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포럼

교양, 문명, 그리고 문화

ree610 2023. 1. 19. 10:09

문화에 대한 몇가지 생각

 
  문화와 악
사탄의 기원에 관한 여러 이야기 가운데 구약 외경 에녹 1서가 자못 흥미롭다. 에녹 1서 6장 이후에는 ‘감시자들의 책’이라고 불리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는 악한 천상의 세력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조금 비슷한데,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감시자들의 두목인 세미아자스가 다른 감시자들과 함께 모의하여 이 땅의 여인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거인들이 태어났는데 이 일로 그들은 천상에서 쫓겨났다.(14-15장) 그런데 이 천상의 반역자들이 이 땅의 여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천상의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이들이 전한 비법은 8장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아자엘은 칼, 방패, 흉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팔찌, 금속 장신구, 화장법, 물감 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세미아자스는 마술과 약초 뿌리 캐는 법, 아르마로스는 마술을 푸는 법, 바라키엘은 천문학, 코키엘은 점성술, 사티엘과 세리엘은 별과 달에 관한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하늘의 반역자들은 이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었고, 이들이 저지른 일이 원인이 되어 대홍수도 발생하였다. 또한 이들이 인간에게 전수해준 여러 가지 비법으로 인해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게 되었다.(16장)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에녹 1서의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생각을 조금 엿볼 수 있다. 천상의 반역자들이 저지른 악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천상을 떠나 인간 여인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의 비밀을 인간에게 전수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심판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들이 전해준 하늘의 비법은 그 자체로서는 악하지 않다. 문제는 그 문화로 인해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전수받은 각종 비법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하며, 그 결과 이 땅에 대홍수가 임함으로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문화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악한 것인가? 이번 호에서 우리는 문화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얻어질지도 모른다.

