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사 52:7-10, 히 1:1-4, 요 1:1-5, 9-1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참 반갑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성탄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여러분의 일터와 교회 위에 가득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의 어둠 가운데 사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어둠은 참 빛 되신 예수를 감당할 수 없었고, 참 빛 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참 빛 되신 예수를 외면했고, 참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린아이들이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서 하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존재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역시 비슷한 오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참 빛의 존재 역시 그 존재를 외면하는 어둠으로 인해서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의 어둠이 진하면 진할수록 참 빛 되신 예수는 더욱 밝게 빛을 비출 뿐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기어이 물리치는 원천이자 희망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참 빛으로 오시어서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셨고, 지금도 물리쳐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있더라도 손전등 하나만 쥐고 있으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주변을 어느 정도 분별하면서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 생활할 때 한밤중에 천리행군이나 군사작전을 하다 보면, 숲속으로 들어가 동서남북을 분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산의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산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서 주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때 어느 민가의 반짝거리는 작은 불빛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얼굴과 손이 까시나 돌에 긁히고, 발톱이 빠지고, 육체적인 고통이 만만치 않을지라도, 그 작은 불빛이 주는 기쁨과 희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어둠 속의 빛은 우리에게 기쁨이자 희망이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희망의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둠의 죄 가운데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죄인지 드러내며 돌이키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하고, 구원의 삶을 희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은 별 볼 일이 없었던 여인 마리아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던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인으로서 위대하고 더없이 고고한 아이를 출산할 것을 기대하며 미래를 희망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은 가난한 남자 요셉에게 전해졌습니다. 별 희망없이 무기력하게 살던 요셉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대하며 미래를 희망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은 들판을 떠돌며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힘겨운 삶을 감수하며 양을 쳐야 했던 목자들은 온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기대하며 미래를 희망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은 점성가인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의식으로 차별당하던 점성가 이방인들은 인류를 구원할 예수를 기대하며 미래를 희망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사랑의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는 죄인이라고 상종을 거부하던 사람들 모두의 친구가 되시어서 그들이 힘차게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에너지를 공급하셨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의 속국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인 세리들을 손가락질하며 외면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창기들은 자기를 보호해 줄 남편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서 몸을 팔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더럽힌다며 창기들을 외면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영생을 나누는 친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은 각종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며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환자들을 하나님께 죄를 지어 저주받은 존재라며 외면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온몸으로 터치하시면서 친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누구에게나 사랑의 친구로 다가가신 분이셨습니다.
아기 예수는 평화의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천사들은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말하며 아기 예수의 오심을 찬양했습니다. 그리스 시대 도시국가들의 평화는 전쟁이 실제로 진행되지 않아서 평화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을 준비하는 활동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언제나 전쟁 전야였습니다. 이러한 평화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이었는데, 이는 주변 국가들에게 늘 위협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평화였는데, 강대국이 규정하는 강제적인 질서라서 안정된 상태처럼 보였지만, 이면에는 권력의 불균형, 강제적 평화 유지, 문화적 제국주의, 내부 갈등의 무시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거짓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 샬롬(Sha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개인, 공동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구원에서 오는 조화와 충만함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사야는 세상의 포악한 왕들과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통치와 복음의 복된 소식을 위해서 오시는 아기 예수를 참 평화의 왕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의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삶의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진정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의 겸손과 사랑의 삶, 누구라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삶,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은 우리가 그를 따라가며 살아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여실히 보여주며,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진리가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삶의 궁극적인 방향으로 설정하셨고, 지금 여기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도둑이나 이리로 오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끄는 목자로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죄 가운데 오염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참 빛 되신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특권으로 죄에 대해 당당히 맞서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1장 12절 말씀은 “아기 예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믿고 맞아들이면 우리 역시도 아기 예수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모든 특권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빛을 강렬하게 내뿜는 태양을 똑바로 직시하는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하며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거부함으로써 여전히 죄 가운데 살기 때문에 죄의 어둠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 예수를 환영했고, 그를 참 빛으로 오신 구원자로 믿었으며, 그 결과 독생자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지님으로 죄의 어둠 가운데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신비이자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사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세상의 어디를 보든지, 세상이 짙은 어둠 한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에는 배부른 줄 모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끝없이 추구하는 재물 탐욕의 어둠이 팽배해 있습니다. 