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꿈

큰 별이 졌다. 전철환 총재

ree610 2004. 6. 19. 12:15

[2004. 6.18. 전철환 Dead] 한국 경제의 큰 별이 졌다 한은총재 전철환
채원배 * 김진형 기자
18일 한국 경제의 큰 별이 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보경제학자이자 외환위기 극복의 주역이었던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가 이날 오전 0시5분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65세.
유족들과 친지들은 고인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 유족들에 따르면 허리가 좋지 않았던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심장이 좋지 않아 심장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고인의 초등학교 동창들은 "인명은 재천이지"라면서도 "2주전에도 통화해서 수술 받고 보자고 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전 전 총재는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던 역사적 순간에 상환서명을 한 주인공이자 52년 한은역사를 통틀어 임기(4년)를 온전히 마친 다섯번째 총재다.
그는 오래전에 타계한 박현채 선생과 더불어 민족경제론을 주장한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로 꼽힌다. 전주고와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60년 고시 행정과(12회)에 합격, 63년부터 경제기획원과 교통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76년부터 충남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의 휘호 '노동신성'을 집안에 걸어놓기도 했으며 국내 신협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충남대 교수로 재직하던중 98년3월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은 총재에 임명됐다.
그는 취임후 해를 거듭할수록 탄탄한 실무경험을 축적하면서 중앙은행 총재직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우리경제가 외환위기 후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동안 금리인하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쳤으며,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과의 두터운 친분으로 활발한 금융 경제외교를 펼쳤다.
그의 취임 첫 해인 98년 성장률은 마이너스 6.7%였지만 99년이후 2001년까지 각각 10.9%, 9.3%, 3.0%의 성장률을 기록, 3개년 평균 7.7%의 성장을 이뤘고 물가는 98년 7.5%에서 이후 3년간 평균 2.4%로 낮아졌다.
그는 퇴임하던 날 기자들에게 "어려울 때 들어와 좋을 때 나가 기분이 좋다. 나는 정말 복받은 사람이다"며 "한은 총재가 된 것만해도 더할 수 없는 영광인데 임기를 다 채웠고, 경제가 어느정도 안정된 상황에서 퇴임을 하게 돼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한은 총재 퇴임 후에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집필 활동에도 주력해 왔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소탈함과 검소함에 찬사를 보낸다. 한은 총재 시절에는 취임전 타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집에서 직접 몰고 다닐 정도였다. 학교 교수출신이 이만하면 됐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 재임 중 의사(맏아들)와 판사(둘째아들)인 두 아들을 결혼시켰지만 두번 모두 임원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극비로 치르기도 했다. 고인의 친구들은 "한은 총재까지 지낼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는 소탈한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한편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사회 각계 각층의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장례식장 2층 복도에는 장례식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고인의 타계 소식을 전해들은 친지들이 잇따라 도착하고 있었다. 또 황영기 우리금융 회장, 장병구 수협은행장 등 금융계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이경자(62·충남대 국문과 교수)여사와 종은( 35·서울대 분당병원 의사)씨, 종익(33·헌법재판소 연구관)씨등 2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며 발인은 20일 오전 7시, 장지는 익산 선영이다. 02-760-2011
 




 박태견 지난 9월4일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강연을 하던 중에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했다.『세계가 큰 고통을 겪고 있는데 미국만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번영의 오아시스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발언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전세계 금융계가 발칵 뒤집혔다. 달러당 137엔선에 머물고 있던 엔화환율은 한순간에 132엔까지 급등했고, 일주일 내내 급락하던 뉴욕증시의 다우존스 지수는 380.53포인트라는 월가 100년 사상 최대의 반등세를 기록하면서 가볍게 8000선으로 복귀했다. 이와 함께 스톡홀름에서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주요 증시의 주가가 급등했다.
전세계 금융시장이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그린스펀의 발언이 미국의 금리인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모든 증시 관계자들은 『미국이 나 혼자 잘살겠다는 식으로 계속 나가다간 제2차 세계공황이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계의 경제대통령」 그린스펀

