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교회력 주일(11월 17일, 성령강림 25주, 창조절 12주) 설교 *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ree610 2024. 11. 12. 12:44

교회력 주일(11월 17일, 성령강림 25주, 창조절 12주) 설교 자료
*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글쓴이 : 조헌정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 성서에 기록된 문자는 ‘닫힌 말씀’(텍스트1)이다. 이 ‘닫힌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정치/문화/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역사적 상황(컨텍스트1)에 비추어 해석(exegesis)할 때, ‘열린 말씀’(텍스트2)이 된다. 설교는 이 ‘열린 말씀’(텍스트2)을 오늘의 상황(컨텍스트2) 에 비추어 재해석(eisgesis)하는 작업이다. 이때 비로소 성서는 오늘의 청중을 향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텍스트3)이 된다. (조헌정)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지구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반다나 시비)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 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령강림 후 혹은 창조절로 부른다.

[주일 본문]
삼상 1:4-20; 삼상 2:1-10; 히 10:11-25; 막 13:1-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무엘상 1:4-20}

4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는, 늘 아내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아들딸에게 제물을 각각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다.
6 주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
7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다. 한나가 주의 집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늘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9 한번은, 엘가나 일행이 실로에 있는 주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그때에 제사장 엘리는 주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11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께서 주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나를 기억하셔서, 주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2 한나가 주 앞에서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가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고,
14 그를 꾸짖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
15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16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
18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19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께 경배를 드리고 나서,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엘가나가 아내 한나와 동침하니, 주께서 한나를 기억하여 주셨다.
20 한나가 임신을 하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주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신학적 관점]

지방분권적인 사사기(판관) 시대를 끝마치고 중앙집권적인 왕권시대로 들어가는 건널목에서 하느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지도자 사무엘의 탄생에 관한 일화로서 YHWH의 인간 역사 개입을 말하고 있다. (참조. 사사기는 이렇게 마친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그러나 신명기적 사관은 왕권 또한 경계한다.) 부차적으로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불임 여성들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낳는다. 이들에게 한나의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목회적 관점]

아이가 생기지 않는 부부들은 한나의 기도를 따라 첫 아이를 하느님께 바치는 서원 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 서원은 꼭 자녀가 목사나 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대해 당신의 답변은 무엇인가?

한나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엘리 제사장의 착각은 나이로 인한 판단력 저하에 기인한다. 목사 정년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주석적 관점]

11절,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민수기 6장의 나실인(nazir, 히브리어의 뜻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을 말한다. 나실인으로 삼손(삿 13장)이 있다. 삼손과 사무엘의 얘기를 종합하면, 나실인은 불임 여성이 기도를 통해 낳는 아이로 한정할 수도 있다.

[설교적 관점]

본문은 잘못하면 출산은 여성의 의무이자 본분으로 읽히게 되면서, 불임으로 인한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고대의 가부장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환경 변화로 인해 불임률 또한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출산만을 여성들의 존재 이유 혹은 창조 이유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여성들이 인간 개체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전통적 관점보다는 그간 남성들만이 누려왔던 사회적 성취감을 통해 찾아가려는 여성주의적 관점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남성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육아를 함께 담당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도를 위한 헌신과 회심이 필요하다.

오히려 본문은 YHWH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이 고통당하는 한 여인을 통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다고 하는 구원의 기본을 말씀하고 있다.

{사무엘상 2:1-10}

1 한나가 기도로 아뢰었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2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3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4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5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6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7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8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놓으셨다.
9 주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10 주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께서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4)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히브리서 10:11-25}

11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서서, 직무를 행하고,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오직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그리고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그분은 한 번 자기를 바치심으로써, 거룩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셔서, 그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15 그리고 성령도 우리에게 증언하여 주십니다.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 "나 주가 말한다. 그날 이후에, 내가 그들에게 세워 줄 언약은 이것이다.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다가 주고, 그들의 생각에다가 새겨 줄 것이다."
17 그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18 죄와 불법이 용서되었으니, 죄를 사하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19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22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을 굳게 잡읍시다.
24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25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신학적 관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이심을 여러 차례 말하는데, 이는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반복되는 동물희생제사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단 한 번(once for all)의 희생으로 완결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본문은 이에 대한 결론으로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신학적(‘대속’)이고 교리적(‘보혈의 피’)인 신앙 고백 차원을 넘어서서 ‘사랑과 선한 일’이라는 공동체의 신앙 행동 강령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을 값싼 은혜의 교리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목회적 관점]

용서의 선언을 할 때,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라는 선포에 이어 ‘이제는 당신을 옭아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십시오’(22절) 라는 말을 덧붙임이 필요하지 않을까?

