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 자료(2024년 6월 9일, 성령강림절 3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성서 본문]
창 3:8-15; 시 130; 고후 4:13-5:1; 막 3:20-35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창세기 3:8-15}
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11 하나님이 물으시기를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시니,
12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13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14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신학적 관점]
창세기 1:1-2:4a의 사제신학(Priestly tradition)은 다른 제국의 신이 아닌 저들의 신인 YHWH의 창조, 남녀 공히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생육과 번성, 자유와 해방으로서의 안식일 제정 곧 원복(original blessing)에 주안점이 달려 있다면 이후 3장까지의 J신학(Jawist tradition)은 창조의 원형으로서의 에덴동산, 원죄(original sin), 그리고 심판으로서의 동산 추방을 말하고 있다.
1장은 만물 창조의 끝에 인간이 등장하는 반면 2장은 인간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곧 1장은 시스템을 창조하고 2장에서는 관계를 창조하신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신의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신은 단순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신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 조각가가 진흙으로 형상을 빚어내는 것처럼 직접 창조를 수행하신다. 그리고 동산지기가 되시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고 아담의 홀로 있음에 공감하신다.(랍비 조너선 색스. 『생명을 택하는 믿음』 한국기독교연구소 28쪽)
본문은 신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중세 교리사에서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그리고 알메니안 논쟁을 불러왔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교단 간에 주요한 신학 차이로 남아 있다.
[목회적 관점]
금지 명령을 ‘깨’는 것이 ‘깨어남’이라는 뱀의 유혹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존재한다. 목사, 장로, 집사의 직임은 섬김의 직분이다. 이 직분이 특권으로 이해될 때, 공동체 내에 분열과 단절이 일어난다.
본문은 여성 차별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말씀이다. 여성신학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주석적 관점]
J 신학은 말놀이(words play)를 즐겨한다. 남자(ish)와 여자(ishshah, 2:23). 뱀(arummim), 간교(arum, 3:1), 벌거벗음(arom), 저주(arur, 3:14).
고대 근동에서 뱀은 다산과 지혜, 영원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가나안 토착 종교 여신인 아세라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예수 또한 뱀의 지혜를 언급하였다(마 10:16). 광야에서의 뱀은 또한 인간에게 치명적인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참조. 불뱀/구리뱀 이야기, 민 21:4-9).
벗었다는 말은 순진함과 공격으로부터 취약한 상태(비교 3:21)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껍질이 약한 뱀이 가장 취약한 동물 중 하나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선악의 열매를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핑계’ 혹은 벗은 몸을 부끄러움으로 이해하여 성적(性的) 지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먹도록 허용된 또 다른 나무 곧 생명나무의 빛에서 보았을 때, 이는 협소한 해석이다. 에덴동산은 죽음이 없는 영원의 장소를 상징한다. 처음 두 사람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2:25)은 서로를 육체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곧 저들은 죽음을 알지 못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은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뱀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한다(3:5). 따라서 열매를 먹은 후 벗은 몸을 깨달았다는 말은 신과 분리된 자신들의 육성(肉性)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이는 자신들이 죽음의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선악의 개념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육성의 영역 안에서만 작동을 한다. 동물이나 신의 세계에는 선악의 구별 개념이 없다.
이레니우스를 비롯하여 현대 신학자 중 일부는 15절의 ‘너의 자손’을 ‘사탄’으로, ‘여자의 자손’을 ‘그리스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어거스틴을 비롯한 다른 교부들과 깔뱅, 그리고 현대 신학자 다수는 그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경계하면서 ‘너의 자손’을 생물 뱀으로 그리고 ‘여자의 자손’(zera)을 인간 집단으로 이해한다.
[설교적 관점]
도입 질문: 1. 오늘날 ‘나 아담’이 듣는, 하느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는 어떠한 소리일까?
2.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뱀과 하와가 대화를 나눌 때에 어디에 계셨을까? 자유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보고도 모른 체 하고 계셨을까? 다른 일로 바쁘셨을까? 만약 끝내 모른 체 하셨다면 원죄의 책임이 하느님께 있는 것은 아닐까? 법적인 의미에서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서 모른 체 한다면 공범이 된다. 더욱이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서 끝까지 모른 체 할 수 있을까?
3. 만약 ‘그 여자’가 열매를 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동산에서의 추방도 없었고, 구원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구원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또한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질문에는 남녀라는 성적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아담과 하와가 먹을 수 있는 생명나무와 먹어서는 안 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두 나무가 있었다(2:9).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였다(3:6).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특별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다른 말로 삶의 일상성을 뜻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경계를 파괴하고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인간(adam)으로서의 유한한 자기 존재성(adama, 흙, 티끌)을 깨닫고, 일상에서 스스로 한계를 긋는 책임성이다.
선악의 판단 기준은 양심과 같이 상대적이다. 개인의 경험, 지식, 인격. 시대 관습, 문화에 따라 그 기준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모두가 지켜야 할 선과 악의 경계선을 긋는다면 그는 절대권력의 소유자이다. 곧 고대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자는 절대 군주를 의미한다.
