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이젠 '왜'라고 묻자 - 밀란 쿤데라

ree610 2022. 7. 7. 17:47

이젠 '왜'라고 묻자 - 밀란 쿤데라

 

"자동차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은 걸어가는 사람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먼지 속에 남겨둔다. 자동차를 가진 이에게도 못 가진 이에게도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 1946~ )의 '오래된 미래' 본문에서 말하는 이 현상이 기술문명의 딜레마이다. 언뜻 보기에 최첨단으로 달려온 현대 문명이 많은 것을 빠르고 편리하게 해주었고, 우리 삶이 더욱 풍요해지고 발전한 듯하지만 그 배후엔 과연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안겨준 고민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빈부의 갈등, 환경파괴, 실업자와 자살률의 증대 등이 이 시대의 모순과 위기감을 보여준다.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는 이와 같은 사회 현상의 배후에 '기술적 합리성'이 놓여있다고 보고, 이것이 지배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기술산업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삶이 기술적 합리성의 지배 안에서 통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은 그 어떠한 존재의 목적도 없는 '중립적 처리대상'으로 간주 되며, '경제적 효용 가치', 세속적 '권력의 지배 대상'으로서 전락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르쿠제는 개인의 생각과 욕구, 일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기술산업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로 규정한다.

전체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억압과 분열, 지배와 통제를 통해 일부 사회적 특권층의 권익을 보호한다. "전체주의적이란 말은 사회를 정치의 테러적 통치만을 의미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지배적 관심을 동원해 각 개인의 욕구를 조작해내는 비테러적 경제-기술적 지배 속에도 들어있다." 경제적이고 기술적 작동의 원리는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현재와 미래를 점령하여 버렸다. 돈 벌기 위해, 현대적 첨단 지식과 기술을 배우기 위한 몸부림은 모든 젊은이와 미래세대의 생존조건이 되었다. 이들은 불행하다.

불행은 젊은 세대만의 운명이 아니다.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소비문화의 화려한 파티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한 과도한 흥분상태가 개인적 부자유와 사회적 갈등을 만든다. 돈과 물질적 가치의 숭배는 개인의 일상을 전장에 참전 중인 전사로 만든다. 치열한 삶, 속도와 효율성만을 부추기는 현실은 개인을 더욱더 다그친다. 사람됨의 가치와 행복의 전통적 가치들은 무시되고 외면해 버린다. 마치 자동차의 운전자가 노면 위의 도로상태 외엔 그 무엇도 볼 수 없듯이, 기계 장치 속 엔지니어로 돌변한 현대인들은 기계 장치의 조력자로 성실히 순응할 것을 강요받는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문명에 의존한 삶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 기술과 자연의 적절한 공존방식은 무엇일까? 언어학자인 노르베리-호지가 1975년 언어 연구를 위해 인도 북부 작은 마을 라다크에 들어갔다가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생태원리를 이용한 지혜를 통해 천년이 넘도록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 온 비결을 <오래된 미래>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행복'의 의미에 대하여 되묻는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참 행복의 묘책은 전통적 라다크적 삶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저생산 체계의 구축이자 느림의 철학 안에 투영되는 '생명'과 '삶의 본질'에 대한 추구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수백 년 전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를 주장하되 반개발의 진보를 지향한다. 서구적 산업사회가 지향하는 개발형태는 극히 '악성개발'에 가깝다. 난개발의 폐해와 권력의 집중화 현상을 극복하고 행복한 내일을 가져다줄 가능성은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돌아갈 가치나 문화적 터전은 무엇일까?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는 '느림'에서 우리에게 생각의 익숙함에서 떠나고 숨겨진 개념들을 되살리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빈둥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 "고요한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외쳐야 한다. 강요된 속도감의 엑스터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잘못된 개념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대인은 '왜?'라는 질문을 잊었다. 세상은 온통 어떻게 살 것인지에만 관심이 많다. '어떻게'를 위해 조기교육을 받고, 학교에 진학하며, '어떻게'를 전제로 결혼한다. 그렇지만 무엇을 위한 '어떻게'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삶의 방편과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하였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라고 다그친다. 모두가 전사가 되어버린 현실, 기술산업 문명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전과 다른 곳을 주목하는 데에 있다. 일단 현재의 나를 멈추자, 그리고 새로운 질문을 던져 보자. 나는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의 길, 나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보자! 참뜻은 스스로 찾아내야만 내 것이 된다.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슬픔  (0) 2022.09.22
이제는 포스트 크리스텐덤 시대  (0) 2022.07.13
마지막 수업 중에서  (0) 2022.07.05
만남은 도끼입니다.  (0) 2022.07.01
인공지능 사회와 공공가치  (0) 2022.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