[주석적 관점]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누구를 뜻하는 말일까? 아마도 유대인 추방령과 같은 로마제국의 핍박 아래에서 모임을 쉽게 포기하는 유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서로 마음을 써서’(22절), 개역개정은 ‘서로 돌아보아,’ 공동번역은 ‘서로 격려해서’라는 부드러운 단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리스어 proxysmon은 상대를 ‘자극하다(stir up)’ 혹은 ‘화나게 하다(provoke)’라는 보다 강한 어조를 담고 있다.(『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Walter Bauer, 1958. 629). 이는 마치 부모가 잘못된 길로 가려는 자녀를 훈계하는 것 같은 쓴소리 충고(忠告)를 뜻한다. 따라서 ‘서로 충고함으로’가 보다 정확한 번역이다.

[설교적 관점]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라는 구절은 목사들이 매우 즐겨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모여 예배하는 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교회 밖 곧 사회적 나눔과 정의를 세우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 교인들끼리의 친교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인들끼리의 친교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에 자발적이다. 그러나 ‘서로 마음을 쓰다’는 앞 구절의 의미가 ‘쓴소리로 서로가 충고함으로’의 뜻을 갖는다. 곧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도록 하는 강제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3:1-8}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4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7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유대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의 영향 아래 쓰인 글로 ‘작은 묵시록’(little apocalypse)이라 불린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전쟁, 지진, 기아 등의 우주적 파국(破局) 곧 세상 종말의 현상 속에서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을 경계하고 있다. 묵시문학은 정치적 핍박 아래에서 어둠과 절망의 시간(크로노스)을 넘어 약자의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저항의 글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도피적 종말론이 아닌 현실 변혁을 통한 새로운 미래를 가꾸어나가는 혁명의 문서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고난은 새 역사 탄생을 위한 하나의 ‘진통(카이로스)’ 의 과정임을 말한다.

[목회적 관점]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주술(呪術)과 같이 사람을 속이는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제어되지 않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더해지면서 주술적 행위는 더 증가하기 마련이다.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 가운데는 요행과 운수를 바라는 주술적 신앙에 빠지기 쉽다.

[주석적 관점]

올리브(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동쪽에 위치한 해발 850미터의 산이다. 이 산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세우셨고(3:13), 홀로 기도하셨고(6:46), 변화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9:2-8). 곧 새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에스겔 11장 23절과 스가랴 14장 3절에서 같은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3절의 ‘마주 보고’가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9장 2절의 변화산 이야기 그리고 14장 33절의 (올리브산 서쪽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 장면에서는 12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 이름만 등장한다. 이 둘 사이에 있는 본문에서는 안드레가 포함이 된다. 이는 마가공동체 내의 서열을 뜻하는 것인지 모른다.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더 중시된다.

[설교적 관점]

마가복음은 7년간의 기나긴 피비린내 나는 유대전쟁(CE 66-73년) 직후에 기록된 책이다. 미래 예언의 형식으로 쓰였지만, 실제는 과거를 통한 현재에 대한 성찰임과 동시에 자기 미래에 대한 새로운 예언이기도 하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자기가 하늘이 보낸 그리스도(메시야) 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타날 때,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역사의 주인 의식을 갖고 부당한 정치적 폭력과 사회적 핍박을 견뎌 나갈 것을 촉구한다.

최후 심판이라는 위협적인 묵시(默示)는 하느님 믿음이라는 렌즈를 통과하면 변혁과 희망의 계시(啓示)로 변한다.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제국들이 벌이고 있는 국경 없는 군사/경제적 전쟁, 기후변화로 인한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태풍과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제1성서의 부족 신 아브라함 YHWH 신앙을 넘어, 바울의 인류는 한 가족이라는 창조주 신앙을 넘어,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여 있다는 지구 어머니(가이아)로서의 새로운 신(神)개념이 요구되고 있다. 묵시록은 바로 그러한 혁명 신앙을 인간 글 틀 안에 담아낸 기록이다.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