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5:18~27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찬송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Ⅲ. 심판을 모면할 방법이 있음 (암 5:16-20)
(1) 다가오는 멸망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주어진다(16,17절). 이 경고는 평상시보다 한결 큰 위엄을 갖추고 시작된다. 이것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니고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곧 절대 주권을 가지신 `아도나이`(여호와)의 말씀이다.
(2) 이 경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에게 책망이 쏟아진다(18절).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이들은 진정 전쟁과 혼란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는 흡사 안주하지 못하는 영혼이 변화를 갈구하는 것과 같다. 또는 자기들이 받는 재앙을 슬퍼하는 중에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대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는 여호와의 날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에게 대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이 오기를 사모하느뇨. 너희는 그 날이 조롱할 만한 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18절). "하나님께서 낮을 어둡게 하시면 세상이 그것을 밝히지 못하리라." 그는, 더 나아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최악의 경우가 어떠한지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해 준다(19절). "너희는 마치 사자를 피하려다 곰을 만나는 사람같으며, 또는 멀리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집에 들어가서 안심하며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 사람과 같도다."
Ⅳ. 가식적인 예배의 무익함 (암 5:21-27)
본문은 그들이 계속 죄를 범하고 있는 동안 헌신을 가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보잘 것 없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준다.
(1) 그들의 위선적인 예배는 하나님께 몹시 불쾌한 것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던 것을 모방하여 벧엘에서 절기를 지켰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회`를 가졌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번제`를 드렸으며 아울러 `소제`도 드렸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하여 `화목제`를 드렸으며, 가지고 있던 짐승 중에서 가장 살진 것을 골라 `희생`을 드렸다(21,22절). 성전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을 똑같이 모방하여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비파를 연주했다(23절). 이와 같은 예배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계속 죄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허락 받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셨다.` 위선보다 더 미움을 사며 멸시받는 일은 달리 없다. 내가...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은커녕 하나님께 대적하는 마음만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실 것이다.
(2) 이와 같은 희생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24절). 즉 "너희 가운데 전반적인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라. 신앙심(하나님의 공법)과 정의가 너희 위에 영향을 미쳐야 할지라. 너희의 땅에 이 영향이 물같이 흐르게 하여 너희의 모든 악과 불경을 꺾어버리게 하라. 그 영향이, 범람하는 물처럼 널리, 그리고 하수같이 세차게 흐르게 하라. 공의가 충실히 집행되도록 하며, 편견과 뇌물로 인하여 그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하라. 공의가, 흐르는 물과 같이 깨끗하게 하며 타락으로 인하여 흐려지지 않도록 하라. 즉 하수처럼 흐르게 하라"라는 의미이다.
(3)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인 교훈에 비하여 희생 제사법에 그다지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신다(25절).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아니라. 너희는 그러지 않았도다." 대체적으로 그 당시에는 희생 제사가 무시되었다. 출애굽한 이듬해 이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유월절은 지켜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유월절을 소홀히 한 점을 잘못이라고 책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계속 베푸셨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단지 그들의 불평과 불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비록 이렇게 의식적인 제사는 없이할 수 있지만 영적인 제사는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정의롭고 정직하다 할지라도 기도와 찬송의 부족,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상한 심령의 부족을 용서받을 수는 없었다.
(4)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데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희생이 하나님께 열납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다. 혹자는 25절 말씀을 "너희가 내게, 곧 나에게만 희생을 드렸느냐.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열납할 리가 있겠느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너희가...식굿...을 지고 가리라(26절). "너희가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신당을 지고 가리라.
(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우상 숭배를 고집하는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형벌을 내리셨다(27절).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앗수르인들에게 사로잡혀 간 것은 아람인들에게 사로잡혀 가는 것보다 훨씬 멀었다.
**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과 축복은 무엇인가?
아모스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먼저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 심판의 날(5:18)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날이며(5:27),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위선적인 예배와 외식적인 신앙에 대한 심판으로 애통함을 가져야 했습니다. 비록 선택된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을 살 때에는 의로운 여호와의 날에 심판과 징계의 대상이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심판의 날에 대한 명칭에는 구원의 날(요6:44), 부활의 날(6:39), 유쾌한 날(행3:19), 회복의 날(행3:21), 영광의 날(딛2:13), 낮(롬3:12), 권고하시는 날(벧전2:12), 여호와의 날(암5:18), 구름과 흑암의 날(욜2:2), 분노의 날(습1:15), 주의 날(고전1:8), 멸망의 날(벧후3:7), 진노의 큰 날(벧후3:7), 형벌의 날(호9:7), 두려운 날(욜2:31), 여호와의 희생의 날(습1:8), 경고의 날(습1:16) 등이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종교적 범죄(5:21-26)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 종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은 행했으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은 하나님의 유일신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가증되고 외식적인 예배를 버리고 참회와 회개의 상한 심령을 드리게 하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