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삶

램브란트와 괴테

ree610 2021. 9. 18. 07:17

램브란트와 괴테

17세기 네덜란드,
부자들의 비위만 잘 맞추면 유능한 화가가 돈을 벌기는 쉬운 세상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램브란트는 고객의 주문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모습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자 부유한 고객들은 실망하였고, 마침내는 그를 외면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천재화가의 예술적 자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특성을 파악했다. 그 점에 이 화가의 장기가 있었다.
말년에 그린 한 폭의 집단초상화에는 포목상 길드의 조합원들이 등장한다.
탁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다섯 명의 가난한 상인들이었다.
성실한 태도를 견지하며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는,
보통사람들의 진면모를 파악한 것으로 평가된다.

램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소묘도 많이 남겼다.
그곳에도 빈부의 차이는 무척 컸다.
가난에 시달리는 빈민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장애인과 맹인도 적지 않았다.
램브란트는 세상에서 소외된 그들의 표정을 화폭에 담았다.
또, 그는 바로 그 사람들을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되살려내기도 했다.
이런 그림을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부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화가 램브란트는 그런 구구한 사정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역사책을 쓰는 나란 사람도 램브란트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텐데 그게 뜻대로 잘 될지 모르겠다.)

램브란트는 작중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데서 큰 희열을 느낀 것 같다.
22세 때 그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그림을 감상한 독일의 문호 괴테는 우울과 방황으로 세월을 보내던 자신의 청춘시절이 생각났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과장된 표현이 될지 몰라도,
램브란트의 자화상 한 장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킨 동력이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세상풍조에 무조건 영합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했던 렘브란트, 그는 성찰적인 화가였다.
20대 청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화상이란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그의 자서전이었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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