교양, 문명, 그리고 문화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는 자신의 책 Culture and Anarchy에서 문화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culture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culture는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 피폐해진 인간의 삶을 중화시켜 주는 일종의 해독제이자 휴식 공간이다. 그는 야만인, 속물, 우둔한 군중 등을 언급하는데, 이들은 이 culture를 통해 교화되어야 하는 대상들이다.1) 즉 culture는 ‘교양머리 없는’ 하급 인간에게 교양과 예의와 상식을 갖추어서 적절한 사회 구성원으로 영입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튜 아놀드의 culture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전근대적 계급사회로부터 경제력을 무기 삼아 새롭게 편성되는 사회구조로 넘어가는 변화 과정 가운데 부르주아 계급이 아직 권력 획득을 완성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새로운 구조질서로 편입시켜서 자신의 지배구도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평가된다.2)
그러하기에 매튜 아놀드의 culture 개념은 상당히 가치 편향적이다. ‘야만인들’(barbarians)과 ‘속물’(philistine)과 ‘우둔한 군중’(populace)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이 창조하거나 누리는 삶이 저급하고 야만적인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저급한 것들을 버리거나 개조하여 좀 더 고급지고 고상한 삶을 누려야 하며, culture가 이런 일들을 수행하는 도구가 된다. 즉 아놀드의 생각에는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양태는 고급과 저급, 고상한 것과 야만적인 것 등 나름의 비교 가능한 가치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은 culture를 통해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아놀드의 culture는 ‘문화’라기보다는 ‘교양’에 해당한다.
‘교양’이라는 것은 가치 지향적 의미를 내포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교양이 있다/없다’거나 ‘교양인’이라는 식으로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지위나 사회적 관계의 수준을 가늠한 것이다. 따라서 교양이라는 용어는 어떤 사람이 누리는 삶의 조건이나 양태가 어느 정도의 수준(평가자의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이지만)에 도달했는지 살펴보거나, 혹은 타인이 누리는 그러한 조건이나 양태와의 비교라는 방법을 통해 ‘높다/낮다/좋다/나쁘다/많다/적다’ 등과 같은 용어들로 비교/대조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한편, ‘문명’이라는 용어도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문명이라는 용어도 교양이라는 용어와 비슷하게 가치 비교가 개입된 용어이다. 예를 들어, ‘문명국가’라든지 ‘문명인’ 혹은 ‘문명의 발달’, ‘미개문명’ 등과 같은 표현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된다. 문명국가라는 말은 어떤 국가는 문명화되었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한 국가도 있다는 것이고, 문명이 발달한다는 말은 이전보다 더 나아진다는 비교 가능성을 내포한다. 미개한 문명이라는 말은 그 반대편에 미개하지 않은 발전된 문명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양’과 마찬가지로 ‘문명’이라는 용어도 가치 비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문화에 고급과 저급, 고상과 야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화라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가치 비교가 개입될 수 없다는 점에서 ‘교양’이나 ‘문명’과는 다르다.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많겠지만, 가장 폭넓게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두뇌활동을 거쳐서 만들어진 모든 유형/무형, 가시적/비가시적인 생산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3) 문화가 무엇인지는 그 상대적 개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문명’의 반대말은 ‘미개’이지만, ‘문화’의 반대말은 ‘자연’인 것이다. 문명과 미개는 다분히 가치 비교적이다. 즉 문명은 ‘편리하다, 깨끗하다, 빠르다, 합리적이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에 미개는 ‘불편하다, 더럽다, 느리다, 비논리적이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에 비해 위에서 언급한 문명과 미개를 수식하거나 서술하는 표현들을 문화에 갖다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문화란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문화라는 개념의 외연을 아주 크게 그려볼 때, 인간의 두뇌활동을 통해서 생산된 모든 결과물이라고 정의해보았다. 그렇다면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자연과 달리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서 나온 것은 모두 문화이다. 예를 들면, 태양이나 달빛은 자연이지만 전구에서 나오는 빛, 빛을 활용해서 만든 조명효과 등은 문화 혹은 문화적 산물이다. 태양은 자연이지만, 태양광을 활용해서 어떤 조명장치를 만들었다면 그 조명장치에 이용되어 어떤 역할을 하는 태양빛은 문화적 산물이다. 정원에 핀 꽃은 그 자체로는 자연이지만, 그와 동시에 조경이나 정원문화라고 하는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그 꽃을 사진으로 찍거나 그림으로 그렸다면 그 꽃은 자연 그대로 있지만, 사진에 찍힌 그 꽃(의 모습)은 자연이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깊은 산속에 있는 소나무는 자연이지만, 재선충 방제를 위해 수간주사를 맞았다거나 솔잎차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그 잎을 따냈다면 그 소나무는 과학이나 다도(茶道)라고 하는 문화의 흔적을 지니게 된다. 추상적·비가시적인 것 또한 마찬가지다. 법, 제도, 사회적 관습, 철학 등 인간의 두뇌활동으로 생성된 것들은 문화의 영역에 들어간다.