돈이 삶의 목적이 되기나 한 것처럼, 돈밖에 모르는 천민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와 함께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여기며, 돈 되는 일에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면 된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느냐, 얼마나 좋은 차를 타느냐, 어느 동네에서 살고 있느냐로 신분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물질적 차원의 수준이 다르면 아예 상종하지 않거나 다른 수준의 아이들을 놀리는 풍조까지 생겨났을까요. 법을 평등하게 집행해야 하는 법정에서조차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적용되고 있으니, ‘설국열차’라는 영화에서 열차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질주하듯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물질적 탐욕의 어둠 한가운데서 질주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쾌락을 마음껏 즐기려는 사람들이 절제되지 않은 정욕의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정욕은 사람 전체를 보지 않고, 사람의 감각적인 외모에만 집중합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인격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즉각적인 감정만을 표출합니다. 지속적인 관계와 성숙한 대화를 배제하고, 찰나적인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원하는 판타지를 만들어 허상과 관계합니다. 상대의 행복과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상대를 자신을 위한 소유나 도구로 생각합니다. 정욕의 촉발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정욕 자체만을 극대화하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마약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형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 마약을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경찰이 마약과 전쟁한다고 하지만, 요즈음 대학생들조차 마약에 중독되어간다고 하니 실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우리의 정치 현장은 어떠합니까. 어둠의 깊은 심연 가운데 있습니다. 국가의 수반이자 군통수권자인 최고 권력자 윤석열 대통령이 무속에 의지해서 자신의 정책을 수립했고, 무속에 의지하며 정치권력을 행세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토론했습니다. 그는 무속인의 조언을 따라 역대 대통령들의 거처이자 집무실이었던 청와대를 뒤로 하고 수조 원을 들여 용산에 새로운 대통령 주택과 집무실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황제와 같은 최고 권력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정책에 2,000이라는 무속의 숫자를 고집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비상계엄령을 무리하게 발동할 때도 세 개의 왕자 조합이 가능한 십이(十二)월, 삼(三)일 오후 십(十)시, 삼십(三十)분을 선택했습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무속의 어둠 속에 머물자, 우리 민주주의의 많은 시스템이 일거에 파괴되었습니다. 정부는 합리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없었고, 여야는 제대로 된 타협과 협치를 할 수 없었으며, 국제사회에서 국격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29 민주화선언 등 수많은 민주시민의 희생으로 도달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50년 전의 군사정권 시대보다 못한 검찰 독재의 시대로 변질되었습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 있지만, 오늘 우리의 정국은 심히 요동치며,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어떠합니까.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의 어둠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을 반대하며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년 10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교전 중에 있습니다. 최근 북한군까지 가담하면서 종전의 기미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와 난민이 발생했습니까.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발발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역시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격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폭격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민간인 1,400여 명, 팔레스타인 민간인 42,600여 명이 사망했고, 부상자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생필품의 공급을 비롯하여 인도적인 위기가 매우 심각합니다. 이렇게 전쟁이 발발하면 누구보다 여성과 어린아이들, 노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 역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종전과 평화협정을 이루지 못한 채,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남에서 북으로 보내는 대북 전단과 북에서 남으로 보내는 오물 풍선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남 확성기 방송으로 국경지대 주민들 대다수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구촌과 한반도 전체가 평화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희망은, 넘치는 사랑과 평화는,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오직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 말고는 없습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제국주의적인 억압과 착취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로마 제국주의의 상징인 가이사의 것조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전쟁과 폭력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갖다 대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증오와 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라도 품고서 기도하며 사랑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다른 누군가를 자기를 위해서 희생시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시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아가 인간과 자연 사이를 화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실대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지금 여기에서 더불어 사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우리의 기쁨과 희망,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되셨으며,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어둠도 참 빛이신 예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진정으로 환영하며 기쁨으로 맞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구원의 반열에 굳건히 서 계십니까. 여러분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독생자 아기 예수처럼 빛을 발하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맞이한 성탄절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로 인해서 우리도 참 빛의 일부가 되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며 살기로 결단하는 기독교 최고의 절기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살아가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만나는 모든 이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며,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살아가기를 아기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참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 주님이시여,
우리가 죄의 어둠 한가운데 있음을 인정하고 참회하게 하옵소서. 당신만이 우리의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참 빛이 되심을 인식하고 온몸으로 감사하며 맞이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참 빛이 되시는 당신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참 빛의 일부가 되어,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주며,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종훈 목사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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