이런 그린스펀의 발언은 세계 금융계의 공포를 해소시켜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국 연준이 세계경제 붕락을 막기 위해 금리인하를 단행해 세계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의 소비를 촉진시키면 세계경제의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월가 사람들은 적기에 터져나온 그린스펀의 발언에 대해 『과연 그린스펀답다』며 『미국의 경제대통령은 클린턴이 아니라 그린스펀』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일각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린스펀은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러나 그린스펀의 위력은 이번에 처음 과시된 게 아니다.
그린스펀은 1987년 공화당 정부에 의해 연준의장에 임명됐다. 그런데도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에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의 간곡한 애원과 압박을 묵살하고 고금리 정책을 고수하면서 경기부양책을 사용치 않은 결과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함으로써 두고두고 부시와 공화당의 원망을 듣고 있다. 그린스펀은 그러나 『구조조정기인 당시에 경기부양책을 썼다면 미국경제가 오늘날처럼 부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지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있다. 당시 미국 정가에서는 『그린스펀이 미국 대통령을 갈아치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그린스펀 의장의 오랜 행보를 남다른 관심을 갖고 지켜본 국내집단이 있다. 다름아닌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사람들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그린스펀 의장의 「오아시스 발언」을 접하자 『그는 언제 금리인하를 얼마나 하겠다는 말 대신 은유적 표현 한 마디로 세계경제 불안을 진정시켰다』며 『중앙은행 총재다운 최고의 화법을 구사했다』고 격찬했다.
그러나 한은 사람들이 그린스펀 의장의 행보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극찬을 하는 이유는 결코 그의 빼어난 화법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그린스펀 의장이 행사하고 있는 정책결정의 독립성과 정확성, 시장의 절대적 신뢰에 대한 부러움의 또 다른 표현이자, 『우리나라 중앙은행 총재도 저 정도 위상은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남다른 바람과 기대감의 표출일 것이다.

금통위원 시절 직언 서슴지 않아

지난 3월6일 한국은행 창립사상 처음으로 「재야」 출신인 전철환(全哲煥·60) 충남대 경상대학장이 한은 총재로 부임해왔다. 전총재가 임명사실이 알려진 직후 기자들과 만나 『당일 오전 김중권(金重權)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대기하라는 연락만 받았을 뿐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밝혔듯 본인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단행된 깜짝인사였고, 이전에 수많은 금융계 및 관계, 학계 인사들을 한은 총재 후보로 거명했던 언론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사였다.
당연히 전총재의 발탁 배경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돌았다. 우선 지역연고설로 전총재는 전북 익산 출신이다. 비호남권 인사들 사이에서는 『호남정권이 들어서자 권력요직 장악 차원에서 단행한 지역주의 인사』라느니, 『한은 총재에 호남출신을 앉혀 놓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하려는 게 아니냐』는 등 별로 곱지 않은 뒷말이 떠돌았다. 청와대 강봉균 수석과는 같은 전북 출신,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의 전주고 1년 선배 등 다수의 정부요인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대목도 우려 요인이 됐다. 한은 내부에서조차 『한은 총재는 돈을 풀라는 정부에 맞서 최대한 돈줄을 틀어쥐어야 하는데, 과연 총재가 앞으로 동향인 정부책임자들과 통화정책을 놓고 격돌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일부 제기됐다.
재야 출신이라는 대목을 놓고도 보수진영 내에서 말이 많았다.
전총재는 전주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 12회에 합격해 경제기획원, 교통부, 무임소장관실을 두루 거치다가 유신체제가 가동되자 회의를 느껴 1975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시절 4·19를 체험한 세대인데다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후손(천안 전씨)이라는 점 등이 작용한 탓인지 학계에 들어서자 유신정권의 개발독재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고, 19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교수 시국선언에 가장 먼저 서명했다가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후에도 「사회정의와 경제의 논리」 「한국경제론」 「상황과 인식」 등 「풀뿌리 경제론」을 주창한 진보적 저서를 잇따라 집필, 당시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금융통화운영위원을 맡고 있던 1988, 1989년에 재무부의 도발적 공세로 불거진 한은법 파동 때에는 한은 독립을 앞장서 주장했으며, 당시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들이 한은 독립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금통위원 중 유일하게 재무부 눈치를 안 보고 정부안을 비판했던 소신파이기도 했다. 이 일로 전총재는 금통위원직에서 교체됐다.