본문에 기초해서 원죄(原罪) 개념이 나왔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인 존재로 근본적으로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hubris)이 숨어있다. 그러나 교만은 인간의 기본 속성인 자유 의지의 발현으로서 자아 성취의 부정적인 표현일 따름이다. 기독교가 원죄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인간의 자아 성취 혹은 자기 존재됨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본래 신은 인간을 축복하기 위해 창조했지, 저주하기 위해 창조하지는 않았다. 이 축복을 위해 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했다. 자유 의지를 개인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지, 자유 의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다고 해서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을 ‘전적 인간 타락’이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전적 예수 구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성찰 없이 반복하면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에 그러했듯이 ‘백인 중심의 제국적 그리스도인’ 혹은 자기 절대 의인론에 빠지는 위험한 신앙인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Brueggemann은 뱀을 창조의 첫 번째 신학자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하느님에 관한(about) 학문으로 믿음을 분석하고 대상화하는 일로 하느님의 말씀 복종과 맞바꾸는 위험한 기업(enterprise)이기 때문이다.(Feasting, 100쪽)
제2성서는 첫째 인간 아담이 불복종으로 인해 깨어진 신과의 관계를 둘째 인간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한 전적 순종으로 이를 회복한 화해자로 말한다.
{시편 130}
1 야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2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3 야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야훼님 믿고 또 믿어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이스라엘이 야훼를 기다리옵니다. 인자하심이 야훼께 있고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고린도후서 4:13-5:1}
13 성경에 기록한 대로 "나는 믿었으므로 말했다" 하였으니, 우리도 그러한 믿음을 일으킨 같은 영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고 있고, 또한 우리도 말합니다.
14 우리는,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자기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5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유익하게 하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신학적 관점]
장례식장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씀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이끄는 바울의 글에 대해 비판적이다. 특히 본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구절을 장례식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주 인용하는 일에 대해 좋아할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당면하고 있었던 현실은 로마 황제 숭배 아니면 신학 용어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 대망’이라고 말하는 피안 세계로의 도피 외에 제3의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목회적 관점]
우리의 몸과 현재의 삶이 ‘장막 집’이라고 하는 말을 죽음의 장소인 장례식장이 아닌 일상의 삶에 적용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기껏해야 2, 30년 머물다 갈 고가의 아파트 소유(투기 목적 함께) 혹은 기껏해야 몇 달 혹은 일이 년을 병상에서 기계에 의존해서 허덕이다가 결국 잿더미로 사라질 육신(겉사람)을 위해 많은 금액을 의료비로 소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주석적 관점]
세계정신을 크게 히브리적 사고와 그리스적 사고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자는 동(動)적이며 전인적(全人的, wholistic)이고, 후자는 정(情)적이며 분석적으로 주로 이분법적 비교를 갖는다. 본문은 겉사람/속사람, 일시/영원, 가벼운 고난/크나큰 영광,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사람/하느님, 장막 집/영원한 집이라는 그리스적 이분법적 사고의 전형이다.
13절 “나는 믿었으므로 말했다”는 70인 역 시편 115장의 첫 문장이다. 115편은 영육의 구별이 없다. 우상 섬김을 비난하고 있다. 오히려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17절)라고 말하면서 오늘의 삶(복)을 강조한다. 피안적 도피신앙을 우상의 삶에 비유한다.
[설교적 관점]
지금도 유목민들은 철을 따라 거주하는 집(천막)을 접어 이동을 한다. 이동을 쉽게 하려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적어야 한다. 죽은 사람의 거주지를 정리하고 소유를 버리는 직업군이 있다. 지금 내게는 소중하지만, 내가 죽었을 때, 가족을 포함하여 타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쓰레기가 된다. 믿음이란 영원의 세계에서 오늘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바울은 우리에게는 이러한 영원을 보는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13절),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도록 이끌 책임이 있다(15절)고 말한다. 예수 신앙이란 영원을 바라보는 능력으로 인류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잘못된 현실을 변혁해 갈 책임을 갖게 한다.
{마가복음 3:20-35}
20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21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25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32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3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4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신학적 관점]
집과 가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여기서 ‘무리’는 불특정 다수가 아닌 갈릴리의 그 (바닥) 민중(ho ochlos)이다. 마가는 지리적으로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대결 구조를 갖는다. 예수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계속 활동을 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과 계속 논쟁을 벌이다가, 생애 마지막 주에 딱 한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숙청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사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히려 민중들이 그를 이해한다. 본문은 예수의 가족들마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의 활동을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사탄의 활동으로 이해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마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신앙공동체를 내세운다.
[목회적 관점]
목회자는 자기 가족과 교회라는 신앙 가족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 아파하는 가운데서도 교인의 아픔에 먼저 달려가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사들은 자기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기도 한다. 가족이기주의의 전형으로 교회의 머리를 사람으로 보는 곧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주석적 관점]
28, 29절은 서로 모순이 되기에 그 해석이 쉽지 않다. “비방을 포함한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고 선언하고 이어 예수를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비방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규정한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기적과 치유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적대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알세블의 문자적인 뜻은 ‘그 파리들의 주(두목)’(lord of the flies)이다.
[설교적 관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과 같이 가족은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다른 가족의 불행을 가져오는 것은 잘못이다. 가족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이다. 가족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지 목적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을 사탄으로 명명되는 힘센 자를 묶어 놓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오늘날 하느님의 뜻을 훼방하는 사탄에 속하는 ‘힘센 자’들은 누구인가? 가족이기주의, 인종혈통주의, 황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 국가안보주의, 첨단무기주의, 성차별주의 등등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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