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창조절 5주) 주일 교회력 설교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글쓴이 : 조헌정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더 7:1-6, 9-10; 9:20-22; 시 124; 야 5:13-20; 막 9:38-50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에스더 7:1-6, 9-10; 9:20-22}
1 왕과 하만은 에스더 왕후가 차린 잔치에 함께 갔다.
2 둘째 날에도 술을 마시면서 왕이 물었다. "에스더 왕후, 당신의 간청이 무엇이오? 내가 다 들어주겠소. 당신의 소청이 무엇이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3 에스더 왕후가 대답하였다. "임금님,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었고, 임금님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시면, 나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간청입니다. 나의 겨레를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소청입니다.
4 나와 내 겨레가 팔려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살육당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종이나 여종으로 팔려 가기만 하여도,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한 일로 임금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 왕후에게 물었다. "그자가 누구요? 감히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자가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 밝히시오."
6 에스더가 대답하였다. "그 대적, 그 원수는 바로 이 흉악한 하만입니다." 에스더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하만은 왕과 왕후 앞에서 사색이 되었다.
9 그때에 왕을 모시는 내시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하르보나가 말하였다. "하만이 자기 집에 높이 쉰 자짜리 장대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것은 임금님을 해치려는 자들을 제 때에 고발한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고 세운 것입니다." 그때에 왕이 명령을 내렸다. "하만을 거기에 매달아라!"
10 사람들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운 바로 그 장대에 하만을 매달았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왕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20 모르드개는 이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여 두었다. 그는 또, 멀든지 가깝든지,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는 모든 지방에 사는 유다 사람들에게 글을 보내서,
21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명절로 지키도록 지시하였다.
22 그날에 유다 사람이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났으며, 그날에 유다 사람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뀌었으므로, 모르드개는 그 이틀 동안을, 잔치를 벌이면서 기뻐하는 명절로 정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지키도록 지시하였다.
[신학적 관점]
에스더서는 YHWH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아 정경화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책이고, 유대 명절 부림절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비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직접 관계가 없어 에스더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어려움이 있다.
다만 에스더 왕비가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서게 되고 민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게 되는데, 이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역사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약자와 함께 하시는 정의의 하느님 사상이고, 둘째는 공동체(민족)의 안전이 먼저 보장될 때, 개인의 안전 또한 보장된다는 가르침으로 이는 개인으로 파편화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씀이다.
[목회적 관점]
오늘날 젊은이들은 민족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 특히 남북민족통일에 대한 관심이 없다. 통일 후 비용 부담이 크다고 오히려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 위기 상황에서 모두 개인 성공과 안전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남한의 군사비 지출 비율은 세계 최고이다. 남북화해가 이루어져 무기구입 비용만이라도 복지비로 돌린다면, 전 국민에게 엄청난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주석적 관점]
에스더서에서 예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새롭게 주목을 받는 구절이 있는데, 그건 에스더 왕비가 아닌 그전 왕비였던 와스디 왕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하수에로왕이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왕은 고관대작들에게 와스디 왕비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싶어 잔치자리에 나오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왕후가 이를 거절한다. 왕은 분노했고, 고관대작들은 이를 방관하면 남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니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왕후를 폐위시킨다. 이는 고대 남성중심시대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남성들의 노리개 역할을 거부한 와스디 왕비의 행동이 여성해방운동에 귀감이 된다. 에스더만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 영웅이 아니라, 와스디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여성 영웅이다.
[설교적 관점]
개인 구원에 앞선 민족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에스더와 삼일독립항쟁의 유관순열사를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크게 보아 에스더서는 한 국가 내에서 소수민족이 당하는 아픔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 사는 소수민족들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일본의 조선족들이 당하는 차별은 매우 심각하다.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이 징용으로 끌고간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조선어를 가르친다고 하여 국가보조금도 지불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남북 어느 나라도 선택할 수가 없어 무국적자로 남아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에서 온 많은 이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인권에 대해 교회가 많은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 앞장을 서서 대구에서의 모슬렘 성전 건립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입장을 바꿔 모슬렘권에서 일하시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 탄압인 것이다.
{시편 124}
1 이스라엘이 하는 말, "야훼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더면,
2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 야훼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더면
3 그들은 달려들어 살기등등, 산 채로 우리를 집어 삼켰으리라.
4 거센 물살에 우리는 휩쓸리고 마침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리라.
5 거품 뿜는 물결에 빠져 죽고 말았으리라."
6 야훼를 찬미하여라. 우리를 원수들에게 먹히지 않게 하셨다.
7 새 잡는 그물에서 참새를 구하듯이 우리의 목숨을 건져 내셨다.
8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살아났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의 이름밖에는 우리의 구원이 없구나.
