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매 순간 갖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감정의 종류가 다양하며 그 강도도 다르게 나타난다. 생각은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감정은 하루 사이에도 여러 번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감정 가운데 인간 내면의 솔직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 변화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도 오해가 발생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개인의 내밀한 사정을 존중하는 것은 변화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 D. E. Schleiermacher, 1768~1834)는 일찍이 종교적 감정을 일깨운 인물이다. '근대 신학의 아버지', '19세기의 교부'라고 불릴 정도로 개신교 신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를 수용하든 비판하든 상관없이 신학의 역사에서 그의 공적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종교론.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1799)은 계몽주의의 세찬 물결에서 종교와 신앙을 구한 사상으로 평가받는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무한자 하나님과 관계하는 능력은 논리적 사고나 양심적 행위가 아니다. 이 능력은 무한자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직관과 감정이다. 사고가 정립하는 신학 체계나 도덕법칙을 실행하는 선의지도 무한자 하나님을 진정으로 드러낼 수 없다. 사고나 의지는 자기의 자발적 활동으로 무한자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사고나 의지와 달리 직관과 감정은 수동적이며 수용적이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믿음은 자라기 시작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늘 무한한 세계를 동경(憧憬)한다. 동경은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의식이며 그 세계를 향한 내면의 방향성이다. 이것은 무한자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그에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충족되지 않은 감정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이러한 동경의 감정을 소유한다. 사람들은 성(聖)과 속(俗), 숭고함과 천박함, 고상함과 허무함이 교차하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다.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혼합 속에서도 무한자를 향한 동경의 감정을 가지며 이를 통해 거룩함과 숭고함에 도달하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인을 지배하는 동경의 감정을 '거룩한 슬픔'이라고 부른다. 거룩한 슬픔은 그리스도인의 자랑과 겸손을 규정하는 감정으로서 모든 기쁨과 슬픔, 사랑과 공포를 동반한다.
신앙인은 천상이 아닌 세상에서 살아간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동경하는 사람은 무한자와 유한자라는 두 세계와 관계한다. 그는 무한자에서 나오는 거룩하고 숭고한 마음을 갖는 동시에 세상에서 나오는 속되고 허무한 마음도 갖는다. 신앙인이 두 세계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속됨을 선택한다면 무한, 초월, 구원과는 무관할 것이며, 거룩함만을 선택한다면 세속을 살아낼 수 없다. 땅에 매인 존재가 세상의 조건을 벗어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원과 초월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속됨을 거룩함과 결합해야 한다. 속됨을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려고 하는 동경을 통해 그의 마음은 새로운 생명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동경의 감정은 온전히 채워질 수 없다. 성스러움과 숭고함에 이르려고 하지만 충족되지 않는 열망은 슬픔으로 이어진다.
원래 거룩함은 세상과의 구별과 분리를 뜻한다. 이것은 세상의 속됨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거룩함은 인간의 총체적 삶 속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신적 원인이기도 하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거룩함을 열망하지만 이에 결코 이를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거룩함을 동경함에도 이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은 슬픔의 감정과 정조(情調)를 피할 수 없다. 거룩한 슬픔은 세상살이에서 오는 슬픔과 다르다. 이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 위해 애쓰는 무한한 감정이다.
거룩한 슬픔의 연원은 잘못된 세상만이 아니다. 겉으로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교인과 교회가 슬픔을 가중한다. 내적으로 거룩함을 상실한 집단 가운데서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는 아예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거룩함은 세상에서 사라지며 그 결과 종교가 아예 소멸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강력하게 경고한다. 종교는 거룩함을 상실한 '현실에 대한 영원한 논박'이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거룩함이 결핍된 세상을 거룩한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다면, 거룩한 슬픔은 단순히 내면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는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거룩함을 상실한 세상을 비판함으로써 세상에 거룩함이 스며들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회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집단은 구원과 무관할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슬픔에도 불구하고 세상 가운데 거룩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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