앞서 문화는 문명의 대응개념이 아니라 자연의 대응개념이라고 언급했다. 그 말은 가치를 비교 평가하는 데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문명은 발달했다거나 뒤처졌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문화가 발달했다거나 뒤처졌다고 하는 것은 사실 적절하지 않다. 마치 천둥 번개 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가리켜서 발달이니 뒤처지니 하고 말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역사는 문화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18세기 산업혁명의 결과로 교통이 발달하자 소위 강대국 혹은 문명국이라는 국가들은 앞을 다투어 세계 탐험에 나섰고, 그것은 식민지 개척과 연결되었다. 이들이 탐험을 통해 새롭게 찾아낸 지역의 원주민들은 그들의 눈에는 한심해 보였다. 원주민들에게는 자신들처럼 빠르고 편리하게 항해할 수 있는 항해술도 없었고, 입는 것이나 먹는 것 등 생활하는 모습도 참으로 낙후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시작했는데,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가져온 삶의 방식을 주입해준 것이다.
그나마 그들은 일부 선한 양심이라도 있어서 원주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발로에서 그리 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명인들’은 자신들의 발달한 문명과 기술을 가지고 (자기들 보기에) 덜떨어진 ‘문명’을 가진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 사용했다. 소위 제국주의적 행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식민지를 개척해서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지배했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를 낮잡아 보도록 세뇌시켰다. 그들은 피지배자들의 문화가 저급하고 미개하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고급 문화를 갖고 있고 너희는 하급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배하고 너희는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입시켰으며, 자신들의 지배를 통해-종종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억압하거나 자신들의 문화로 대체시키는 행위를 통해-그들이 더 나은 문화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과정을 통해 피지배민들의 문화는 말살되어 갔고-강제로 혹은 세뇌된 피지배민들의 자발적 말살 행위를 통해-그들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절에 소위 ‘문명인’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배나 착취, 침략을 정당화하고 피지배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를 부끄러워하면서 잊어버리거나 없애버리려고 하는 생각을 심어주는 전략은 ‘문화’와 ‘문명’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문명은 가치 비교적이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다. 즉 문명이나 기술은 발달/발전이 있지만, 문화는 발달하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모든 양상의 문화는 동등한 가치나 비중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문화는 발달했다거나 뒤처졌다고 하는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침략 지배자들은 ‘문화’와 ‘문명’을 동일시하여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낮잡아 보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물론 문화와 문명이 서로 깔끔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문화는 그 울타리가 상당히 광범위해서 문명이라는 것이 문화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는 것과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은 문명의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것은 문화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면 느리고 불편하지만,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 빠르고 편리하다는 가치 비교가 가능하며, 이러한 면에서 이것들은 문명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동시에 문화이기도 하다. 즉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는 것과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이 빠르고 느림, 편안과 불편의 가치로 서로 비교할 수는 있으나, 이것을 가지고 열등과 우월을 내세우며 소달구지를 타는 ‘문화’를 낮잡아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최근 ‘느림의 미학’이라고 하여서 전자레인지에 후다닥 인스턴트 식품을 돌려 먹는 것을 거부하고 천천히 시간을 두고 요리해 먹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한 자가용을 놔두고 천천히 걷기를 즐기는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도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렇다면 ‘슬로우 푸드’를 먹는 사람과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열등하거나 미개하거나 뒤떨어진 사람인가? 따라서 우리는 ‘문화’라는 것을 ‘문명’과 구분지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문화’라는 것에 함부로 칼자루를 휘둘러 대는 ‘제국주의적’ 행태의 오류를 줄이게 될 것이다.