{야고보서 5:13-20}
13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15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19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신앙의 실천, 곧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 사도의 기본은 기도의 신학이다. 기도는 타인을 위한 기도 곧 개인 영혼 구원은 물론 엘리야와 같이 민족 구원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
[목회적 관점]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는 비밀을 지키도록 훈련받은 목회자(‘장로, presbyter’)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다. 공동체의 기도가 병든 자의 치유에 효력이 있다는 것은 통계 의학에서도 증명이 된다. ‘플라시보 효과’와 같이 약과 더불어 진행하는 심리적 치료 효과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예수께 나아온 한 병자는 친구들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는다. (참조 막 2:1-12)
[주석적 관점]
예수께서 병든 자를 치유하실 때에 ‘기름’을 사용한 예는 없다. 그러나 제1성서 시대 때로부터 병 치료를 위해 기름을 발랐었다. (참조 사 1:6) 선한 사마리아 사람 또한 강도 만난 사람의 치료를 위해 기름을 발랐다.
[설교적 관점]
1907년 조선의 교회는 회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교회 부흥의 큰 계기가 되었으나 동시에 신앙이 개인 내면화하게 되는 잘못을 저질렀다. 당시는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때로 나라와 민족이 큰 위기 속에 있었던 시기였다. 개인이 과거의 잘못을 아무리 회개한들 나라의 독립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성서는 역사적으로 보면 히브리 노예들의 출애굽 곧 노예로부터의 자유인이 되는 자유와 해방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조선교회는 노예화되는 시기와 부흥이 맞물려 있다. 엘리야의 비를 멈추게 하고 내리게도 한 기도는 민족을 도탄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기도였다. 오늘날 교회에서 외쳐지는 기도가 지나치게 개인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늘에 올라간 대부분의 기도들이 쓰레기로 처리되고 있다.
{마가복음 9:38-50}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그 꺼지지 않는 불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4절 없음)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6절 없음)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 짠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신학적 관점]
불트만이 비신화화 논쟁에서 이미 설파한 것처럼 천동설과 삼층세계와 같은 비과학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고대인들을 향한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문에는 ‘귀신’과 ‘지옥’이 등장한다. 이를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 귀신과 지옥은 하느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악의 상징이다. 오늘날 악은 개인윤리의 관점과 사회구조의 관점을 함께 다루어야 하다. ‘헬조선’이라는 용어는 자유경쟁의 틀에 갇힌 남한의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말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흙수저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를 악으로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지옥으로 이해하는 신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목회적 관점]
교회 내에서 목회자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목회를 반대한다고 해서 예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가 칭찬을 받는 것처럼 그 사람 또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폭넓은 목회를 지향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요한이 말하는 ‘어떤 사람’은 누구인가? 이는 마가공동체 밖의 다른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이 개인인지 아니면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지속적으로 기적을 행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 이름으로 여러 공동체들이 존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40절을 완전히 반대로 기록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마 12:30, 눅 11:23) 이는 Q복음이 본래 이렇게 쓰여 있을 수도 있지만, 마태와 누가가 이를 알면서도 굳이 반대로 기록한 것을 보면, 마가와는 달리 마태와 누가가 처했던 초대교회 내부의 분파 다툼이 훨씬 더 심각해졌음을 의미한다.
“죄짓게 하는 사람”이 네 번 나온다. 이는 skandalizein는 ‘덫을 놓아 남을 넘어지게 하다.’ 이는 곧 당시 선생으로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향한 비난이다. 여기서 덫은 토라의 법적 해석 곧 613개의 계명 코드화이다. 신체 절단의 비유는 세상에서 선생의 역할이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삶의 철저함(radicalization)을 뜻한다.
‘지옥’으로 번역한 ‘게헨나(Gehenna)’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의 이름인 ‘힌놈’의 합성어로 ‘힌놈의 골짜기’(수 18:16)를 말한다. 이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의 이름으로 고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자식들을 몰록에게 희생 번제했던 장소(대하 28:1-3; 33:1-6)로서 예레미야 또한 이를 ‘살육의 골짜기’라 불렀다(렘 7:31-34). 이후 죄수들의 시체와 짐승들의 사체를 불태우고 오물을 버리는 쓰레기터가 되어 항상 구더기가 붐비고 연기가 끊이지 않고 타올랐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죽은 영혼이 가는 ‘지옥’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인간 생존에 필수품인 ‘소금’이 49절에서는 ‘게헨나’와 관련하여 부정의 의미로 50절에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긍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에는 로마 병정들의 월급(salary)으로 대체되곤 했다.
지금 예수 일행은 갈릴리를 떠나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전환점에 서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강한 믿음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거친 말씀들이 등장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40절) 기독교는 유일신관과 함께 타력구원론을 갖고 있어 이웃 종교에 배타적이지만, 불교를 비롯한 이웃 종교는 신관이 다르고 자력구원론을 갖고 있어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 예수가 추구한 하느님 나라를 정의 평화 생명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는 나라로 이해할 때,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설사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에 배타적이지 않는 한 이들 또한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50절) 소금은 짠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다. 이 말씀은 우리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 항상 자기 성찰에 힘쓸 것과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해 지연, 학연, 종교의 차이를 넘어 함께 협력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