기대와 우려 속 한은 총재 취임

그후에도 경실련 고문과 「올바른 지방자치 실현을 위한 시민모임」 공동위원, 중경회 등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특히 1992년 대선과정에 당시 김대중 후보의 경제자문 모임으로 출범한 중경회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와 간접적으로 접목하게 됐으며, 이때 맺은 인연으로 정권교체 후 한은총재로 중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총재의 재야경력은 「한은의 변화」를 바라는 많은 이들에게는 환영할 일이었으나, 정책조율 과정에 한은과 잦은 접촉을 가져야 하는 재정경제부 등 관청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대목이었다. 때문에 과천 관청가에서는 『과연 재야학자 출신이 복잡한 금융·실물경제를 다루어야 하는 한은 총재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 『보수성향의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 이규성(李揆成) 재경부장관과 업무협조가 잘 될지 걱정된다』 『반외세 성향이 강한 전총재가 과연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굴욕적 협상과정을 참아낼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등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관가에서는 전총재가 IMF체제 작동 직후인 올해 1월에 「한은 소식」이라는 한은 기관지에 기고한 「한국 지성인의 회한」이라는 글에서 『IMF는 우리의 희망도 비전의 상징도 아니며 오직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갑자기 커진 국제금융자본의 첨병』이라며 『훗날 역사에서 IMF시대가 경제예속의 수치시대였다기보다는 대도약의 계기였다고 기록될지 몰라도, 지금은 경제적 주권과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사활을 걸고 금융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대목을 문제삼아 총재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가운데 전총재는 3월6일 한은 총재에 취임했다. 세간의 여러 궁금증에도 전총재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단지 취임 기자회견에서 『중앙은행은 고집스러울 만큼 보수적으로 통화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며 『미국에서는 앨런 그린스펀 연준위원장의 한 마디에 경제가 움직이지 않는가』라는 간단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발언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통화정책을 운용함에 있어 정치적 외압이나 관치금융을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는, 「한국의 앨런 그린스펀」이 되겠다는 선전포고이자 자기다짐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권 압력에 한계 드러내

전총재가 취임 후 가장 먼저 봉착한 골치 아픈 사안은 조직 및 인원 감축이었다. 정부가 재정긴축과 구조조정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각 정부부처는 감원작업에 착수했고, 한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은은 특히 지난해에 재경원과 사활을 건 한은법 독립투쟁을 벌인 뒤라 예산권을 쥐고 있는 과천청사로부터 음양으로 가해지는 감원 압박이 대단했다. 정부부처에 대해선 10%의 감원을 요구했으나, 한은에 대해선 절반 이상을 줄이라고 주문했다. 한은은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고 그 결과 전체의 25%에 달하는 600여 명이 한은을 떠났다. 정부 유관부처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감원이었다. 재경부 등은 우회적으로 더 자르라고 압박을 가했으나, 전총재는 『더이상은 한 명도 안 된다』고 일언지하에 끊어버렸다.
『4000명이던 직원을 지난 몇 년 사이에 2100명으로 줄였다. 연초에는 25%나 줄였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에서 더 줄이라고 야단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중앙은행의 중요성을 모른다. 한은은 지금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서 그렇지 참으로 중요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한은이 미 연준처럼 시장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선 우리 경제가 직면한 현안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올바른 방향과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며칠 전 기자와 만난 전총재의 말이다. 취임 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은 도서관에 8000여 권의 장서가 있다』고 하자 『중앙은행의 보유도서가 그 정도여서 되겠느냐』고 문제삼은 점이나, 바쁜 업무과정에도 직원들이 작성한 연구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미진한 대목을 보완하도록 지시하거나 지금도 많은 책을 탐독하는 것도 『한은 사람은 공부벌레가 돼야 한다』는 평소 지론에 따른 것이다.
전총재는 그러나 조직축소 과정에서 최초의 「정치적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한은의 지점 폐쇄 계획이 정치권의 발목잡기로 백지화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한은은 조직축소 차원에서 현재 전국 15개 도시에 있는 지점 중 목포 울산 포항 강원 등 4개 지점을 폐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들 지역을 폐쇄키로 한 것은 수십년 전 이들 지역에 지점을 설치할 때만 해도 예컨대 목포와 광주의 경우 교통편이 나빠 3~4시간 거리였으나 지금은 한 시간 내로 돈을 실어나를 수 있어 광주지점만 두어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필이면 네 곳 모두가 정계 거물의 연고지였으며, 당시는 보궐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정치권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했다는 점이었다. 목포는 김대통령의 고향이고 포항은 박태준 자민련총재의 지역구였다. 강릉은 한나라당 조순 총재의 지역구이며, 울산은 국회 재경위원회 차수명 위원장의 지역구였다.
지점폐쇄 방침이 알려지자 즉각 지역상공인들이 반발했고 정치권도 한은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차수명 재경위원장은 국회재경위 업무보고가 있던 날 전총재를 따로 불러 백지화를 요구했고, 한은의 전총재였던 조순 한나라당 총재도 재고를 요청했다. 박태준 총재도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고 국민회의측도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한은은 정치권의 압박에 굴복해 각 지점의 직원을 절반씩 줄이는 형태로 지점을 존속시키기로 했다. 당연히 여기저기에서 『총재가 처음부터 정치권 압박에 굴복하니 앞으로 통화정책을 제대로 펼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소리가 제기됐다. 전총재는 그러나 그후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았다.