문화는 완전히 가치중립적인가
그렇다면 모든 문화는 다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어떤 가치 평가를 하는 데 항상 예외의 특권을 부여받는가? 이 점에서 잠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우리는 문화가 문명, 교양 등과는 달리 존중받아야 할 가치를 가지며 비교나 대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가? 우리는 또한 문화가 인간의 두뇌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결과물이라고 크게 둘러 말했다. 따라서 문화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용납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문화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가 비교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고대 시대에 어린아이를 잡아서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불태워 바치는 제의문화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납될 수 있는가?4) 이러한 제의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두뇌활동을 통해 인간이 고안해낸 문화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어떠한 비교, 평가에서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전쟁도 일종의 문화이다. 그래서 심지어 잘 싸우는 법, 나는 안 죽고 남을 잘 죽이는 법, 즉 병법(兵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일종의 문화이므로 그냥 무비판적으로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법 제도도 일종의 문화인데, 모든 법이나 제도는 무흠(無欠), 무결(無缺)한가? 문명이라는 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켜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적 행태가 지독한 교만이라면, 문화에 대한 지극히 낙관적 태도 역시 인간의 능력이나 성품에 대한 교만이 아니던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라는 것이 이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인간은 항상 틈만 나면 선을 외면하고 악한 것을 추구하려는 죄의 본능을 지닌다는 사실이며, 그 인간을 통해 생산된 문화 역시 그러한 죄의 본능의 영향에 항상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문화(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문명을 포괄하는 큰 개념으로서의 문화로)를 가지고 고급/저급, 우등/열등 등을 함부로 가리는 제국주의적 행동을 지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문화를 아무런 비판이나 비평 없이 그대로 다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 또한 자기 위선적-나는 관대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으스대며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인간은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우기면서 또는 착각하면서) 인간의 악한 본성을 외면하기 때문에 자기 위선적이다-교만이 아니던가? A라는 문명은 B라는 문명과 비교, 대조될 수 있다. 그러나 A라는 문화를 B라는 문화와 비교 대조하여서 우열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A라는 문화가 되었든, B라는 문화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 문화는 그 문화 자체로서 (타문화와의 비교가 아닌) 비평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문화는 우등/열등, 고급/하급을 논할 수는 없지만, 그 자체로서 선함과 악함을 논할 수 있다. 선한 문화가 있는 반면에 악한 문화도 있다. 문화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만들어낸 인간이 선한 본능 외에도 악한 본능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문화는 선할 수 있지만, 어떤 문화는(적지 않은 문화가 그러하다.) 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과연 선한지,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서 이것이 변할 수도 있고,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도 달리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이삭이 라헬과 레아 두 사람을 아내로 삼았고(창 29장), 유다의 아들 오난은 형수와 동침하여 후손을 볼 것을 거부하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었지만(창 38:8-10), 오늘날 아내나 첩을 몇 명씩 거느린다든지 형수와 동침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문화는 타문화와의 관계라는 가치 비교적 차원에서 가치중립적이지만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무한한 낙관적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라는 것을 바라볼 때 낙관적 태도로 모든 것이 가(可)하다고 수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며, 그렇다고 주관적 입장에서 칼을 들이대면서 함부로 재단해내는 것 또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빠진 행동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문화를 바라보는 것은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분명히 세상에는 악한 문화(엄밀하게 말하면 악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악하게 만들어졌거나, 악한 인간의 본성이 악하게 왜곡시키거나, 악하게 활용하는)와 선한 문화가 있으며,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문화가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문화를 대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더불어서 행여 자신이 이데올로기(여기에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기제를 의미한다.)의 유혹에 빠져서 극단적 주관주의로 칼자루를 휘두르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는지 잘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인으로서 문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세심한 작업이며, 쉽게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요인과 변수가 늘 도사리고 있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문화를 바라볼 때는 이런 요인과 변수를 최대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문화 비평을 한다는 것은 윤리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인간에게는 늘 악의 본능이 잔존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이미 완벽해진 천상의 천사와 같은 존재가 아닌, 거룩함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내일 일조차 알지 못하는 많은 한계를 지닌 완전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비판해야 하며, 또 늘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문화를 바라볼 때 좀 더 겸손한 태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5)
앞으로 다양한 문화의 양상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거나 성경과 연결해보는 구체적 작업을 해나갈 것이다. 특히 다음 호에서는 음악이라는 문화를 다룰 것인데, 음악이라는 문화 양식이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혹은 우리의 신앙을 풍부하게 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1) Matthew Arnold, Culture and Anarchy: An Essay in Political and Social Criticism(NY: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2) T. Eagleton, Criticism and Ideology: A Study in Marxist Literary Theory(NY: Verso, 1998), 104-105.
3) 양재훈, 『판소리의 신학적 풍경』(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277-317.
4) Cf. D. A. Carson, Christ & Culture Revisited(Grand Rapids: Eerdmans, 2008), 71-73.
5) 웨슬리(J. Wesley)의 표준설교 35번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면에서 완전하고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지 잘 설명하고 있다.


양재훈 | 고려대학교에서 영어(B. A.), 협성대학교에서 신약학(Th. M.), 캐나다 맥마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유대교와 초기기독교(M. A.), 영국 셰필드(Sheffield) 대학교에서 외경과 마가복음으로 초기기독교(Ph. D.)를 공부했다. 현재 협성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성서와 문화의 대화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많은 연구를 했다. 최근에는 산상수훈과 어린이 성경 번역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판소리의 신학적 풍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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