을 바칩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불의한 돈도 챙깁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위조문서도 만들고, 사기도 칩니다.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자행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을 삶의 지혜라고 말하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히려 손가락질합니다. “세상은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니란다. 너는 숙맥도 보통 숙맥이 아니구나. 온실 안의 화초처럼 세상 물정을 모른 채, 바보같이 살지 말고 세상에서 남 보란 듯이 멋지게 살아봐.” 이처럼 세상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자신들 같은 무리로 만들기 위해서 언제나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자신에게 손해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진리에서 어긋난 일이라면 수용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진급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부귀나 영화가 자기에게서 점점 멀어질지라도 세상에서 좁은 길을 기꺼이 걸어갑니다.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요셉은 칭찬받기는커녕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할지라도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따르겠다는 각오가 우리 신앙인에게 확실히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진리 위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 16:24)
끝으로, 우리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 있을지라도 주님만을 우선시하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주신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여인은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만은 인정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가 기념되리라.”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졌습니다. 세계 곳곳에 사는 기독교인들치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우리 주님 예수님과 함께 오늘도 대학교회 주일예배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의 인정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남녀공학의 고등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당시 저는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학교 도서관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공부하는데, 친구들이 나갈 때마다 저에게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학년 전체에서 1등을 하던 친구도, 전교 회장을 하던 친구도, 제일 키가 크고 잘생긴 친구도 ‘자기가 먼저 간다.’며 저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나갔던 것입니다. 도서관 구조는 가운데 반을 잘라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마주 보며 공부하는 구조였는데, 그날따라 맞은편에 있던 여학생들이 잘 볼 수 있는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제가 얼마나 으쓱해졌겠습니까. 그날 저는 갑자기 목이 뻣뻣해져서 하마터면 부러질 뻔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잘났다는 친구들이 키도 작고 별로 주목할 것이 없던 저를 친한 친구처럼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별거 아닌 인정에도 목이 부러질 지경인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친히 우리의 구주로 오신 만왕의 왕, 예수께서 우리를 인정해주신다면, 우리는 그 인정에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읽었던 설교 예화 가운데 재미있는 예화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 교회에 부임해서 오전에는 교회 집무실을 지켰는데, 정오만 되면 한 노인이 교회 안에 들어갔다가 잠깐 뒤에 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목사님은 궁금해서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으신가 여쭈었는데,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으로, 예배당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왔다가 갑니다.”라고 인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다녀가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노인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궁금해서 수소문해보니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 중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노인께서 예상과 달리 방긋 웃으며 병원 생활을 잘하고 계셨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목사님이 질문했습니다. “어르신, 수술하시고 힘드실 텐데 잘 이기고 계시네요.” 그러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정오만 되면 예수님께서 병실 문을 열고 ‘내가 왔다가 가네’ 말씀하시며 손을 흔들고 가시는데, 어찌 힘이 들겠습니까.” 주님만을 순수하게 생각한 노인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매일 찾아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설교를 위해 임의로 만들어진 예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우선시하는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주님만은 우리의 중심을 헤아리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의 진실한 삶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나는 법입니다. 사악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할지라도, 결국에는 진실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진실한 삶이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주님만은 “네가 나를 위해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나의 즐거움에 동참해라” 칭찬하시며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사랑하는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깨뜨려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깨고, 알량한 자존심을 깨고, 어리석음을 깨고, 악한 습관을 깨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귀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깨뜨려 향유보다 귀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자기 자신을 깨뜨려 자신의 귀한 것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보다 귀한 분도, 주님보다 귀한 것도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요 참 보배이십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 존재와 우리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항상 우선순위에 오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 사람은 자기들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소홀히 하는 우리를 향해서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러한 경우가 생길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상급이 세상의 어떤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직시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진실함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걷는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거두실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를 당신의 자랑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주님만은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인정해 주실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삶의 모든 자리가 매우 힘들고 암울합니다. 희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 앞에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는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 삶의 모든 자리가 우리 때문에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살기로 결단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2025년 내내 함께하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깨뜨리게 하옵소서. 이기적인 욕심과 자존심, 어리석음과 악한 습관들을 깨뜨리게 하옵소서. 세상에는 주님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시고, 참 보배이신 주님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 있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기어이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디서나 꿋꿋하고 당당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종훈 목사 (연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