통합 공급 확대 논쟁에 DJ는 중립

총재에 취임한 지 한달여가 지난 4월 말부터 재경부로부터 금리를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규성 재경장관은 4월21일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외신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지난해 말 IMF와 협의해 통화를 긴축적으로 운영하기로 한 것은 달러에 대한 원화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며 『하지만 통화긴축정책에 따른 긍정적인 요인보다는 부정적 요인이 더 많다』고 공식적으로 한은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장관은 『특히 긴축적 통화정책에 따른 고금리로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지고 있다』며 『환율이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외환보유고도 계속 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부담을 주지않고도 금리를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총재가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는 평소 『환율·외환정책은 재경부 관할이고 금리·통화정책은 한은이 주무부서다. 남의 영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시장참여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니만큼 절대로 삼가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지금은 경기부양보다 구조조정이 선행과제라는 게 전총재의 판단이었다.
전총재는 이규성 장관의 발언이 있던 바로 그날 세종로 청사에서 열린 외교통상부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고금리는 외자유입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외채가 많은 기업의 시장퇴출이나 기업의 재무구조개선을 촉진하는 바탕이 되므로 금리인하 문제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며 『우리경제가 국제신뢰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금리를 서둘러 인하할 경우 외국자금이 유출돼 외환위기가 재연될 우려가 있다』고 반대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전총재의 즉각적 반격으로 금리인하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한은은 당시 재경부가 제기한 통화확대 및 금리인하 주장의 내면에는 금융구조조정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정부가 발행하기로 한 51조원의 채권발행 금리를 최대한 낮추려는 복선이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높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할 경우 앞으로 재정부담이 클 것을 우려해 인위적으로 금리를 끌어내리려 한다는 것이 한은측 분석이었다.
실제로 당시 재경부는 51조원대의 막대한 채권 발행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재경부는 한은에게 돈을 찍어 저리로 채권을 사줄 것을 내밀히 요청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한은은 그와 같은 방식은 시장금리를 왜곡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며 그 대신 금융시장에서 실세금리로 발행할 것을 주문해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당시 재경부와 실무협상을 맡았던 박철 한은 부총재보는 이 과정에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통화공급을 늘려 금리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은 그후 경제대책회의나 경제장관간담회 등에서 부단히 제기됐다. 특히 실물경제 위축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극심해지면서 『돈을 풀라』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갔다. 모두가 적으로 바뀌어갔다.
단 하나 위안은 김대중 대통령이 중립을 지켜준 대목이었다. 전총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통령께서 통화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중립을 지켜주는 덕분에 적군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신용경색 해소가 첩경

전총재는 통화공급 확대주장에 대해 『현재 같은 극심한 신용경색 상황하에서는 돈을 푸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5월29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전총재는 현재 금융시장의 신용경색현상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소개했다.
『한국은행에서 푼 돈이 기업으로 흘러가지 않고 한은 금고로 다시 돌아온다. 한은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대주기 위해 작년 말부터 최근까지 시중에 총 18조원을 풀었다. 그런데 1조원만 기업에 대출되고 17조원은 한은에 되돌아왔다』
당시 대다수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을 국제결제은행(BIS)기준인 8%에 못 맞추면 퇴출당한다는 극한적 위기감에 사로잡혀 사실상 기업대출을 중단한 상태였다. 기업들도 연리 30%대의 살인적 고금리를 반년 이상 겪다 보니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돼 은행의 여신규정을 통과해 대출을 받기가 힘들었다. 채권시장에서도 겨우 5대 재벌만 회사채를 발행해 급한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당연히 중소기업들만 죽어나갔다. 「신용경색」이 원흉이었다.
신용경색이란 반 정도 물이 차 있는 컵을 보면서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며 불안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과거 경기가 좋을 때에는 은행들이 『물이 반이나 남아 있다』며 돈을 풀었다. 그러나 IMF시대가 시작되면서 은행들은 살 가능성이 절반은 있는 「회색기업」들에 무조건 대출을 회수하고 여신을 끊어버려 무더기 도산사태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런 판에 돈은 아무리 풀어도 해법이 못 됐다. 이러한 신용경색 해소의 첩경은 돈을 풀어 구조조정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 조속히 매듭지음으로써 시장심리를 안정시키는 것이라는 게 전총재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통화긴축이라는 원론에만 매달려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져 가는 참경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중소기업쪽으로 돈이 흘러가도록 해야 했다. 이에 6월 들어 전총재는 『이제 외환위기의 큰 고비를 넘겼다』며 『통화공급을 신축적으로 늘려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어떻게 해야 중소기업 쪽으로 돈이 흘러가게 만들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해법이 제시된 것은 8월 말이 돼서였다. 8월31일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소집해 총액한도대출 금리를 현행 5%에서 3%로 낮추고, 대출한도도 현행 5조 6000억원에서 7조 8000억원으로 2조원을 추가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총액한도대출은 은행들이 중소기업에 상업어음 할인, 무역금융, 소재부품생산자금을 취급한 실적에 따라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금융의 일종이다.
당시 재경부나 재계·학계에서는 본원통화공급을 늘리고 지준율을 폐지해 시중에 자금을 무한정 풀라고 난리였다. 지금은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라도 더 이상의 실물경제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돈을 풀 경우 자금이 또다시 대기업에만 흘러들어갈 것이 명약관화해 중소기업으로 돈이 흘러가도록 총액한도대출이라는 카드를 쓴 것이다. 한은은 동시에 현재의 신용경색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신용보증기금의 자본금을 확충해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보증이 활기를 띠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 세계은행(IBRD)과 이 문제를 협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총액한도대출 확대 결정은 한은의 독자적 작품이었고, 단지 금통위가 열리기 전인 8월29일 일요일에 전총재가 이규성 재경부장관에게 그 사실을 사전 통고했을 뿐이었다. 지난 4월1일 개정 한은법이 발효해 금통위가 재경부 산하에서 법적으로 독립하면서 만든 사실상의 첫 작품이었다. 재경부는 발칵 뒤집혔고, 정덕구(鄭德九) 차관의 지시에 따라 이날 한은이 발표하기로 IMF와 합의한 외환보유고를 자신들이 발표하는 감정적 반응을 보였다. 한은 직원들은 그러나 『이제야 한은이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가 아닌 중앙은행으로 자리잡아가는 것 같다』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중앙은행 독립 없인 나라 망한다

이처럼 전총재가 한은에 들어온 뒤 지난 반년간은 간단치 않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추위가 시작되면서 200만명의 실업자가 분노하고 좌절할 상황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부양이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사방에서 압박이 대단하다.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부동산 값을 올려야 은행의 BIS비율이 높아져 대출이 촉진되고 소비도 늘어난다는 논리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부동산 값이 오른다고 중산층이 집을 팔아 소비를 하겠는가.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 때문에 결코 팔지 않을 것이고, 일부 상위계층에만 인플레의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물론 건축붐이 일면 고용이 창출되고 서비스부문에 일시적으로 숨통이 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구조개혁의 핵인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도 안 된 지금, 경기부양론에 휘말려들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된다』
전총재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중앙은행 독립이란 곧 정경분리를 의미한다. 중앙은행이 정치권의 이해관계나 주문에 맞춰 통화정책을 펴다간 나라가 망한다』
지금 전총재가 받고 있는 안팎의 압박이 얼마나 큰가를 여실히 드러낸 말이다.
전총재는 철두철미한 「구조조정론자」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주인행세를 하던 「관치경제」에서 민간경제주체가 주인이 되는 「시장경제」로 전환되지 않으면 우리경제에 미래는 없다는 것이 그의 강한 소신이다. 취임한 지 6개월이 되는 9월5일 전총재는 한은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시장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직접규제나 창구지도 등으로 금융기관을 움직이고 금융시장에 영향을 끼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 은행은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함에 있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시장이 보내오는 신호와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해 실효성 있는 정책을 적기에 마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하겠다』
전총재는 지금 한 차례 큰 싸움을 각오하고 있는 것 같다. IMF체제 가동이후 수백만 실업자와 수만개 부도기업이 치른 희생과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권의 이해관계나 재벌의 엄포에 굴하지 않고 이번만은 제대로 「구조조정」이 되도록 중앙은행총재로서 승부를 걸겠다는 비장함을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당면한 위기상황을 구조조정이란 해법 한 가지만으로 풀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나라 안팎의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국내적으로는 이미 실물공황 국면에 진입했다. 국제적으로도 세계 공황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지고 있다. 미국이 최근 세계공황 예방 차원에서 금리인하를 통해 소비를 촉진시키려 하나 미국시장 하나로 전세계 과잉공급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과연 이러한 세계공황적 위기에서 「일국(一國)적 차원의 구조조정」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한은이 중앙은행으로서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펼치려 그 어느 때보다 시장의 소리를 많이 듣고 시장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장은 생명체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살 길을 찾는 게 생명체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생명체는 없다. 시장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고 시장과 하나가 되어 해법을 찾는 것만이 어쩌면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기탈출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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